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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존재의 힘을 증명하는 이야기다. 만날 수 없어도 만질 수 없어도 안을 수 없어도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 사랑의 힘과 정확히 일치하는 속성이기도 하다.
소설 속 배경은 감옥 안과 감옥 바깥이다. 반정부 테러 조직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유배된 남자.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와의 면회마저 불허 받은 여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지키며 그리하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불응하며 바깥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가는 남자.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담담하게 편지를 보내는 여자. 이것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증명하는 이야기. 읽는 내내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이 떠올랐다. 감옥에 갇힌 현우에게 보낸 윤희의 편지만 따로 묶는다면 이런 책이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다.
그녀는 종종 지붕에 올라가 해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에서 이웃과 콩을 솎는다. 휴대전화와 아파치헬기가 등장하고 이슬람권 단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정확한 시대나 나라를 명시하지 않은 까닭에 독자가 상상하는 어느 곳이든 이야기의 배경이 될 수 있다. 이 얼마나 살뜰한 배려인가 ! 편지로만 이루어진 서사지만 슬쩍슬쩍 흘린 단편적인 조건만으로도 지금 여기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전하기 충분하다. 80년대 우리나라일 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일 수도, 수단과 콩고일 수도, 태국이나 중국일 수도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그동안 존 버거가 쓴 책의 제목을 훑어봤다. 존 버거가 품은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품은 우물은 아무리 길어올려도 쉬 바닥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세계의 아픔을 직시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쓰는 것이 그의 행동이다. 가자지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는데, 그 어마무시한 폭력 앞에 좌절하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는 사실에 경외심이 생길 지경이다.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2014년의 잔인한 4월을 지나 5월을 맞은 우리가 경청해야 할 목소리이기도 하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좌절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명징한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이런 멋진 어른을 만나게 되어 안심했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고 침묵을 헛되이 만들지 않는 그녀, 아이다. 존재하기 고단할 때 소리 내 엉엉 울 줄 아는 용기. 절망의 끝에서 다시 빛을 찾아 한 발 내미는 열정. 편지로만 이루어져 지루할 때에도 그런 그녀가 있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탈출 약도가 나타날 때의 환희란! 그가 탈출에 성공해서 지붕 끝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다 옆에 살포시 앉는 풍경을 꿈꿔봤다. 그게 내가 간직하고 싶은 『A가 X에게』의 진짜 엔딩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들의 희망은 그들 몫으로 남겨지도록 침묵할 것이다. 침묵이란 가슴으로 대화하는 방법이라는 아이다를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