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신나는 노빈손 한국사 시리즈 3
강용범, 선희영 지음, 이우일 일러스트 / 뜨인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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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나라를 빛 낸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그 누구보다 빛나는 인물로 추앙받는 이유는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13척의 배로 그에 열 배에 달하는 133척의 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 그런 그를 보면서 어떻게 상황을 탓하고 환경을 탓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역사를 갖게 되었을지. 너무나 오랫동안 자주 들어온 이름이기에 그의 승리가 대단한 것을 알면서도 가끔씩 그것을 당연시 여기곤 했다. 헌데 다시 역사를 공부하며 그 상황을 생각해볼 때 그가 맞이했던 상황은 사실 누가 봐도 이기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순신 장군이기에 가능했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지피지기백전불태! 상대를 알고 나를 알고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이 말만큼 이순신 장군에게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싶다. 이순신 장군은 그 누구보다 우리나라 해전에 대해 자신의 손바닥만큼이나 잘 파악하고 있었고, 우리 해군의 강점과 약점은 물론 적의 강점과 약점 또한 확실히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각도로 최신 정보를 수집하며 적의 동향을 유심히 지켜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책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순신 장군은 우리 해군을 데리고 끊임없이 항해 연습을 하면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대비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승리는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의 뛰어남이 후세에 계속해서 추앙받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맹활약을 도왔던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 말고는 그 누구도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 전에도 후에도 분명 거북선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거북선이 아무리 뛰어난 배였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조각배보다도 못한 배였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계속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막강한 해군을 보유한 나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의 전쟁터로 나라를 내어주는 일도 없었을 터이고 나라를 뺏기는 치욕을 겪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또 아쉬울 뿐이었다.

 

거북선을 이끄는 노꾼의 조건

수군 중에서도 가장 힘 좋은 사람들은 노꾼으로 배치됐다. 격꾼이라고도 부르는 이들은 배의 동력원이었다. 밥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고, 적과 싸우는 사람들 못지않게 부상도 잦았다. 거북선 노꾼의 경우에는 신장을 4, 130센티미터도 안 되는 사람들로 제한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거북선 한 척에 들어가는 노꾼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명은 되는데, 힘도 좋으면서 키도 작은 사람 찾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35 중에서 - 

우리 해안에 맞춘 배, 평저선

조선의 배는 유난히 섬이 많은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서 항해해야 했다. 남해안과 서해안은 수심이 비교적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암초에 걸릴 위험도 많다. 때문에 속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평저선이 우리 실정에는 맞았다. 또한 평저선은 안정성이 뛰어나서 화포의 엄청난 반동에도 배가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 전함의 아래쪽 끝이 뾰족하다는 것을 노려서 좌수영 부근의 해협에 쇠사슬을 가로질러 두기도 했다.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87 중에서 - 

화포가 쓸모 없다고?

세종대왕 시절, 일부 신하들은 명중률도 떨어지고 만들기도 힘든 화포를 만들지 말자고 상소를 올렸다. 당시 무려 1만 정에 가까운 화포가 있었지만, 제조 기술이 미숙해서 발사 거리가 400~500보에 불과했다. 게다가 발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화포에 이것저것 넣다 보면 코앞에 적들이 몰려오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세종대왕의 뛰어난 지원과 지휘 아래 조선의 화포는 몰라보게 발전하게 된다.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97 중에서 - 

임진왜란 이후의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후에 훨씬 많이 만들어졌다. 건조 비용이나 유지 비용이 비쌌지만 성능이 검증된 까닭이다. 기록에 따르면 거의 20척에 가까운 거북선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영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 복원된 거북선은 조선 후기에 쓰던 것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잘 살펴보면 2층 구조로 노꾼과 포꾼이 한 층 배치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런 구조로 제대로 싸울 수 있었을까?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72 중에서 - 

선조는 못난이

임진왜란이 터지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신했다. 백성을 버리고 가면서도 화려한 복장이나 음식 등을 그대로 유지하여 많은 백성들의 빈축을 샀다. 선조가 떠난 후 한양은 혼란에 빠졌고, 노비들은 노비 서류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워 버렸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은 장기간의 통치를 염두에 두고 민심을 다독이며 노략질을 자제했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의 반격이 본격화되자 돌변하여 약탈과 방화, 살인을 일삼았다.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41 중에서 -

역사를 잘 모를 때는 없던 궁금증이 생겼었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세에 비해 당대 왕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공부하면서 이순신 장군이 외적을 무찌를 때 선조가 왕이었고, 광해군이 세자로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익히 알려진 폭군의 이미지와 달리 훨씬 더 괜찮은 왕이지 아니었을까 싶었다. 조선 역대 왕 중 연산군과 함께 신하들로부터 묘호를 받지 못해 광해군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그. 그를 보면 역사를 남겨진 기록만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다시 들여다보며 역사를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임진왜란이 닥치고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을 때 왕의 자리에 선조가 아닌 광해군이 왕으로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속상한 마음에 그저 상상 해보게 된다.

 

* 옥포 해전 : 159257, 경남 거제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왜군을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바다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 당포 해전 : 159262, 거북선이 활약한 해전이다. 권준 장군이 왜군의 우두머리 장수를 활로 쏘아 맞히자 왜군들은 사기를 잃고도 망쳤다.

* 한산 대첩 : 159277, 견내량에 있던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쳐서 적 함대를 거의 격침시킨 전투이다. 진주성 대첩.행주 대첩과 더불러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다.

* 부산포 해전 : 159291, 부산포에서 왜선 1백여 척을 무찌른 해전.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녹도만호 정운 등 6명이 전사하였으며 부상자가 25명이 발생하였다.

* 명량 대첩 : 1597916,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은 단 13척의 배를 이끌고 왜선 133척에 맞서 싸웠고 31척을 격침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인해 조선은 해상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 노량 해전 : 15981119, 조선 수군과 일본 함대가 벌인 마지막 해전. 전투는 승리했으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였다.

- <노빈손 이순신의 거북선을 수호하라> p124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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