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신나는 노빈손 한국사 시리즈 2
남동욱 지음,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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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나 많기에 당시 나라 안팎이 당연히 모두 평온했을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조선 4대왕인 세종대왕이 왕이 된 것은 조선이 건축 된지 26년 밖에 안 되었을 때니, 당시 우리나라의 안팎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평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격동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의외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종대왕의 시대가 태평성대로 기억된 것이 당시 상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21세에 왕이 된 세종대왕이 즉위 5년 만인 26세 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고, 30세 부터는 고질병인 당뇨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다른 것에 집중을 잘 못하겠는데, 몸이 좋지 않은 세종대왕은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나랏일을 훌륭하게 해내었을까 싶었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세종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통해서만 알았던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이 아니라, 왕으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인 세종대왕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고민하고 백성을 위해 연구하는 한 나라의 왕. 세상에서 왕만큼 편한 게 어디 있냐는 생각을 곧잘 했었는데, 역사에 대해 알수록 왕들의 삶을 알게 될수록 왕이란 참 힘들고 어렵고 고독한 삶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왕이 일반 백성들보다 많은 것을 누린다고는 하나, 왕이 걸어가야 하는 삶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삶이기도 했고 말이다. 왕에게는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는 이들이 두 명이나 곁에 있다고 했다. 한 명은 왕의 말을 기록하는 이고, 다른 한 명은 왕의 행동을 기록하는 이고 말이다. 게다가 왕을 보는 이는 그 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 주변에 첩첩으로 줄지어 동행하는 신하들이 있으니, 아닌 말로 방귀나 한 번 마음대로 낄 수 있을까 싶었다.

 

왕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와 책임. 그것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세종대왕을 왕이긴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의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 것은 그가 즉위한 지 보름 만에 그의 아버지로 인해 처가가 내쳐지는 것을 지켜봐야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외척 세력이 없어 그의 왕권이 강력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부인인 소헌왕후는 자신이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약을 받는 것을 봐야했고, 자신의 어머니가 노비가 되는 것 또한 지켜봐야했으니 말이다. 일국의 왕비임에도 왕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그녀, 그리고 왕이지만 왕이기에 그것을 그저 지켜봐야했을 그. 왕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세종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책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려워. 그 유명세나 인기도를 보자면 국내 사극 소재 1위가 되어도 신기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보통은 세종 시대가 태평성대여서 자극적인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들 해.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 지났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실록을 살펴보면 세종대왕의 치세 30년 동안 조용할 날이 하루도 없었음을 알 수 있어. 조선이 세워진 지 겨우 30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으니 안으로는 불안정하고 밖에서는 얕잡아보았던 거지.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9 중에서 -   

세종의 건강 진단

세종은 즉위 5년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 7년인 29세에는 두통으로 여러 달을 고생했다고 한다. 30세부터는 고질병인 소갈증(당뇨)이 시작되었고 고혈압이 따라 붙었다. 33세가 되면서 구레나룻이 세기 시작했는데 두뇌를 많이 쓰다 보니 남들보다 백발화가 빨랐다. 풍질, 어깨 부종, 피부병, 두통, 안질, 기력감퇴 등의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46세에는 몸을 움직이거나 말만 해도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동신언어라는 희귀한 질병까지 앓았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42 중에서 -   

세종대왕의 태평성대 프로젝트 기획서

다이나믹 조선 만들기

프로젝트 1. 집현전 확대 : ‘인재만이 살 길이다.’

프로젝트 2. 국토의 개척과 영토 확장 : ‘무장하지 않은 자유와 자주는 없다.’

프로젝트 3. 영농법의 연구와 배포 :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프로젝트 4. 조선의 선율을 찾아라 : ‘밥만 먹고 살 수 있나. 문화도 국력이다.’

프로젝트 5. 우리말을 우리 글로 적게 하라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81 중에서 -   

도천법이 건진 인재 장영실

도천법은 과거 시험과 상관없이 지방관이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이다. 1400년 태종 때부터 시행되었으며 노비였던 장영실이 궁에 들어오게 된 것도 동래현감의 천거(추천) 덕분이었다. 학자들이 뽑은 한국의 20대 과학 유산 중 6개가 세종 시절에 만들어졌고(앙부일구,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칠정산>, <향약집성방><의방유취>) 그 중 무려 5개가 장영실과 연관이 있으니 도천법이 아니었다면 한국 과학은 지금처럼 빛나는 유산을 가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45 중에서 -   

또 매우매우 중요한 삼사가 있지. 삼사가 뭐냐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함께 묶어서 삼사라고 해. 차근차근 알아보자면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곳이야. ‘판서 누구누구가 뇌물을 받았다더라이런 걸 임금님께 일러바치는 거지. 이뿐이 아니야. 사간원에서는 임금님의 잘못까지도 따진다구. 이걸 간언이라고 하지.

홍문관은 임금님의 자문 기관이야. 조선에서 법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전 임금님이 남겼던 선례들이야. 임금님이 어떤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그럴 땐 홍문관의 관리들에게 시키지. ‘옛날 임금님들은 어떻게 했는지 찾아보거라.’ 그럼 홍문관의 관리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책에서 선례를 찾아서 임금님께 알려주는 거지. 이 삼사가 중요했던 이유는 고위 관리는 물론이고 왕까지도 이들의 활동을 함부로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왜냐? 관리들이나 임금님의 잘못을 비판해야 하는데 눈치를 봐야 한다면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이 됐거든. 관리들이든 임금님이든 잘못하면 거침없이 비판해야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일이었지.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51 중에서

태평성대였을 것만 같았던 세종대왕 시대는 나라 안팎 뿐 아니라, 하늘로부터도 시험을 받았었다.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10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었다니 말이다. 게다가 그 옛날의 가뭄은 지금의 가뭄보다 훨씬 힘겨웠을 터. 그 긴긴 가뭄을 이겨내고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뤄낸 세종대왕이 대단하기만 해보였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세종대왕은 그저 힘겹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여기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위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덕분에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나 책들을 만들어 위대한 업적을 지닌 대왕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주관하는 가뭄조차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늘의 힘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왕.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세종대왕을 보며,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왕들에 대한 이해심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세종대왕을 보니 그런 왕들은 결국 무능했던 것이라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신하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것도, 왕의 힘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것도 결국은 지도자로서의 부재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만이 더더욱 강해졌다. 지도자의 능력은 사실 어려울 때 더 빛나는 것이니 말이다. 또 그만큼 무겁고 힘겨운 자리이고. 하지만 한 나라의 왕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진정한 왕이라 할 수 있지 싶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니 세종대왕에 대한 그리움이 나도 모르게 점점 커지게 되었다.

      

남대문의 서울의 정문?

명당에 자리 잡은 조선의 수도 한양은 거대한 성곽도시였다. 성곽도시다 보니 드나드는 문이 여러 개 필요해서 4대문을 만들고 그 사이마다 4소문을 지었다. 방위에 따라 동, , , 북대문으로 불리기도 했던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4대문이고,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4소문의 이름이다. 이중 지금은 사라진 숭례문이 서울의 정문이었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74 중에서 -   

<조선왕조실록>이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 25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국보 제151호이기도 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24 중에서 -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

전체 모습이 직사각형인 경복궁에는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신무문 등 모두 네 개의 문이 있었다. 건춘문은 동쪽 문으로 봄을 상징하며 천장에는 봄을 상징하는 청룡이 그려져 있었다. 문 안에 왕세자가 기거하던 춘궁이 있었고 왕의 종친이나 상궁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건춘문과 신무문은 원형 그대로이지만 광화문과 영추문은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33 중에서 -   

독도는 우리 땅!

세종은 영토 개념이 뚜렷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대마도가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 구역이라는 것을 문서로 대마도주에게 알리게 하였고, 그저 요도라는 섬이 동해 바다 가운데 있다는 전설만을 의지해 독도를 찾아나서게 했다. 신하들은 울릉도를 직접 방문해 조사하고 독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모두 <세종실록지리지>에 남겼다. 일본이 나중에 막무가내로 우길 줄 아시고 기록해 두셨던 게지.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13중에서 -   

고려청자

고려 시대에 제작된 도기와 자기를 말한다. 선사 시대부터 발전되어 온 도기질요업과 9세기경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기질요업이 확대되면서 도기질과 자기질로 양분되었다. 커다란 독 같은 저장용과 대접, 접시, 병 등 음식용, 그리고 의례 용구나 문방구, 다기 등 고려의 불교문화와 귀족생활문화를 반영하는 고급청자, 이렇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 <노빈손 세종대왕의 화포를 지켜라> p130 중에서 -   

요즘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보고 계획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중요성에 비해 역사를 통해 배우려는 일은 많지 않은 듯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홍문관에 대해 알고 나니 바로 이거다 싶었다. 우리나라 왕들은 홍문관을 두어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역대 왕들의 선례를 통해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홍문관이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 곁에도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전국에 있는 국사 선생님들 중에서 선별해 7,8월 여름 방학과 12월부터 2월 겨울 방학 동안 교육 공무원이 아닌 국가 공무원으로서 대통령 측근에서 대통령에게 역사적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대신 한 번이라도 이렇게 교육 공무원이자 국가 공무원으로 업무를 본 사람은 절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고 말이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정말 멋지다고 자화자찬을 하기도 했다. 픽션이 가미된 역사책들을 많이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상상이 과해지나보다.

 

 

 

 

 

- 연필과 지우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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