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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랄라랜드로 간다 - 제10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ㅣ 푸른도서관 54
김영리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재미있는 표지 그림과 흥미로운 제목을 보며 무슨 내용일지 궁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책을 펼쳤다. 그저 재미있게만 읽을 것 같았던 이 책은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다 읽은 후에도 참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각기 떨어져서 지내는 우리 가족, 고열이 오면 경기를 하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불과 얼마 전 고열로 경기를 한 아이를 혼자 데리고 병원에서 몇 일을 지내다 온 내 상황 때문에 더 많은 생각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게 도움이 된 거예요?”
- 중략 -
“음. 그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연 내 귀의 도움이 훨씬 더 컸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그 사람이 보이거든. 친절한 사람인지, 으스대기 좋아하는 사람인지, 소심한 사람인지, 수줍은 사람인지, 우울한 사람인지 아니면 용기 있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다 느껴져. 예전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호감과 비호감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이분법으로 나누었는데 이젠 뭐랄까,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수백 가지의 색을 새삼 느끼게 된 것 같거든.”
-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 p47 중에서 -
“그래, 용하도 그렇게 느꼈었구나. 엄마도 그랬어. 이번 일 겪으면서 자꾸 그때 그 시인이 해 준 말이 생각나더라. 사람이 보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했잖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엄마에게는 피터 최라는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우리 집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운 사람에서 이모할머니가 끝까지 눈에 밟혀 하던 가슴 아린 자식으로, 나이만 먹었지 아직도 가족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철없는 사촌 동생으로 말이다.
-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 p157 중에서 -
이 책은 가족이 있음에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산가족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다, 겨우겨우 한 지붕 아래에서 다 같이 만나 살게 된 어느 소년의 이야기였다. 이 소년은 기면증을 갖고 있었는데, 부모님에게는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한 채 홀로 자신의 병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괴롭히는 못된 친구들 때문에 그의 기면증 증상은 더 자주 생겨나고 학교에서는 공식적인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모든 상황이 힘겹기만 한 소년 용하. 용하를 보면서 나는 당연하게 여겼던 집이라는 곳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이 한 지붕아래 모여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생각하게 되고 말이다. 우리 가족도 지금 이산가족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고 있다. 용하네처럼 경제적 어려움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한 지붕이 아닌 세 지붕아래에서 각기 떨어져서 지내고 있다.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 심적으로 참 많이 힘겹기만 하다.
어른인 나도 이런데, 어린 용하는 어땠을까. 온전한 집도 아닌 고시원에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한참을 지내야 했고, 다시 모여서 살게 된 집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게스트 하우스고 말이다. 게다가 완치될 수 없는 병까지 갖게 되었으면서도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말도 하지 못하고 지냈으니. 아플 때일수록 더 부모님 생각이 나고, 부모님한테 투정 부리고 싶었을 텐데. 어린 용하는 그러지 않았다. 혼자 비밀노트, 비트를 쓰면서 자신의 병을 치유해보려 했다.
그리고 난 그런 용하의 비트를 몰래 보면서 용하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되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과 집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과 떨어지고 집을 빼앗긴 채 사는 이들을 보니 그 소중함을 너무나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 적어도 우리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잠깐 동안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니 다행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지금은 비록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 두렵고 속상하지만, 얼마 있으면 끝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든 끝을 알면 그래도 조금은 덜 무서운 법이니 말이다.
“음.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들 하지. 몇 해 전부터 눈에 띄게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그리고 다들 곤히 자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 버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든 줄 아냐. 젊었을 때 이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싶더구나. 그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잠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거든. 그런데 넌 한창 나이에 그 귀한 시간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리는 거잖냐. 뭐 잠깐씩 잠드는 동안 네 영혼이 쑥쑥 자란다느니 체력이 보충된다느니 하면서 좋은 말로 대충 덮어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다고 네가 아 그렇군요 하면서 덥석 믿을 나이도 아니고.”
-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 p62 중에서 -
“나 랄라랜드에 가 본 적 없어.”
첫마디를 내뱉고 나자 그 다음부터는 말이 술술 이어졌다.
“네가 어디서 무슨 글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쓰러지면 그냥 블랙아웃이야. 깜깜해. 아무것도 없어. 간혹 환몽이니 뭐니 쓰러질 때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모르겠어. 어쨌든 난 아니야. 난 쓰러지면 그냥 온통 암흑일 뿐이야. 그때 랄라랜드니 뭐니 한 거는 그냥 걔들한테 엿 먹이려고, 얼굴 근육이 무너져서 이상한 표정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무슨 말이든 해서 입 근육을 움직이려고 멋대로 지어낸 말이야. 사실 난 소리가 무서워. 고시원에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소리가 없는 게 지독히 싫은데 그 반대로 큰 소리 나는 것도 두려워. 소리가 크면 감정이 미친년 널뛰듯 뛰는데 그럼 나도 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겠어. 그래서 소리가 만들어 내는 감정이 싫어. 그게 음악이든 뭐든. 개들 말이 맞았어. 랄라랜드에 간다느니 뭐니 한거, 다 거짓말이야.”
뒤에 무슨 말이라도 더 붙였어야 했다. ‘거짓말이야.’에서 말을 끝맺을 순 없었다. ‘거짓말이지만 그래도.’라는 말로 꼬리를 잇고 싶었지만 배터리가 다 닳은 것처럼 입을 움직이는 모터가 멈춰 버렸다.
-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 p170 중에서 -
우리 아이들이 고열이 오면 경기를 하기는 하지만 용하처럼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고열이 심할 때만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거라고 위안을 삼아본다. 또 경기는 기면증처럼 불치병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증상일 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다독여도 보고 말이다. 만 6세는 되어야 경기를 안 한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열이 날 때마다 잘 지켜보고 열을 최대한 낮춰주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답답하지는 하지만, 병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싶다.
헌데 이제까지는 아이가 경기를 할 때면 그 상황이 무섭고 걱정이 돼서 아이가 어떤 느낌을 가질지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다시 경기를 하지 않도록 아이의 열을 빨리 낮춰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아이의 입장에서도 조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순간 잠이 드는 용하, 용하는 잠이 들 때마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얼마나 무섭고 답답했을까를 생각하다보니, 우리 아이도 경기를 하며 정신을 잃고 경기를 할 때 얼마나 무섭고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용하처럼 종종 랄라랜드로 가는 우리 아이들. 우리 가족이 용하네 가족처럼 다시 한 지붕 아래 모여서 살게 되면, 우리 아이들도 더 이상 랄라랜드로 자기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 연필과 지우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