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된 할아버지 책읽는 가족 52
문영숙 지음, 이영림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으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치매로 정신에 이상이 온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전과 달리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전엔 치매는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만 여겨졌었다. 근데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나면서 나도 어머니가 되고, 손자, 손녀를 보시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시는 걸 보다보니, 치매라는 것이 나와도 그리 무관하지만은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서 누구도 예외는 아니니 말이다.

 

치매, 뇌졸증, 중풍.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병은 세월이 주는 병 중 가장 무서운 병이 아닐까 싶다. 때론 몸만 멀쩡히 놔두고 정신만을 앗아가기도 하고, 또 때론 정신만 온전히 놔두고 몸만 마비시키기도 하며 다양한 증상을 보이며 나타나지만 완치가 어려우니 말이다. 게다가 본인 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겹게 만들다보니,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병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부모님과 나의 노후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보게 되었다. 과연 어떤 노후 생활이 좋은 걸까.

 

젊을 때 열심히 모아서 즐겁게 살다가, 노후에는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고 요양원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노후 때까지 그만한 돈을 모아놓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렇게 편안한 노후를 맞이 할만 한 곳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가 혹시나 치매에 걸렸을 때 ‘당당히 요양원에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닥치지 않고서는 절대 장담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저 나로 인해 가족 모두가 힘들어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을 놓고는 어떻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눈앞에 닥치지 않은 일이지만, 치매가 중병임에는 분명하고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임에도 분명했다. 근데 과연 내가 모실 수 있을까. 모시자니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요양원에다 모시자니 불효하는 것 같고. 가족 모두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라도 집에서 모셔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조금 불편하더라고 가까운 요양원에서 모시면서 가족의 안정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과연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인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찬우네 이야기가 담긴 <아기가 된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우리 할머니가 중풍에 걸리셨던 것도 찬우처럼 내가 초등학생 즈음이었다. 방학 때면 우리 집에서 지내시던 친할머니가 어느 날 중풍으로 잠깐 쓰러지셨다가 일어나셨는데, 그 뒤로 몸의 일부가 마비되셔서 불편한 생활을 하시게 되셨었다. 다행히 정신만은 온전하셔서 찬우네처럼 전쟁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식사나 목욕 등 많은 것들을 혼자서는 하지 못하게 되셨었다. 일상생활의 많은 것들을 도움을 받아야 하실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신체적인 불편함만을 겪으시다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하지만 만약 찬우네처럼 우리 할머니가 정신에 이상이 생기셨던 거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우리 집도 찬우네처럼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찬우 엄마였더라면, 난 아마 더 힘들어했을 것 같다. 지금도 아기와 하루 종일 보내면서 종종 힘들어 하는 날 보면 말이다. 자그마한 아기도 이렇게 힘든데, 덩치 큰 아기가 되어버린 어른이야. 게다가 아기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가면서 수월해지지만, 어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아기 되서 점점 더 손이 많이 가게 되니. 심적으로도 훨씬 더 힘겹게 느껴지지 않을까.

 

세상에 막 태어났을 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기, 그 아기가 나이를 먹고 세월을 먹은 뒤 세상을 떠날 때는 왜 또 그런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세상에서 너무 많은 때를 묻혀서 그것들을 모두 다시 세상에 내려놓아야만 하늘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인 걸까.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 아기를 보며 내 마음은 더 심난해졌다. 언젠가 내가 돌아갈 모습이 우리 아기와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고 도는 인생의 사이클에서, 맞물려 있는 탄생과 죽음의 그 연결고리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그래서 옛말에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다.’고 했나 봐.”

“치사랑이 뭔데?”

“자식이나 손자대로 내려가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베푸는 사랑을 내리사랑이라 하고, 치사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을 말하는 거야. 자식이 아무리 효도를 해도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지. 정말 그런 것 같다.”

 

- <아기가 된 할아버지> 중에서 -

 

계속해서 떠오르는 ‘왜’ 라는 질문 끝에 결국 답을 구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하늘이 주신 효도의 기회라고. 세상에 아기로 태어났을 때 부모님에게 받았던 사랑과 정성을 다시 부모님에게 쏟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 그래서 나이가 들고 세상과 작별할 즈음이 되면 다시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자식들로부터 보살핌을 받도록 하시는 거라고 말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돌봐주셨듯 우리도 부모님을 돌봐드리며 못다 한 효도를 하는 거라고. 나중에 효도할 일 없도록 평소에 부모님 건강 잘 챙겨드리며 평소에 효도를 잘 해야겠다.

 

 

 

- 연필과 지우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