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0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0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참말이제 얼마나 당했노? 오죽하믄 인호가 머리 깎고 중이 될라 했이까. 내 원수는 남이 갚아준다는 옛말 하나 그른 기이 없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 사네라. 죄지어서 남 주나?”

 

- <토지 5부 4권> 중에서 -

 

 

인과응보의 법칙은 5부 3권에 이어 4권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내 원수는 남이 갚아준다’는 작가의 말도 계속되었다. 이 말이 나올 때마다 난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피눈물이 흐르게 했던 이들이 하나둘 자신의 죄 값을 치르게 되겠구나.’ 하는 믿음에서 말이다. 정말 지켜보기만 하는 나로서도 치가 떨리는 이들이 많았다. 왜 저렇게 살까 싶을 정도로. 엄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우가네 식구들 하며,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배설자며, 주는 것 없이 남의 것을 탐하기만 하는 임이며. 다행히도 이들은 모두 자신의 죄 값을 치렀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의 등장은 비단 책 <토지>에서만이 아니다.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도 종종 보게 된다. 뉴스를 보다 보면 정말 저것이 사람이 할 짓인가 싶을 정도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 세상을 살면서 악한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혹시나 책 <토지>에 나오는 이들처럼 악인에 의해 몸과 마음이 힘겨운 이들에게 작가는 작은 위안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죄는 결국 다른 이를 통해서 받게 될 거라고.

 

 

“그 문제는 내게서 떠났다. 과연 인간이 인간에게 벌 줄 수 있는가. 그런 능력 같은 것은 없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으로 극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난 오선권을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미워했거든. 그러나 결과나 과정도 결국은 범한 사람이 감당할 문제라는 생각, 문제라고 말한 것은 원인과 결과는 매우 정확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내가 전도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상한 체험에서 달아나고 싶은 무의식의 노력도 부인할 수는 없을 거야. 또 형무소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도, 하기는 뭐 고통이 심하면 죽기를 원했던 심정, 그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상당히 나를 지탱하게 해주었어.”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 운명은 아닐 거고 필연이란 말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내 생각이 신을 모독하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신의 도움 없이, 신비한 힘에 의하지 않고 행한다는 그 자체는 움직인다는 것 아니겠어? 움직인 것만큼, 움직임의 방향만큼, 정신도 포함해서 당도하는 곳이 있다. 또 그것은 각기 다르고, 사람들은 벌 받았다 복 받았다 표현을 하지만, 글쎄 나도 어떻게 충분히 표현을 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말이야. 배설자는 강 여사 염력에 의해 벌 받은 것도 아니며 배설자 스스로의 결과 아니겠는가. 내 말은... 결국 원점이구나.”

여옥은 픽 웃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벌이라 하지만, 그래 그건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야.”

웃기는 했으나 여옥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단단했다.

“일본이 앞으로 패전하게 되면 그것은 일본, 그들의 행적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겠어? 사람들은 소위 악을 행하면서 또 선한 입장에서 착각하고 몽상하고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인식밖에 없는 거야. 한순간 순간 삶을 실감하는 그것.”

 

- <토지 5부 4권> 중에서 -

 

 

‘그 문제는 내게서 떠났다’는 말을 보며 난 내가 하는 작은 다짐이 생각났다. 내가 고민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그냥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고. 고민할 시간에 다른 것을 하자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지만 어디 그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던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만 같은 내 문제를 내려놓기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옥을 통해 하는 작가의 말. ‘그 문제는 내게서 떠났다’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인과응보에 이은 작가의 또 다른 일침.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 다는 것’ 어쩜 이것은 ‘내 원수는 남이 갚아준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일 수 있다. 내가 한 대로 단지 남에게 원수질 정도의 악행을 한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행동 한데로 나에게 모든 결과가 돌아온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작가는 곧 일본의 패전이 올 것이라는 것과 일본이 행한 일들에 대한 결과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려지는 그림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그로 인해 일본이 받은 고통 역시. 그들이 행한 일들에 대한 당연한 결과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일본의 기우는 국제정세와 그와 함께 좁아지는 친일파들의 입지, 그로 인해 하나 둘 모아지는 민심과 피어나는 독립의 꿈.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 했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알 수 없던 미래 앞에서 조금씩 당당해지고 있었다.

 

가장 통쾌했던 것은 최 참판댁의 개입을 통해 개동이가 면소에서 쫓겨난 것이다. 작은 권력을 남용하며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던 우가네. 윤국이의 학병으로 나갔을 때는 안타깝기만 했는데, 그로 인해 최 참판댁의 입장이 당당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되살아나는 최 참판댁의 권위 앞에서 동네 사람들 역시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 했다. 가진 자에 대한 사람들의 적개심과 시기심은 큰 것이었지만, 언제나 정의의 사도처럼 의롭게 동네의 대소사를 돌보는 최 참판댁은 그런 것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최 참판댁이 마을의 큰 어른인 것 마냥 마을의 기강을 세우고 마을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는 것에 사람들은 좋아라 하고 있었다.

 

평사리의 모습은 꼭 우리 조국의 축소판 같았다. 최 참판댁은 힘없이 사라졌다 되찾은 우리 조국의 주권이요, 친일파는 우리 조국을 탐하고 주인인 마냥 활보를 치던 일본이요, 친일파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던 마을 사람들은 불쌍한 우리네 백성이다 싶었다. 책 <토지>는 그렇게 넓게는 우리 나라 전체를, 작게는 평사리를 우리 조국의 삶에 비유하며 그려내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제야 책 <토지> 안에서 자신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1945년 광복 당시 여고생이었던 그녀. 책을 좋아했던 여고생 상의를 통해 그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일본인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고 거침없이 말했던 것은 그녀의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바람이었을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상의 안에 작가 박경리가 숨 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그녀가 나라 없는 조선의 여고생으로 겪었을 절망과 분노, 상처까지도.

 

 

“억새풀같이 살고 싶어서요.”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상길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지나가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데 욕심 더 안 부리겠어요. 나는 길을 걷는 게 좋아요.”

“전도사업을 계속하겠다 그 말이오?”

“당장은, 그렇지는 않아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말하던 그 할머니, 그곳에서 심경이 변한 거요?”

최상길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나서 물었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 할머니 사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 분은 자신의 불행까지 사랑한다고 할까. 천지만물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어요. 겨울 긴긴 밤에 목화씨를 발가내면서도 밥을 짓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뿐질러 넣을 때도,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힐 때도, 그 정성이 하나의 의식같이 보이는 거예요. 할머니 자신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나도 저와 같이 시간을 가득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 여러 번 했어요. 싱그러운 풀 같고 흐르는 강물같이, 뭐라 설명이 안 되지만.”

“.......”

 

- <토지 5부 4권> 중에서 -

 

 

이것은 박경리 선생님의 딸이 그렸던 어머니 박경리의 모습이었다. 사상범으로 지목된 사위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로 살아가는 딸이 안타까워 딸을 볼 때마다 속이 상했음에도, 딸과 손자를 돌보았던 어머니 박경리. 글을 쓰면서도 밭을 가꾸며 자연을 사랑하고 보살폈던 어머니 박경리. 그녀의 딸은 자신의 어머니 박경리를 그렇게 그리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님은 책 <토지>를 쓰며 자신이 남은 생을 어디선가 보았던 이 할머니처럼 살고 싶었으리란 마음먹은 것이 아닐까. 천지만물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며, 억새풀같이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바람이 아니었을까. 실제로도 그녀는 그렇게 살았으니, 그녀의 바람은 모두 이뤄진 듯 싶다.

  

 

 

- 연필과 지우개 -

 

 

 

 

 

제5부

1940년경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민족의 삶이 확대된 공간을 오가며 다양하게 펼쳐진다. 서희는 박 의사의 죽음, 양현과 영광의 슬픈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실과 오가다의 재회, 길상의 관음탱화 조성, 소목장이가 된 조병수와 아버지 조준구의 처절한 죽음, 후일담형태로 채워지는 평사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로 주요 인물간에 얽혔던 한이 한겹씩 풀어진다. 또한 해도사와 소지감 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모임, 이홍의 딸 상의의 일본인 학교생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우개동의 행패 등을 통해 일제말의 현실이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1945년 8월 15일, 양현은 강가에 나갔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이를 서희에게 전한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189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달려온 <토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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