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3 - 4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3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들은 도돌이표 안에 있는 음표처럼 되풀이 되는 운명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열심히 유행을 쫓아가지만 결국은 돌고 도는 유행처럼, 더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지만 운명은 이들을 놓아주지 않고 세대에 걸쳐 되풀이 되고 있었다.

 

아버지 용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무나 잘 아는 홍이. 그렇기 때문에 홍이 만큼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줄 알았다. 가문 좋고 성격 좋고 생각이 깊은 아내를 얻어 잘 살고 있는 홍이었기에 더 그랬다. 물론 홍이가 결혼 전과 결혼 초에 장이와 벌린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그 상황 때문에 생겨났다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운명과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평생 동안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아파하다 간 용이. 홍이에게도 그 운명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한 여자와의 사이에 서게 된 홍이. 그는 과연 이 운명을 어떻게 풀 것일까.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졌다.

 

 

‘아이들은 이 재물을 원치 않는다. 무거운 짐짝같이 생각한다. 아암 그래야겠지. 부잣집 난봉꾼, 병신이 되어도 아니 될 게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으며 서희는 서글픈 미소를 띤다. 얻고 잃는 것이 모두 꿈같이, 짧은 생애의 덧없는 일이라면 놓아도 좋으련만, 놓은들 잡은들 마찬가진 것을, 기왕의 지난날 치열하였던 불길은 그렇다 치고 지금 가슴을 짓누르는 마음의 맷돌은 들어내고 허 한 대로 고통에서 놓여남직도 하건만 뜻대로 아니 되니 인성의 본질인가 하고 서희는 한숨을 내쉰다.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홍이 뿐만이 아니었다. 최참판댁의 서희 역시 자신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할머니 윤씨부인처럼 최참판의 여인으로 가문을 지키고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 별당아씨처럼 집안의 하인으로 있던 이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당차지만 외로운 여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이 있고, 아들들이 있다는 것이지만, 그녀의 아들들은 남편 길상처럼 나랏일을 위해 뛰고 싶어 할 뿐 가문이나 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더 외로운 서희. 서희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하동 마을에서 일어난 악연에 의한 기묘한 살인 역시 도돌이표를 따라 돌아온 음표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최치수의 살인을 연상하게 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흔치 않은 일이었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시대가 그러했고 상황이 그러했다고는 하지만, 하동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일은 과거를 곱씹게 하고 또 미래를 두렵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면 회피 안 하는 거냐? 일본 가서 막노동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고 이론으로 밤을 지새고 그러면 너는 이 집에서 내가 해방될 거라 생각하나?”

“나는 이 큰 덩어리 같은 게 싫습니다. 죄악이니까요.”

 

“그래 너의 고민을 이해한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까. 너도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작품 하나쯤은 읽었을 게다. 러시아 대귀족 톨스토이, 나는 그가 쓴 책은 대체로 다 읽은 편인데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무엇을 얻으려고 했어요?”

 

“개인과 인생과 사회, 인류문제. 나는 서적을 통해서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넓은 방안을 수없이 왔다갔다하는 톨스토이를 보았을 뿐이다.”

“잘 모르겠어요.”

 

“시초에 그는 재산과 명문을 소유한 문단의 총아였다. 다음은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하여 명문과 재산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던 것, 명문과 재산 이외 또 하나 있었지. 종교였다. 그 세 가지가 다 미결인 채 그는 세계 구제를 생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무저항주의를 만들었다. 그가 그의 소유물 모두를 버린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었지. 그러나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자신을 해방하지 못했다. 또 있어, 일본의 아리사마 다케오, 역시 작가지. 그 사람도 톨스토이와 엇비슷한 점이 있는데 톨스토이만큼 몸짓이 크지는 않았다. 그도 사유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재산을 포기하는 문제보다 인간의 본질과의 싸움, 그것이 아닐까? 두 사람은 다 패배자였으니까. 버린다는 것도 그것도 무서운 집착인 것 같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물론 어떤 면에서는 위대하게 살다 갔다 할 수도 있지만, 소유물을 버린다. 가장 철저하게 버린다, 그것은 출가 이외는 없을 것 같다. 군더더기가, 소유라는 망령은 버렸어도 따라올 테니까, 사찰이 아니면 막아낼 도리가 없지.”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큰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한 책 <토지>. 대하소설이라는 말 그대로 21권에 달하는 장편이었다. 그중 이제야 13권을 읽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대단함을 느끼게 된다. 책에 나타나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정리된 생각.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 장편의 소설을 쓴 것도 대단하지만, 그러기 위해 작가가 읽었을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조금이라도 가늠하게 되는 구절이었다. 짧기만 한 나의 독서량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멍텅구리 같은 놈들, 제 나라 지킬 능력이 있었으면 시초에 합병 같은 것 없었을 거 아닌가. 지금에 와서 왕왕거려도 소용없어. 현실을 직시해라, 현실이 소리로 해결이 되나? 소리란 힘이 아니야. 약자들은 항상 울지. 갓난아기도 항상 울어. 능력 없기 때문이다. 해서 젖을 안 주면 죽는다. 너희들은 학문을 했으니 알게다. 대영제국이 인도를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백인이 유색인종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또 중국에서는 백인식당에 중국인과 개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공공연하게 나붙어 있다고 했다. 역사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 바로 그 자체다. 이집트, 로마, 그리스 그들은 모두 정벌한 타민족을 노예로 삼았다. 노예들은 일생을 지배자 채찍 밑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희들도 이미 아는 얘기다. 그러면, 대일본제국이 너희들 조선인을 개 취급했더냐? 노예로서 몽둥이질하며 사역하였더냐? 내 앞에 앉아 있는 너희들은 누구냐. 노예나? 개냐? 분명 개도 노예도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당당한 학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들이 학생이라는 것은 대일본제국의 은총이다. 옛날에는 서당이 고작이요 그것도 양반의 자식 몇몇이 꿇어앉아서 고리타분한 글자 좀 배우는 정도, 그러나 지금은 신분의 구별 없이 많은 청소년들을 균등하게 새로운 학문의 혜택을 받고 있다. 자아 보아라! 이 유치장을 비춰주는 전등을. 등잔을 켜고 살던 너희들의 생활은 전등으로 바뀌어졌다. 거리에는 자동차, 기차가 달리고 초가집이 있던 자리엔 이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진주는 지방 도시다. 서울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고, 부산보다 작은 도시다.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문명은 빠짐없이 들어왔다. 방안에 요강을 들여놓고 긴 담뱃대 물고서 팔자걸음으로 길을 걷는 너희들 조선인은 도시 위행 관념이 없고 게으르다. 그 같은 민족성과 문명에 동떨어진 미개한 상태에서 언제? 백 년이 걸려도 안 될 발전을 우리 대일본제국이 실현시킨 것이다. 내 말이 틀렸느냐?”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일인다역을 하게 되는 작가.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의 생각을 조리 있고 분명하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다 왠지 억울한 마음에 ‘하지만.. 하지만...’ 이라고는 외쳤지만, 그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 지 몰랐다. 순발력이 약하고, 생각을 잘 정리해놓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역사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왔다는 말에 달리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우리 조국이 조금만 더 발 빠르게 세계 정세를 따라 움직였다면, 조금만 더 힘이 세었더라면 우리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고 지배를 받지 않았을 테니까. 역사 속에서 우리의 억울한 역사는 하나의 단편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억울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었을 뿐이니까. 일본이 잔인하고, 냉혹했지만 역사라는 틀 안에서 그들은 자유로웠다. 우리만 억울한 뿐이지.

 

 

“나 이런 말 하고 싶었습니다. 장 서방도 반대편에 서서 왜 너는 더 가졌느냐 더 가졌느냐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요. 배가 고파서 우는 사람 헐벗고 추워서 우는 사람 천대받고 우는 사람, 내 얘기는 그런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둘러메고 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 그것이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 힘이 약자를 누르고 소외하는 방향이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내 처지에서 내 처지의 말을 한다 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어릴 때 일을 기억하는데 외톨박이 아이 하나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누어 주었지요. 그랬더니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이는 외톨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과자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는 다시 외톨이가 됐어요. 얻어먹는 아이들은 항상 명령에 복종했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아이, 외톨이는 언제 없어지지요? 정말 역사가 그렇게만 되풀이되는 거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연학은 말없이 따라 걷는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적개심, 분노, 슬픔, 그것이 순수하면 힘이지요. 순수한 힘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우월감을 쳐부수는 것이지요. 우월감을 쳐부수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는 우월감에 젖어 있다면 이편에 서든 저편에 서든, 친구가 되든 원수가 되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과연 역사는 강자와 약자의 논리 속에서 되풀이되는 것일까. 하물며 외교나 정치를 모르는 아이도 사탕과 과자를 가지고 강자의 지배 논리를 펼치는데, 덩치 크고 머리 굵은 나라야 말해 무엇 할까.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본인의 의상이나 색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다니?”

 

“갑충, 딱정벌레를 연상하지 않습니까?”

“.......?”

 

“반대로 일본여자하고 결혼해서 그들 속에 묻혀 살아온 처지인 만큼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제 눈이 맹목적일 수만은 없을 겁니다. 그래 조선의 의상과 색채를 생각해 보았지요.”

“그게 뭐냐.”

 

“나비, 학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렇지는 않소? 조학사.”

 

밥알을 씹으며 명빈이 말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일본의 옷이나 색채는 상당히 그로테스크 합니다. 특히 색채는 불투명하고 부피를 느끼지요. 감색, 검정, 갈색, 붉은빛 그런 것이 주조인데 기타 빛깔도 순수한 색채는 없지요. 옷 형태에 있어서도 율동이 없습니다. 그들의 옷의 선은 거의 고정돼 있지요. 겨우 좀 흔들리는 소매는 흔들려는 거지 율동은 아니거든요. 그들의 앞머리는 밀어붙여 뒷머리만 모아서 뒷꼭지 쪽에 마개(상투)를 만드는데 맨들맨들한 앞머리는 불모의 산 같이 역시 고정돼 있는 느낌입니다. 사실 그 칙칙한 빛깔에, 고정된 선의 옷에는 모자나 갓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며 머리를 밀어서 맹숭맹숭한 공간을 남기지 않는다면 칙칙하고 고정된 선의 옷은 참으로 뭔가 눌리어 감당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여자의 경우 탁하기는 하지만 색채는 있었으니까, 목이 부러질 만큼 느껴지는 큰 마개에는 주렁주렁 꽃이며 빗이며 천이며 그런 것을 달아야 했고 기혼자는 눈썹을 밀어버려야 했습니다. 또 있지요. 이빨을 검게 염색하는 것 말입니다. 한마디로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하지요. 조선의 의상과 빛깔을 생각해봅시다. 구십 프로 이상은 흰색이며 나머지 색채도 거의 중간색이란 없어요. 모두 원색이며 투명하지요. 그리고 옷의 형태로는 율동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선도 밀착되지 않은 직선에는 풍부한 율동을 허용하고 밀착할밖에 없는 곳은 곡선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갓, 갓이야말로 아마 세계적 명작이 아닐까요? 그러면 갑충 혹은 딱정벌레, 학 또는 나비의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건물의 형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일본의 성은 석축을 높이 쌓아 올려 그 위에다 앉히거든요. 사원 같은 것도 지붕에서 약간의 곡선을 볼 수 있는데 대단히 둔중한 느낌이며 일반건물에 있어서 지붕의 구배는 모두 직선입니다. 촌락의 농가의 갈대지붕도 역시 구배는 모두 직선입니다. 여백이 없는 건축물, 여백이란 무슨 뜻인고 하니 뜰이 없다는 것입니다. 서민주택은 대개 뜰이 없습니다. 뜰이 있는 주택들도 뜰이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건축 구조에 있어서 현관이란 것 때문이지요. 현관이 뜰을 차단해버리거든요. 일본에서 분재가 성행하는 까닭을 그들 건축에서 찾아보는 것도 과히 먼 얘기는 아닐 듯싶고.”

 

밥을 먹는다. 국도 먹고 반찬도 먹는다. 삼키면서

 

“조선의 건축, 지붕의 경우를 보면 하늘을 향하여 치올라간 처마나 용의 허리 같은 용마름, 그 곡선은 참으로 완벽하게 공간에 존재하지요. 시골의 초가는 반대로 굽습니다. 땅을 향해 오무려져 있지요. 기와집 지붕에서 비상하려는 새를 혹은 비룡을 연상한다면 초가는 땅에 뿌리를 박은 식물을 연상하게 되지요. 그리고 궁이건 성이건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싸여 있다는 조선의 것과 달리 의복이나 반자연적인 요소가 짙은 것이 일본입니다. 다음에는 여백에 관한 건데 울타리가 없고 사립문이 없는 농가는 결국 집 밖의 땅이 여백이 된다 할 수 있고, 일본의 현관과 같은 성질을 띤 대문 사립문이 건물과 뜰을 포용하고 있지 않은 경우는 없어요. 상가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하한 형태로든 거기는 건물과 뜰이 공존하고 있지요. 성을 보더라도 적을 막는 것은 성벽이지, 즉 울타리지 건물 자체는 아닙니다. 석축에서 바로 이어진 성과 성벽 안에 있는 성 그 차이점에서도 우리는 여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예를 들어 비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피조물, 사람 손에 의한 피조물엔 생명감이 넘쳐 있고 생명체를 보다 많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이 완벽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 즉 생명이 있다는 애깁니다. 청자나 백자 특히 백자 항아리는 빛깔과 선의 융합에서 생동하기도 하고 정밀을 느끼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 그것을 자로 재어보고 가루를 내어 분석하고 해보았자, 사람을 놓고 해부해보아도 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결론과 마찬가지, 결국 생명은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창조의 능력은 조물주에 접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보아야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리얼리스트라 했습니다. 리얼리스트이면서 신비주의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상이나 낭만이 흐려놓은 상태, 달콤하게 안주하거나 안개에 몸을 실은 그런 상태에서 의지를 볼 수 없지요. 접근의 의지 말입니다. 동화의 의지라 할 수도 있고 흔히들 도피 사상이다 하기도 하지만 자연과의 동화를 두고 말입니다. 자연만큼 위대한 피조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즉 생명 말이지요. 함에도 불구하고 무위자연설의 도교가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불교 유교가 성행한 이 땅이었고, 애매모호한 신선의 세계 대신 수로부인에게 바치는 노인의 헌화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정신세계를 보게 되는 거지요. 나는 신을 칭송하는 여하한 노래 속에서도 헌화가만큼 무궁한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헌화가를 높이로 하여 몸서리쳐지는 더러운 것에의 감각 그것은 우리 언어, 그러니까 속담이나 비유에서 보는 그 징그러운 감각, 높이와 낮음의 그 사이의 큰 진폭에서도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의 차이점을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참으로 명쾌한 비유였다. 일본은 갑충, 딱정벌레고, 우리나라는 나비, 학이다. 같은 동양권이고 그저 바다를 하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일본과 우리는 참 많이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오묘함 때문에 서로에게 더 끌리기도 하고, 서로를 더 미워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떠올릴 때마다 일본의 문화를 접할 때마다 나는 이 비유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의 객관적인 눈, 그 말을 앞서 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강국인 일본, 그 연유가 어디 있든지 약소국인 조선, 현재는 국가 자체도 없어졌습니다만 그 요인을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약한 현상문제도 말입니다. 진실한 뜻에서와 강자와 약자 문제도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형님과 나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물론 나는 애국자가 아닙니다. 또 애국자가 아니어야 할 수 있는 얘기, 진실에 혹은 사실에 접근할 수 있고 공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복잡하면 쳐내고 단순하면 덧붙인다는, ... 바꾸어서 말하자면 결핍과 잉여상태, 저는 얘기의 결론을 지어야겠습니다. 결핍이 오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잉여상태로 하여 조선은 망했다.”

 

“허 참, 조선이 잉여상태? 야 그만두어라. 미친놈 취급당할 게야.”

“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물질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은 더욱더 강국이 될 거란 말입니다. 계속하여 뭉쳐질 거란 말이지요. 개개인의 결핍은 전체를 풍요하게 하고 개개인의 풍요는 전체를 결핍으로 몰아넣고.”

 

“결론이냐?”

“아닙니다. 강약의 척도를 양면에서 상반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또 강약의 형태가 물결같이 오고 사라진다는 것, 물질의 시대와 정신의 시대가 명멸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일본처럼 잘 아는 이들이 또 있을까 싶다. 나라를 위해 자기 한 목숨은 쉬이 버리는 이들. 자결을 거룩하게 여기는 이들. 혼자는 약하지만 나라는 강한 이들. 뭉치는 힘이 강한 일본이기에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거라는 예언은 들어맞았다. 물론 소설 속에서 만의 예언이기는 했지만.

 

“자랄 때부터 성질이 유별나기는 했지만, 제발 너도 그 성질 좀 죽여라. 세상이 개명되고 남자 못잖게 됐으니 망정이지 사대부 집에서 여자가 처신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너 알기나 해? 속이 언짢아도 원만하게, 상대를 칠적에도 언성을 높이면 아니 되고, 아랫것들만 하더라도 낮은 소리가 더 무서운 게야. 처지가 같아야지. 모두들 내려다보고 사는데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면 그만큼 한 팔 내주는 꼴이 되는 게야.”

 

“조용하게, 조용하게 물어뜯어라 그 말이죠?”

 

성숙은 낄낄 웃는다.

 

“아니지. 조용히 숨통을 막아버리는 거야. 호호호홋... 호호홋... 해서 날 보고 뭐래는 줄 아니? 김 안 나는 물이 뜨겁다.”

자매는 소리를 합하여 웃는다.

 

- <토지 4부 1권> 중에서 -

 

 

왠지 모르게 동감이 가서 인상이 깊은 구절이었다. 크게 성을 내는 것보다 소리 없이 내는 성이 더 힘이 있는 법이다는 것. 크게 성을 내는 것은 잠시 그때만 기분을 푸는 것이지만, 소리 없는 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더 효과적이다는 말이 왜 이리 귀에 들어오던지. 앞으로 아이를 키우려면 아마도 이 소리 없는 성을 내는 법을 익혀야 할 터인데 싶어 더 가슴에 와닿는 듯 하다.

이번 책에서는 그냥 읽고만 넘기기에는 아쉬운 구절들이 많다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옮겨놓게 되었다. 책을 통해 떠나보는 과거로의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 연필과 지우개 -

 

 

 

 

 

제4부

1929년의 원산 노동자 파업에서부터 만주사변, 남경대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주로 지식인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농촌붕괴와 도시유랑민들의 증가 등 1930년대 일제의 폭압과 혼란상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 사상, 민족성 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전편을 통해 폭넓게 제시된다. 서희의 아들 환국과 윤국의 성장, 길상의 출옥, 군자금 강탈사건 이후 만주로 도피하는 송관수의 갈등, 명희의 이혼과 새로운 삶, 유인실과 일본인 오가다의 사랑, 그리고 인실의 도피와 변신, 색소폰주자로 떠도는 송관수의 아들 영광의 모습 등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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