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부엌 -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류지현 지음 / 낮은산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처음 읽는 책의 부제와 저자의 프로젝트에서 왠지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철학자 강신주의 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전에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라는 제목의 한 칼럼을 게재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문언과 달리 깊이 헤아릴만한 속뜻을 품고 있다고 보기에는 그의 주장과 표현은 지극히 직접적이고 단정적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냉장고를 없애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을까.


    토마토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되는 대표적인 채소이다. 냉장고에 있는 동안 토마토는 영양소가 파괴되고 그 맛도 잃는다. 또한 토마토는 단단한 겉껍질이 없는 까닭에 되도록 서로 닿지 않게 보관하는 게 좋다. 토마토에서 나오는 에틸렌 가스가 잘 빠져나가도록 해 준다면 좀 더 오랫동안 맛있게 보관할 수 있다. (p86)

    에틸렌 가스는 일반적으로 채소나 과일의 성장을 촉진하는 물질이다. 키위나 아보카도가 덜 익어 딱딱할 때 종이봉투 안에 사과 하나와 함께 넣고 잘 봉해 좋으면 빠르면 하룻밤 혹은 며칠 만에 부드럽게 익은 과일을 먹을 수 있다. 반면에 특이하게도 감자는 통풍이 잘 되는 공간에서 에틸렌 가스에 적당히 노출되면 노화가 지연된다. 물론 감자를 보관할 때 에틸렌 가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빛이 차단되고 통풍이 잘 되는 주머니에 감자와 사과를 담아 부엌의 그늘진 곳에 두고 쓰면 추워서 퍽퍽하게 변해 버린 감자는 먹지 않을 수 있다. 아예 싱크대 서랍 한 칸을 감자와 사과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p328-330)

    감자, 생강, 당근 등 뿌리채소는 모래에서 보관할 수 있다. 유럽의 옛 농가에서는 작물을 보관하기 위해 모래를 이용해왔다고 하는데, 모래 속에서 수분 유지가 적절히 되어 무르지도 마르지도 않으며 편히 지낼 수 있다. (p331-334)

    식탁 위에는 초록색 호박, 보랏빛 가지,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 등을 알록달록 예쁘게 담아 꽃에 뿌리듯 분무기로 물을 뿌려 주거나 물이 담긴 그릇 위에 망을 포개 놓고 올려놓는 방법도 있다. 수분 함량이 높은 채소들이라 수분을 지켜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p335)

    한쪽 용기에 버터를 채우고 조금 더 큰 다른 용기에 뒤집어 넣는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 물을 채우면 물이 버터와 산소의 접촉을 차단해 산화를 방지한다. 사나흘에 한 번씩 깨끗한 찬물로 갈아주면 한 달 쯤은 원할 때마다 부드러운 버터를 먹을 수 있다. (p341)

 

 

 

바나나는 상온에서 보관하며 서늘한 곳에 매달아 놓으면 좋다는 것쯤은 이젠 보편화된 상식이다. 이와 같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냉장고를 없애자'와 같은 반문명적인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인 식재료의 본성을 이해하며 각각의 식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맞는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열면 식재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멈추어 있는 우리의 앎과 관심을 일으켜, 각각의 식재료마다 성격이 다르고 보관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보고 또 냉장고 중심으로 형성된 부엌의 리듬을 식재료의 특성과 가족의 식습관을 고려한 자신만의 리듬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세계민속자료로서의 가치와 가능성도 담고 있다. 아직은 한정된 지역에 그치고 있으나, 저자가 직접 세계 각지를 탐방하고 그 지역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라져가는 삶의 지혜, 식재료 관리법과 보관방법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지어진 파리 아파트에는 부엌 창문 아래로 '가르드 망제(garde manger)'라는 찬장이 함께 설계되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간단한 식재료를 보관하던 이 공간은 보통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통풍이 잘 되도록 공기구멍도 넉넉했다. 외부와 내부 공기의 온도 차에 의해 더 차가운 공기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원리이다. (p34-36)

    이탈리아 토리노 사람들은 눈을 모아 식재료를 보관하곤 했다. 길과 같은 높이로 나 있는 창 아래로 떨어뜨린 눈을 잘 쌓아 두면 얼음처럼 단단해진다. 이 얼음이 날씨가 더워질 그때 지하 저장고 온도를 낮춰주는 데 한몫을 한다.​ (p37-44)

    일본 니가타 현의 눈 저장고들은 보통 강과 산비탈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졌다. 경사진 면이 있어 눈을 쉽게 모을 수 있고 녹은 눈은 자연스레 강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강을 통해 얼음을 간편하게 운송할 수 있었다.​ (p45-47)

    인도에서 지금도 물병으로 사용하는 테라코타(terra cotta)는 유약 없이 낮은 온도로 구워 표면에 구멍이 많다. 바깥 공기가 따뜻할수록 표면을 통한 물의 증발이 잘 일어나 단지 안 온도가 더 많이 떨어진다.​ (p-48-50)

    퐁텐블로와 센 강 사이의 작은 마을 토메리 마을은 식탁용 포도로 유명하다. 농부들의 창고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줄을 맞춰 빼곡히 차 있고 각각의 물이 담긴 유리병에는 포도 한 송이씩 담겨 있다. 꽃병에 꽃을 꽂듯이 유리병에 포도송이를 꽂아 관상용으로도 좋고 냉장고에 보관할 때와 달리 단맛을 유지할 수 있다. 농부들은 마지막으로 유리병 물속에 숯 한 조각을 꼭 넣는다고 한다. (p109-110)

    남미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아만타니 섬에서는 감자를 냉장고 없이​ 2,3년간 거뜬히 보관한다. 감자들을 얼음이 얼 정도의 차가운 냇물에 넣어 두고 하룻밤을 보내면 감자가 언다. 언 감자를 살짝살짝 밟아주면 감자에 남은 물기가 빠지고, 다시 밟은 감자를 냇물에 넣고 얼리고 밟아주는 과정을 일주일 반복한다. 이렇게 가볍고 오래가는 감자, '툰타(tunta)'가 완성된다. (p152-153)

 

 

저자가 실행해오고 있는 프로젝트와 그 취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프로젝트는 사라져가는 음식 저장 지식에 디자인이라는 형태를 입히는 것으로 출발했다. 냉장고에 꼭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은 식재료들, 혹은 보관하면 안 되는 식재료들을 알리고, 그 식재료를 보관하는 방법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에게 배워서 알리고자 한 것이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메세지의 방향성은 좀 더 분명하게 정하는게 좋지 않을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젓갈들은 다양한 기술로 과거의 그 맛을 되살렸을지도 모른다. (중략) 엄마와 젓갈 아주머니가 나누던 수다와 정은 결코 담아낼 수 없다."와 같은 표현이 많아진다면 자칫 본래 의도를 왜곡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지역에서의 사라질 위험에 놓인 식문화를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기며, 현실적인 감각에 맞는 디자인을 선보인다면 이 책의 가치는 한층 뚜렷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또한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환경문제를 개선하고 미래의 지속 가능한 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저자의 프로젝트는 TED Talk에 초대 받았으며,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발렌틴 투른의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Taste the Waste, 2011>에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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