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 가장 쉬운 깨어남의 길
레너드 제이콥슨 지음, 김상환.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레너드 제이콥슨은 에크하르트 톨레와 더불어 서양 영성계에서 오래 전부터 '지금'을 강조한 원조격인데, 톨레와는 성향이 좀 달라 보인다. 톨레가 '지금'에 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탁월하다면, 제이콥슨은 독자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실제 현존하도록 안내하는 데 더욱 주안점을 두는 것 같다.  

톨레의 책을 읽은 독자들 가운데는 "그래,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해소하는 데 몇몇 분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제이콥슨이 그러했다. 그가 얘기해주는 현존의 원리와 방법은 그런 의문을 명쾌하게 잠재웠다.   

몽지님의 리뷰를 읽었다. 선(禪)을 공부하는 분들 가운데, 거칠게 표현하자면, "선이 최고이며 정답이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을 간혹 만나는데, 이 리뷰도 그런 태도나 입장에서 그다지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몇 마디 적어보려 한다.

1. 

만약 리뷰어처럼 둘째 방식의 스승을 비판한다면, 석가모니도 여기에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석가모니는 꽃만 들어올린 게 아니고, 이 세상과 저 세상, 차안과 피안도 이야기한다. 그 잣대에 따르면, 석가모니도 둘로 나눈 것이 아닌가? 숫타니파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우파시바여, 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무소유에 의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높은 상념의 해탈에 도달한 사람. 그는 물러남 없이 거기에 편안히 머무르리라." 이 말이 리뷰어가 예시한 두 번째 방식의 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선가(禪家)에서도 "망상이다" "망상에 빠지지 말라"고 말한다. 만약 누구도 망상에 빠진 적이 없고, 빠져 있지 않고, 빠지지도 않는다면, 선가의 가르침이나 공부 또한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선가에서도 가르치고 배우고 공부하며, 왜 보림을 얘기하고 '습'을 강조하는가? "환영에 불과한 망상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혹은 망상에 빠지는 습관에서 벗어나, 둘 아닌 자리에 자리 잡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든 다른 무엇을 공부하는 사람이든 여기에 예외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리의 관점>과 <경험적인 면>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망상이란 없는 것이고, 중생도 없으며,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없다. 하지만 경험적인 면에서 보면, 마음은 망상도 경험하고, 중생처럼 미혹되며, 생각속에 빠졌다가 나왔다가 한다. 경험적인 면을 고려하여 편의상 얘기하는 말에 대해 진리의 관점을 갖다대어 판단한다면, 당연히 온통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러면 석가모니조차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

리뷰어의 질문을 바꿔, “진리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해보자. 선에서는 예컨대 “바로 그것”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할 수 있다. 레너드 제이콥슨은 예컨대 “현존(Presence)”이라고 답할 수 있다. 뭐라고 표현하건, 어떤 식으로 가리키건, 둘이 그렇게 많이 다를까? 서로 다른 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리뷰어는 제이콥슨도 첫째 방식의 스승처럼 "바로 그것" "뜰 앞의 잣나무"만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석가모니도, 예수도, 노자도 그래야 한다고?  

3. 

리뷰어는 지은이가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누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새끼줄과 뱀의 비유에 비춰 보면, 리뷰어는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즉 (새끼줄이 실상 혹은 진실이며,) 뱀은 '환영'이고 '착각'이며 '실제로는 없는 것'이라는 사람에게, "당신은 뱀을 실재로 보고 있소"라고 우기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줄곧 뱀을 환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지은이가 벽돌과 거울로 나눠놓고 벽돌을 갈아 거울로 만들라고 한다면, 중생과 부처를 나눠놓고 중생을 부처로 만들라고 한다면 리뷰어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런데 지은이가 과연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리뷰어는 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4. 

리뷰어는 "이것은 마치 철길의 선로와 같이 영원히 평행할 뿐 하나로 만나지는 못한다. 저 지평선 끝에서 하나로 만날 것 같은 희망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여행일 뿐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은이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미래에는 깨달을 것이라는 생각을 믿고서 미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 그렇다고, 그러니 미래의 깨달음을 추구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라고 누누히 강조한다.     

5.  

리뷰어는 심리치유에 대해 지적하면서, "심리치유기법을 이용해 진리로 이끌고 있다"며 "그런 대증요법만으로는 근원적인 인간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리로 이끄는 지은이의 방식은 심리치유이며, 심리치유"만"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을 텐데,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주장은 마치 환자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수술, 투약, 식이요법과 보약, 운동 등을 병용하는 의사에게 "당신은 수술만으로 낫게 하려 하고 있소"라고 비판하는 격이다.           

지은이는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로 깨어나면 여기에는 어떤 과거도 상처도 없다. 그러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애쓰는 대신에 지금 여기로 깨어나는 편이 현명하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현존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억눌린 상처받은 감정들이 현존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런 감정들이 경험되어 놓여나도록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더 쉽게 현존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과정에서 현존에 대한 저항도 누그러지거나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심리치유만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전생의 기억과 감정의 경우도 이런 맥락이다. 최면이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유도하지 않고, 현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과 연관된 감정들에 대해 위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 뿐이다. 하긴, 전생이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더 할 말은 없다. 나 역시 전생에는 관심이 없지만 말이다.

6. 

라마나 마하리쉬와 파파지 사이의 일화로 이야기를 끝맺고 싶다. 파파지(푼자)가 라마나 마하리쉬를 통해 깨달은 뒤 얼마 후의 일이다. 라마나가 어떤 방문객과 대화하다가 그에게 "안으로,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파파지가 "안도 없고 밖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라마나는 파파지를 보며 "바깥만을 보는 사람에게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만 놓고 보면, 진리의 관점에 더 충실한 사람은 파파지다. 파파지는 둘이 아닌 입장에서 말하고 있고, 라마나는 안과 밖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파파지가 라마나보다 더 좋은 스승이고, 더 수준 높은 스승이고, 그의 방식이 라마나의 방식보다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라마나가 파파지보다 진리를 몰라서 혹은 수준이 낮아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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