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별의 시간이 당도했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죽고, 너는 산다.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오직 신만이 알 뿐이다.-소크라테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 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안녕." 
 
정이현 작가가 돌아왔다. 무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이전에 일본 작가 몇몇과 공지영 작가가 시도했던 방식과는 또 조금 다르게 사랑의 기초에 관한 이야기지만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정이현 작가는 이전에 "낭만적 사랑과 사회"라는 조금은 무거운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그런 철학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흔한 연애소설 같다가도 중간중간 턱 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만큼 이 이야기가 현실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나 드라마처럼 누구와 누구는 해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가 아닌
서로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만난 연인들이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열정을 불태우고, 마음이 식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실 좀 씁쓸하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아직 남아있는 내게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사랑에 관한 꿈도 꿀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책 속에서>
p.15
오늘 만나게 될 여자는 그보다 두 살 어리다고 했다.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그보다 두 살 어린 미혼 여성은 몇 명이나 될까.
수십만에 이를 터였다. 수십만의 여자 중에서 무작위로 고른 한명이라니, 세상에. 그 단 한 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를 기대하다니!
 
"인생을 뒤바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p.43
가해와 피해의 구분과 범위가 애매모호할 경우에 늘 그렇듯이, 결국 누가 먼저 피해자 역할을 선점하는지가 승패의 관건이었다.
그들은 공평하게 번갈아가며 기꺼이 피해자의 자리를 차지했다 -민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이
 
p.55
'쟤는 차별대우 받잖아'라는 문장은, 사회의 평등지수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시대의 아이들을 예민하게 자극한다.
 
p.82
의미있는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서슴없이 집착증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건,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조차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p.114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159
연애의 종착역이 결혼이어야 할까? 준호에게 연애란 비현실적인 어떤 것, 구차한 현실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자신이 결혼생활의 한 축을 떠받치는 가장이 되리라는 사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리라는 사실은 아주 막연하기만 할 뿐이었다.
 
p.173
그 밤, 민아는 오래 울었다. 울먹이면서 어떤 공식 문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기록에 대하여 생각했다. 남은 생 동안 그녀 역시 여러 이별들 앞에 놓일 것이고,
맞서거나 순응하거나 속죄할 것이고, 그 순간들 사이에서 움직이며 살아갈 것이다. 단단한 바위틈을 뚫고 샘물이 고이듯 비밀스러운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p.201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 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비극적 파국에 이르렀다는 뜻도 아니다.
이곳은 보기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계였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 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이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p.207
그들이 무언으로 동의한 부분은, 더 오래 같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데는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한 때 뜨거웠던 열정이 느린 속도로 사그라져 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고장난 조종간을 끝까지 지킨 기장과 부기장처럼 서로에게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p.209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 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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