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한나 아렌트와 정치의 발견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 2002)는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유태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유작이다. 아렌트는 말년에 <정신의 삶> 3부작으로 <사유>(1권)와 <의지>(2권)에 이어서 3권 <판단>을 집필하고자 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칸트 정치철학 강의>(이하 <강의>)는 1970년 가을에 뉴스쿨에서 행한 강의를 제자인 로널드 베이너가 편집/해설을 맡아서 1982년에 출간한 것인데, 그의 <판단>의 윤곽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칸트가 체계적인 정치철학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이 과연 '활동적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냐, '관조적 삶'에 속하는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지만, 나로선 칸트 정치철학을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재구성해내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의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렌트의 유작을 읽는다는 것은 좀 무리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통해서 판단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감하지 않고서는 이 '강의'에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들이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와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이다. 전자는 아렌트의 정치사상의 한 부분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8쪽)이고, 후자는 아렌트의 사적인 삶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전기이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다룬 책으로 김비환의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한길사, 2001)도 있지만 좀 부담스런 분량이고, 아렌트의 전기로는 영-브륄(Young-Bruehl)의 것이 더 자세하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렌트에 대한 무게있는 연구서로는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가 있다. 아렌트의 저작으로는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과 함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 <폭력의 세기>(이후, 1999)가 번역돼 있다(80년대에 번역된 <공화국의 위기>와 <혁명에 대하여>는 절판됐다). 물론 그녀의 출세작인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과거와 미래 사이>(1961), <정신의 삶>(1971) 등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viva activa)을 노동(labor)과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로 나누는데 거기서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 흔히 번역돼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이란 말은 '정치적 동물'이란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 말을 사회적 동물(animal sosalis)로 처음 번역한 이는 세네카이다. 그리고 이어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즉 사회적이다"라고 말한다.(<인간의 조건>, 74쪽) 하지만, '정치적=사회적'이란 동일시가 오역만은 아닌데,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 중세 봉건 사회간의 본질적인 차이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중세에는 영지 내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구조와 직결돼 있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와 같은 사적인 것(사적 영역=경제적 생산관계)과 공적인 것(공적 영역=정치관계)의 구별이 중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렌트의 의도는 중세 이후로 사장된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중요한 행위능력인 정치적 행위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정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임(being animal)으로부터 구제되어 비로소 인간임(being human)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이란 말은 인간적이란 말과 동일시돼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경우, "저 인간은 정치적이야"란 말이 "저 인간은 참 인간적이야"란 말과 동일한 함축적 의미를 갖는가? 우리의 '정치인'이란 말은 과연 '(동물이 아닌)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란 뜻을 갖는가?(혹 우리는 정치인들은 소 닭 보듯 하지는 않는가?) 이렇듯 정치에 대한 혐오와 불신은 그만큼 우리가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being together)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권력이나 지배-예속 따위를 정치의 기본개념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은 모두 함께-삶(living together)이라는 원리/개념으로부터 도출되는 부수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정치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정치는 결코 수단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결코 다른 무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기에 정치적 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정치의 영역을 계속 보존하고 영속화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아렌트는 정치적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정치'철학'에 비판적이다). 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진리란 본성상 단수의 영역이며 따라서 대화나 타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acting together)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닮았다. "판단, 특히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강의>, 132쪽) 예컨대, 미군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인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복수적 인간이 갖는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이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전적으로 사적이고 소통불가능하게 보이는 나를-즐겁게-또는-불쾌하게-한다는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 감각에 뿌리내리고 있다."(<강의>, 139쪽)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는 일이다.(그리하여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이거나 여기저기서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와 경제가 확실히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정치의 전제로서 객관적 가난의 해결을 중요시했다. 진정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치는 '사회문제'로, 즉 궁핍한 사람들의 생존과 생계의 문제로 환원되며, 이것은 아렌트가 볼 때, 공적 자유라는 원래의 이상을 개인적 행복의 이상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는다(Z. 바우만, <자유>, 이후, 2002, 171쪽). 우리의 경우 4.19라는 자유의 공간, 정치의 공간이 왜 억압될 수밖에 없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최인훈의 어법을 빌면, 5.16군사 쿠데타 이후 우리는 민생문제 해결이란 명분으로 정치의 광장을 상실하고 오직 비대해진 밀실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 현대 정치사의 주류적 행태는 '둥근 사각형'이란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밀실정치'였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러한 객관적 가난 못지 않게 주관적 가난, 즉 상대적 박탈감인 듯싶다. 이 박탈감은 결코 소외계층만의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 영역으로서의 밀실이 공적 영역으로서의 광장을 대신할 수 없으며, 원래 사적(private)이란 말 자체가 공적 영역이 '박탈된'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적으로 사적인 생활만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들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인간의 조건>, 112쪽) 따라서 아무리 100평이 넘는 아파트에 바닥엔 대리석을 깔고 살아도, 풀장과 골프장까지 갖추고 살아도 그러한 사적인 삶은 진정한 삶과는 거리가 먼 박탈된 삶이고 결여된 삶이다. 그래서 현대 소비사회에서 정치의 적은 주관적 빈곤감과 이에 따른 공적 자유에 대한 관심의 쇠퇴(<자유>, 171쪽)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정당하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2.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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