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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가 본 한미FTA

레디앙에 실린 박노자와의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미FTA에 관한 것인데, 그밖에 다양한 관심사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나로선 북한 체제와 민노당에 대한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이미 우리시대의 논객이자 국외자적 지식인으로 자리잡았지만, 박노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인용하고 있는 바로 그 ‘non-Jewish Jew’(비유대적 유대인)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혹은 ‘non-Korean Korean’(한국인이 아닌 한국인). 그런 입지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요긴하며 필수적이다. 그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미FTA 관련인지라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 

레디앙(07. 04. 09) 한미FTA 정치사회적 겨울 온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박노자 교수는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지배층이 한미FTA를 추진하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한미FTA 협정이 체결되면 우리 사회는 미국식 모델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될 것이라면서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고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박 교수는 한미FTA의 효과로 소비자 잉여가 증대될 것이라는 논리에 대해 "소비자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라며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노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신랄했다. 그는 "(노 대통령같은)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는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분별하면서 자신과 노 대통령을 진보로 규정한 데 대해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수는 정규직 교수에 비해 능력 좋고 업적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고 꼬집었다(*이러한 '맡바닥' 사정은 조교수보나 박교수가 훨씬 잘 아는 듯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대선과 관련해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것이 뻔해 보인다"면서 "(민주노동당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문제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당이 젊은층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민주노동당은)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면서 "20대 여학생이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 지도부나 국회의원 후보 선출시 비정규직에 쿼터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심상정 의원이 제안한 비정규직 대상의 당원 가입 특례안에 대해서도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호응했다.

박 교수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레이스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면서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한미FTA 문제가 주제였지만, 한미FTA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른 이슈들로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한 박 교수의 분석은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박 교수는 북미관계와 관련,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라며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면서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분석에서 보듯 북한의 현 지배층에 대해 박 교수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러니 북한의 지배층을 추종하는 운동권 내의 일부 경향에 대해 박 교수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되는 바다. 그는 '탈북자' 문제와 관련,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면서 "주사파를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라고 맹비난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7일 낮 12시부터 성균관대학교 야외 휴게실에서 약 90분에 걸쳐 진행됐다. 인터뷰를 마치고 혜화역으로 가는 길에 보니 대학로에선 한미FTA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한미FTA 협상이 타결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 자세한 평가는 세부 내용을 봐야 가능할 것 같다. 정부는 개성공단 문제와 관련해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앞으로 대중국 정책 방향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 한미FTA 특위 열린우리당측 간사인 송영길 의원은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 설치 건을 놓고 "동북아에서 경쟁력 있는 통일경제의 꿈"을 말했다.

= 송영길 의원이 말하는 경쟁력이라는 건 60~70년대 한국식 성장모델의 재판이다. 한국 노동자 대신 북한 노동자를 저임금 착취 모델로 몰아내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섬유제품 등을 미국에 팔아 60~7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기적을 재현해 보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북한 정권이 한국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북한 지배집단의 동향을 보면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이렇게 되면 북한 노동자들은 한국 자본과 북한 지배집단이라는 대리인에 의해 이중착취 상태에 놓일 것이다. 북한 민중이 절대적 기아사태를 면하면 다행이지만 이중착취 구조에서 생활수준도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무권리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송영길 의원의 기대대로 된다고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송 의원의 기대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이 이란 침략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보류한다면 다시 한 번 동아시아로 눈을 돌려 잠재적 경쟁 상대인 중국을 약화시키는 집중적인 포위 프로젝트에 착수할 확률이 높고, 그 한 부분이 북한 때리기다. 북한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종속변수다. 중국의 대국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에 따라 미국의 북한 때리기는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

- 미국에겐 대중국 정책이 상수라는 얘긴데.

= 그렇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유전처럼 약탈할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미국에게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교두보다. 이는 열강정치에서 확인된 지 오래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1901년부터 협상을 했는데, 당시 러시아측 요구가 뭐였느냐면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였다. 한반도 북부지역을 일본 영향권과 대륙 영향권 사이의 완충지대로 파악한 것이다. 지금 중국이 북한을 보는 것도 당시 러시아의 시각과 같다. 당시 일본, 그리고 현 미국 세력의 영향권과 대륙 세력의 영향권의 충돌의 문제이지 북한 자체를 특별히 미워할 것도 없고 북한을 공격해서 얻을 것도 없다.

- 송영길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고 햇볕정책의 신봉자다.

= 햇볕정책이라는 것이 북한의 지배집단을 잘 포섭하자는 얘기 아닌가. 싸우자는 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을지 몰라도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위주 발상이다.

- 구여권에 있는 운동권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한미FTA와 남북관계 개선을 같은 궤에 놓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 지금 정부와 구여권이 팔아 먹을 수 있는 건 북한 문제밖에 없다. 복지정책은 내세울 게 없고, 부동산 값도 잡히지 않고 있다. 민생파괴와 농업파괴는 한미FTA로 이미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도시의 30~40대 화이트칼라, 농민, 노동자들에게 팔아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유일한 게 북한 문제다. 이들은 진보적 지지층에 먹힐 수 있는 북한문제와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한미FTA를 묶어서 강매하려는 것이다. 북한과 잘 되기를 원하면 한미FTA를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속아넘어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 그런 단기적 속셈 말고 통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상의 일단을 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 만의 하나 미국이 앞으로 10~15년간 중국을 대상으로 침략과 포위 전략을 쓰지 않을 경우 북한은 동북아에서 일본 이상의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북한은 이 지역에서 가장 취약한 국가다. 제일 약자다. 북한은 중국에게서 투자도 받고 원조도 받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되어 가고 있고, 이는 북한 지배층으로선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 남한까지 견제할 수 있는 카드는 미국이다. 북한은 미국이 허락만 한다면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허락한다면 북한의 자체 식민화가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 자본과 남한 자본, 장기적으로는 일본 자본에게 자기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어떻게 팔아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북한 지배층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 한반도 남쪽 진보진영은 어떤 각도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해야 하나.

= 한반도 진보진영에겐 나쁜 전통이 하나 있다. 외부에서 이상향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다.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의 파급 효과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러시아는 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30년대 이후로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됐다. 그런데 한국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스탈린주의 및 러시아 혁명의 왜곡과 반동화를 비판한 사람이 없다.

중국만 해도 진독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트로츠기(*트로츠키) 전통이 생건 건 90년대 초반이다. 소련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숭배 대상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낳았다. 그리고 수십년 후인 80년대 남한에서 그 비극이 재연됐다. 스탈린주의를 사회주의로 착각했고, 소련이나 동독을 희망으로 여겼다. 이것이 운동권 문화를 왜곡시켰고 운동권 붕괴의 원인이 됐다.

동구권이 붕괴된 후 이런 환상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남아 있는 북한을 대상으로 해서는 지난 20년대부터 있어왔던 이상향 찾기의 욕망이 계속 투사되고 있다. 이른바 주사파들 사이에 이런 경향이 강하게 존재한다. 운동권은 이를 완벽하게 버리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고 대중화될 수 없다. 남한 대중은 북한의 실체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운동권에서는 계속 비현실적인 환상들을 붙들고 있다. 이것이 운동권 전체가 대중화될 수 없는 이유다.

- 소위 좌파 진영도 이렇다 할만한 대북 접근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겠나.

= 최적의 방향은 북한 민중이 혁명적인 노선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적 혁명이 한반도 정치를 급진화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기대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최선의 방향을 얘기하기 어렵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기대를 거는 것이 민중 진영의 유일한 길이 아닌가 싶다. 이런 기대가 일정한 현실성이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민중의 계급적 각성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전국 조직이 없어 그렇지 적어도 지역적으로는 노동자의 저항이 강해지고 있다. 민중 저항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지난해 300만명이 넘었고, 저항의 방법도 급진화되고 있다.

중국 민중들이 중산계급과 지배계급의 개발연대에 대한 정치적 반대노선으로 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런 저항의 분위기가 맨 바닥에서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북한 민중이 그간 얼마나 속았으며 지배계급의 전략에 어떻게 놀아났는가 각성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각성에는 위험성도 따르는데, 남한 사회에 대한 미화로 빠져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천국이라는 인식이다. 탈북자들이 대개 극우적인 성향을 띠는 것도 이런 이유다. 북한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이 남한 지배체제에 대한 동경으로 잘못 흘러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남한 민중세력이, 남한 지배체제와 북한 지배체제를 동시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혹은 그런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북한 민중의 계급적 각성에 도움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남한 운동 진영이 탈북자를 철저히 외면한다. 탈북자를 매개로 북한 민중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 텐데도 그렇다.

남한 운동 진영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는 탈북자를 체제 부적응자나 심하면 배신자로 규정해서 왕따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대단한 손실이다. 인간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건 물론이고. 주사파들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점이다. 본인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데, 같은 민족인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서 무슨 놈의 민족주의인가. 이건 조선민족이 아니라 북조선이라는 국가를 위주로 놓고 생각하는 아주 악질적인 국가주의다.

- 어느 강연에선가 한미FTA를 '제2의 을사늑약', 이런 식으로 비유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청와대가 반대진영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는 논거 중 하나가 '어떻게 한미FTA를 을사늑약과 비교하느냐' 하는 것이다.

= 나는 물론 한미FTA가 을사늑약과 같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의 비유였을 뿐이다. 그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반대했다. 주요 각료는 찬성했지만 황제가 반대했다. 지배층 중에서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대한 반대가 있었던 셈이다. 자기 사유물처럼 국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니까 고종으로선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미FTA는 좀 다르다. 한국의 지배계급 전체가 한미FTA를 찬성할 뿐더러 끌고 가고 있다. 대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기업에 종속된 중소기업도 환영하고, 고소득 전문직종에 있는 사람들도 환영한다. 이들 엘리트들이 한미FTA를 환영하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공고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을 통합시킬 수 있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정책을 수립할만한 여지가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세부적인 혜택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나라에서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환영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미FTA 협정을 체결하면 부유세 같은 정책을 시행하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에 없는 정책을 한국에서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료보험도 자기 부담 위주로 가는 완성되지 못한 제도로 남거나 미국처럼 민간보험 위주로 퇴보할 수 있다.

미국이 하나의 모델이 되면 교육의 공공성도 흔들리기 쉽다. 아직까지 3불정책이 유지되고 있고, 평준화 정책을 탈피하고 싶어도 국민 불만을 생각해서 원칙을 지키고 있는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모든 학교가 귀족학교와 빈민학교로 나뉘는 시스템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 지배층의 새로운 유토피아다.

- 한미FTA를 찬성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적 사회정책의 역진불능성에 대한 기대에 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 한국이 참고할 수 있는 모델은 굳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많다. 일본 모델도 있고 서유럽 모델도 있다. 서유럽 모델 중에선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모델 등이 있는데,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위주가 된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북구식 복지국가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여론조사 해보면 상당히 높게 나온다. 그런데 한미FTA로 인해 이런 모델에 대한 모색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사회와 국가의 장기 보수화, 일종의 정치사회적 겨울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정부는 한미FTA 찬반 논쟁을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 '개방이냐, 쇄국이냐'는 구도는 허구적이다. 조선 말기의 경우 강화조약 이전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1%가 안됐다. 지금 한국의 무역의존도는 한미FTA를 하지 않더라도 80%에 달한다. 한미FTA는 쇄국의 반대어로서의 개방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시장과 미국 시장을 높은 수준으로 통합하는 문제이고,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가사회 발전모델을 미국식 모델에 종속시키는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를 들먹이고 진보적 슬로건을 하나의 어법으로 이용하면서 일부 민중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국가를 미국형 사회모델, 한 편에는 소수의 부유층과 고소득층과 중산층 상층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70~80%나 되는 빈곤층과 준빈곤층, 몰락 중인 하급중산층이 있는, 민중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사회모델로 몰아가고 있다.

- 한미FTA로 피해를 입게 될 70~80%의 민중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 협정을 찬성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다. 한국은 국가와 보수적 재벌과 미디어가 영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나라다. 보수신문의 한미FTA 보도를 보면 가히 대국민 선전선동, 대국민 홍보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에는 개발주의 신화가 강하다. 70년대 개발주의가 특정 시기에 일정 부분 성공한 면이 있고, 박정희 시대의 이런 성공 신화를 미디어들이 재생산하고 있다. 한미FTA에 대한 찬성 여론은 '박정희 신화처럼 해보자'는 분위기에 도움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개발은 외자와 차관, 무역 위주의 개발이었고 지금과 같은 시장통합적 개발은 아니었다. 박정희 개발주의가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시장통합을 하지 않고 미국 재벌로부터 한국시장을 보호한 데 있다. 이게 성공비결이라면 비결인데, 한미FTA는 이 부분을 무시하고 시장통합으로 가는 것이다.

- 불리한 여론지형을 극복하고 반대론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

= 아직 협상은 체결된 것이 아니다. 미국쪽 사정 때문에라도 협정 체결은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협정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계층과 지역이 존재한다. 반대 여론을 커지게 하자면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얘기해야 한다. 농민들이야 너무 분명하니까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만. 도시근로자들도 일부의 고소득 전문가층을 빼고는 장기적으로 혜택보다 피해가 많을 것으로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이 강하게 도입되면 우선 직장의 안정성부터 흔들릴 것이다. 한미FT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소비자잉여를 자주 얘기하는데, 소비자가 누군가. 바로 노동자다. 소비하려면 우선 벌어들여야 하는데, 직장의 안정성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그 효시로 보이는 것이 진행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이고 있는 공무원 '퇴출 쇼'가 그런 것인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봐야 할 것이다. 장차 공공부문 시장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 모델이 공고화된다면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공포의 나날이 될 것이다.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공포의 연속일 것이다. 서울시의 공무원 '퇴출 쇼'를 보면서 궁금한 건 왜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나 하는 것이다. 인권침해 요소가 대단히 큰 일 아닌가. 근무태만 같은 분명치도 않은 근거로 한 개인의 직장 안정성을 파괴하는 것이 법적으로 유효한가도 따져봐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수 많은 다른 직장에서도 태만과 무능을 이유로 노동자들이 퇴출될 것이다.

무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사람이 언제나 보스일 것이고 보스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유럽의 경우 노동자 해고사항은 노조와 경영자측의 협의사항이다. 노조의 동의 없이 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은 유럽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반면 한국은 공무원노조를 국가가 인정도 않고 있다. 해고할 때 노조 동의는 커녕 아무 고려 없이 경영자의 판단으로 노동자를 무능력자로 규정해 왕따시켜 밀어내는 것은, 일본 영화 '배틀로얄'에 그려진 대로 약육강식이란 사회진화론적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잔인한 쇼다. 



- 피해당사들이 협정 체결 후 어떤 피해를 입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실감을 하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각도에서 지금까지의 한미FTA 반대 투쟁을 평가한다면.

= 민족경제론적 발상으로 협정을 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일종의 애국주의적 기조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가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 적용될 때 민중의 생활을 파탄시킬 것이라는 게 문제다. 우리가 미국 농민이나 중국 농민을 혐오할 이유는 없다. 예컨데 중국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것이 그 자체로 해악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구조에서 한미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 농민층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고, 기댈수 있는 복지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사태를 맞을 경우 농민들의 삶은 파탄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점이다.

- 찬성측과 반대측이 공히 자신들의 논거로 드는 것이 있다. '국익'이다.

= 국익이라는 건 실체 없는 얘기다. 나라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다. 만약 협정이 체결되면 일부 대기업은 득을 볼 것 같고, 거기에 하청화되어 있는 일부 중소기업들도 득을 볼 것이고, 귀족학교와 귀족병원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일부 고소득층도 득을 볼 것이다. 우리가 나라의 실체를 이 기업들과 이 고소득층으로 본다면 한미FTA는 국익에 부합하는 것일테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사는 게 아니지 않나.

-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국익을 말한다.

= 한국에는 아직 국가의 신화가 강하다. 민중의 이득을 말하면 되고, 그게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울텐데, 우리는 민중이라는 얘기를 고상하게 하려면 국가 얘기를 꺼내야 한다. 국가 없이는 고상하고 고매한 당위론적 담론이 서질 않는다.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아직 국가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다. 

- 국제적 분업구조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정부는 반대론자들에게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 내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대안은 한 국가 내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선의 궁극적인 대안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당장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은 국제적인 신자유주의적 분업구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재분배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 재분배 장치라는 건 농민들의 소득보전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부유세, 교육무상화, 의료무상화의 3대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국은 그나마 민중들이 살만한 사회가 될텐데, 지금 전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 방금 말한 3대 조건이 충족되면 FTA도 가능하다는 의미인가.

= 이런 것들이 개선된 이후에도 굳이 FTA를 모색해야 한다면, 지역적으로 가까운 나라와 서로 민감한 부분을 100% 감안한 후에 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우 잘 하면 노동시장까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어 배우기도 쉽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시스템이나 문화가 비슷하고. 한국 노동자들에게 선진국인 일본 노동시장 유입을 보장하는 그런 FTA라면 민중들에게 덜 해롭지 않을까 싶다.

- 진보진영 일각에선 대안적 FTA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 자본보다 민중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는 FTA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노동시장 진입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라나라에도 불법 체류자가 많지만, 일본에서 불법으로 노동하는 한국 노동자들도 많다. 고생도 많이 하고 잡혀서 송환도 당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일본에 가서 노동하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협정을 맺더라도 우선적인 고려는 이런 것이 돼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몇 가지 물으려고 한다. 노 대통령은 자칭 '유연한 진보'라고 한다.

= 그 사람 얘기 별로 하고 싶지 않다(웃음). 그런 자들이 장기적으로 한국 민중에 가장 위험하다. 카멜레온처럼 기만책을 대단히 잘 구사한다. 일부 민중층을 포섭하는 언어적 수법에 능하다. 또 자수성가한 민중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민중운동을 파괴하는 데는 가장 쓸모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노무현 열풍 같은 것을 다시 재현하지 않으려면 지배계급이 어떻게 민중을 기만할 수 있는지 철저히 학습해야 한다. 2002년을 생각하면 허무하다. 당시 주관적으로는 스스로를 진보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속 빈 이미지에 얼마나 놀아났는가. 이런 것이 재현되면 안 된다.

- 역시 유쾌한 질문도 아니고 유쾌한 답변도 나올 것 같지 않은데, 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던 조기숙이라는 정치학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진보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 분류법에 따를 때 자신과 노 대통령은 진보다.

= 조기숙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이화여대에서 시간강사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 중에 교수가 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조기숙 교수와 같은 정규직 교수가 5만명 있고 시간강사가 6만명 있다. 지금의 구조에서 6만명 중 정규 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한국 대학의 재정상황이나 운영 방향으로 볼 때 많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수 많은 시간강사들, 수 년 동안 시간강사 일을 해온 사람들, 상당 수는 정규 교수에 비해 능력이 좋고 업적이 좋은 사람들, 조기숙 선생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서는 이들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다. 한국 교수들 참 이상하다. 시간강사 한 달 벌이는 100만원 될까 말까 하고 조기숙 선생같은 정규직의 급여는 잘은 몰라도 300~400만원은 될 것 같은데(*확실히 잘 모르는 것 같다), 전혀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 희귀한 사람들이다. 시간강사들이 주당 시수도 훨씬 높고, 시간강사들이 많은 수업을 해가면서 적은 돈을 받으니까 정규 교수들이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데, 말하자면 자신들이 하급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건데, 이런 데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한다. 희귀한 사람들이다(*박노자의 '진지함'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 노무현 정부를 파시즘에 가까운 정부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다.

= (노 대통령은) 그냥 '쇼맨'이다. 쇼맨인데, 이 쇼맨의 특기가 뭐냐하면 민중진영의 일부를 포섭해서 무력화하는 것이다. 한미FTA 계기가 돼서 더 이상 이런 쇼맨들이 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파시즘은.... 원래 한국 우파의 기본 심성이 파시즘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그의 동반자, 정적들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더하면 더하겠지. 파시즘은 한국 우파의 기본 정서다. 국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상당수의 법안들은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극우적이다. 이주노동자에 관한 법안 같은 것이 그렇다. 유럽 극우들이 꿈꾸고 있는 것이다. 

- 이번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 지금 같아선 극우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게 뻔해 보인다. (민주노동당이) 이를 막을 수는 없어도 제대로 저항해서 수 백만 표를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 극우 세력과 제대로 투쟁하면서 한국의 보수화를 제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민주노동당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담하다.

-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문제가 뭔가.

= 당은 정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당 사업의 중심에 정파갈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서있는 것 같이 보인다. 결국 이 갈등에 에너지가 소모되면서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당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20~30대층, 학생이라는 미래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젊은 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당의 문화 자체가 20-30대 위주가 아니지 않나. 80년대 운동권의 보수적이고 서열위계적인 문화가 강하다.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많지 않나 싶다. 예컨데, 20대 여학생이 민주노동당을 친근하게 대하기 굉장히 힘든 구조다.

- 학생들은 민주노동당을 어떻게 보나.

= 40대 운동권 아저씨들이 거드름 피우는 곳으로 보는 것 같다(웃음). 80년대 운동권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얻어 작은 수령님 노릇하는 아저씨들의 놀이터, 이렇게 보는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이래서는 성공 못한다. 당은 더 민주적이어야 하고, 미시적 문화도 젊은층과 여성 위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사회당이나 좌파를 보면 20대 국회의원도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도층이 40대 후반 아닌가.

- 다른 문제는.

= 당은 비정규직을 포획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당의 중심에 비정규직이 없다.

-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얼마 전 심상정 의원은 비정규직 지분을 높이기 위한 당원 가입 특례를 제안한 적이 있는데.

= 일리 있는 제안이라고 본다. 또 당 지도부를 뽑을 때 비정규직에 일정한 쿼터를 할당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회의원 후보를 뽑을 때도 여성 쿼터처럼 비정규직 쿼터를 주는 방안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비정규직이 당 사업의 중심으로 들어오기 힘들 것 같다. 비정규직의 투쟁이 있는 곳마다 민주노동당이 달려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일테고. 

- 당에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 게 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진 않더라도 '다함께'라는 그룹의 활동 자체는 생산적인 것 같은데, 당내에서 그 분들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이유가 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다함께'의 활동 가운데 마음에 드는 부분은 탈북자에 대한 태도다. 민중진영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대상인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들은 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대한 태도나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등은 다함께 이데올로기에 찬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동의가 될만한 활동인데, 왜 당에서는 '다함께'를 왕따시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이론에 찬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고. 나만 해도 트로트키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아무튼 나름의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인데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레디앙>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을 놓고 오간 논쟁도 그렇다. 물론 정 교수의 논리에 몇 가지 점에서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적대적으로 몰아세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특히 기사의 댓글들에서 확인되는 '다함께'에 대한 적대감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다함께'는 섹트적이지만 내부 문화가 비교적 민주주의적이고 학생을 확보하는 능력도 좋다. 당이 '다함께'의 활동방식에서 배울 것도 많다고 본다.

- 당내 대선 경쟁은 관심 갖고 보나.

= 유심히 보고 있다. 대중적인 호소력이 제일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은 대중성이 생명 아닌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정치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선은 대중적인 호소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0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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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함께'가 주최한 '박노자 초청강연회'의 강연 내용과 사회자와의 대담을 녹취한 것입니다.
이 강연은 2005년 7월 2일 오후 4시에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렸고, 1천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강연과 대담 녹취록을 꼼꼼히 검토해 주신 박노자 선생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좌파운동

  전문 내려받기


<강연>
방금 소개를 받은 박노자입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보시다시피 민족주의와 좌파사상, 사회주의 사상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이나 분석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대목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이 전개중인데, 그 투쟁의 성격이 미국 신문에서 얘기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로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거죠. 종교적인 성격보다는 그쪽 독립군의 주된 세력들이 세속적인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분들의 투쟁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데 그분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분들의 민족주의적인 신념을 문제삼기가 정말 힘듭니다.

아무래도 그분들의 현실적 입장이라든가 미 제국의 침략을 받고 싸우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분들에 대해서 지지한다는 말씀 빼고는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얘기할 때, 제3세계에서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전개되는 각종 해방운동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아무래도 비난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가 대단히 힘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를 놓고 보면 사람들을 쉽게 끌고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주의는 도덕론이 대단히 강한 사상의 복합체 아닙니까? 구한말을 생각해보면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 같은 분들이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 쉽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교 사상 못지 않게 그들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국가에 봉사하는 일종의 공공 도덕, 일종의 헌신적 도덕을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도덕론을 중심에 놓고 보는 사상 체계인 만큼 유림에서 민족주의자로의 전환이 어떤 분들 같은 경우에는 가능했던 것이죠. 물론 끝까지 민족주의자로 전환하지 않았던 유림들이 대다수였지만 말씀입니다.

그런 도덕론, 민족주의 도덕론은 민족주의의 하나의 강점이지만, 사실 그것은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는 도덕을 완전히 전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결국에는 민족주의와 무관하거나 약간의 관계만을 갖고 있는 운동들이 비민족적 내지 반민족적 운동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민족주의의 도덕의 독점화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이기도 한데, 어쨌든 민족주의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이죠.

또 하나는 민족주의의 현실성이라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당장 투쟁에 투신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당연히 현실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영웅으로 보이기가 쉬운 것입니다. 일제시대 말기에 김일성이 거의 신화적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서 일종의 전설적인 영웅처럼 조선 각지에서 찬양됐던 것을 생각해보시면, 제국주의 억압을 받는 민족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적 투사가 어떻게 인식되는지 상당히 잘 알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컨대 주체사상에도 소위 품성론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성격, 지도자의 품성, 또는 지도자를 따르는 일꾼의 품성을 강조합니다. 지도자를 일종의 이상적인 어른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건 주체사상뿐 아니라 대다수의 민족주의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어른에 대해서 굶주림을 가지고 있는 사회,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부분이 상당한 매력으로 작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매력 포인트라고 하나요?

1980년대 후반을 생각해 보시죠. 수많은 학생운동가들한테 남한 사회가 거의 어른이 없는 사회, 어른이라고 하면 다 어용화되고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때 주체사상의 품성론이라는 것이 어른에 대한 굶주림을 약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작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1980년대 후반에 주체사상이 남한 운동사회 일각에서 퍼질 수 있었던 기반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어른 없는 사회에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어른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반포시키고, 그런 식으로 영웅이 없는 사회에 영웅을 만들어 주는 것도 민족주의의 대단한 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모든 여러 요소들이 민족주의를 상당히 매력이 있는 사상으로, 수많은 운동사회들에게 매력 있는 사상으로 만드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정말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사상을 믿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또는 민족주의 사상을 반제국주의 운동의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환에서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사상의 문제점 그리고 이 사상이 과연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사상인가라는 부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라크에서 미 제국의 군대를 축출하는 것이 당장 단기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의 전례도 있고 하니까 이라크의 독립군이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통해서 미군의 축출이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민족주의라는 사상을 가지고 이라크를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있지만, 과연 이라크인을 계급 사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가 또는 제국주의라는 세계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아무래도 얘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론적인 검토로 들어가서 장황하게 얘기하기보다는 단적인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민족주의의 가시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민족주의가 왜 인간의 해방과 지구의 해방, 이 두 가지 과제에 모자라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서 제 생각을 얘기할까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한겨레> 구독자가 많이 계시겠죠? 아마도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한겨레 21>이라는 잡지를 잘 아시고 계시겠죠? 그 잡지의 557호를 보시면 상당히 재미있는 특집이 있었습니다. 무슨 특집인가 하면 사이공 함락 또는 베트남 해방 30주년이 돼서 구수정 특파원이 베트남인들의 해방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보응웬잡 장군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인터뷰한 것입니다. 보응웬잡 장군의 인터뷰를 보셨죠? 만감이 교차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됐어요.

만감이 교차됐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가 하면 한편으론 보응웬잡 장군이 이끌었던 베트남 해방군이 남베트남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미 제국의 패배가 결국에는 미 제국 헤게모니의 종말을 고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당연히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보응웬잡이 인터뷰에서 자기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서 한가지 질문이 생긴 것이죠.

보응웬잡의 인터뷰를 기억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보응웬잡이 초기 반프랑스 항불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아마 그 발언을 눈여겨본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 같은데, 상당히 재미있었어요. 그게 어떤 얘긴가 하면, 처음에 정글에 들어가서 항불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 보응웬잡이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가 하면, 본인 말대로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특히 우리가 프랑스 군대한테 배웠던 것이 제식훈련이었다."[는 겁니다.]

제식훈련이란 말, 다들 아십니까? 행진이예요, 행진. 학교 교련시간 때 해보신 분들이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소련 말기에 좀 해보긴 해보았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다들 열을 정리하여 동시에 행진하는 훈련인데, 보응웬잡 인터뷰에 의하면 본인이 자기 게릴라한테 훈련을 시킬 때 아예 프랑스식으로 '하나둘 하나둘' 이렇게 맞춰서 행진하도록 한 것이죠.

사실, 어찌 보면 논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프랑스 군대를 이기려면 프랑스 군대의 규율, 프랑스 군대의 훈련법, 프랑스 군대의 제식훈련까지 배워야 된다면 어쨌거나 논리가 되기는 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제식훈련이라는 게, 하나의 열을 이루어서 행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인간의 신체에 어떤 미시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보면, 사회주의 10월 혁명 이후에 초기 소련에서는 적군에서 제식훈련이 폐지됐습니다. 왜 폐지되었는가 하면 그 내재적인 억압적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제식훈련이라는 것이 일체의 병졸들이 장교의 말 몇 마디에 따라 동시에 로봇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결국에는 신체의 자동화, 신체의 기계화를 뜻하는 거죠.

그런데 보응웬잡 같은 경우에는 자기 게릴라부대를 훈련시킬 때 제식훈련을 시킨 데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 그 당시에 보응웬잡은 좌파적 민족주의자로 받아들여졌는데 ― 프랑스식 훈련법으로 프랑스를 이긴다는 데 대해 의심이 없었던 거죠.

보응웬잡의 전기를 읽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이 미국을 이긴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응웬잡 장군의 전기가 여러 가지 많이 나옵니다. 하도 드문 경우니까요, 아무래도. 그분의 전기를 보면 어렸을 때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분이 항불운동 하시는 분인데, 프랑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시는 분인데, 가장 흠모했던 사람이 나폴레옹이었답니다. 그것은 사실 초기 민족주의 사상으로서는 아주 이색적인 것은 아니예요. 실제로 한국의 초기 민족주의자들, 구한말의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대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건 그 당시의 계몽 잡지에서는 확연히 나오는 이야기이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좌파를 제외한 1930년대 후반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솔리니를 대단히 존경하기도 했습니다.

보응웬잡이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의 전쟁을 분석하고 본인도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아버지가 부유한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베트남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을 보면 대다수는 유교적 관료나 지주들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처럼 싸우고 싶고 나폴레옹 군대처럼 자기 군대를 훈련시키려고 했던 보응웬잡이나 그 동료들이 과연 자기 휘하의 병졸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약간 의심을 가져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보응웬잡의 <한겨레21> 인터뷰를 보면서 제가 또 한가지 질문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호치민으로부터 보응웬잡이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말이 하나 있었다던데 그것이 뭐였는가 하면, 한문 고사성어로 이공위상(以公爲上), 공적인 것으로 가장 높은 것을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베트남의 좌파 민족주의자들한테 유교적 사상이 얼마나 강력하게 남아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유교적 사상에서는 호치민 같은 아주 청렴결백하고 개인숭배 같은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던 지도자가 나올 수는 있지만, 유교사상에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혁명 지도부의 사상적 성격 또는 그들이 프랑스나 제국주의를 봤던 그 세계관을 보면 민족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평민의 자손일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평민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수성가한, 교육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신분 상승한 평민들입니다. 이와 같은 유식층, 유산층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 대개 이상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제국주의 열강을 모범으로 해서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드는 것이고, 그 국민국가의 독립을 위해서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즉, 제국주의와 싸우는 것이 계급 사회를 없애고 모두가 완전히 평등하게 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열강을 참작한 또 하나의 국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민족주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겁니다.

물론 베트남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북의 경우에는 열강을 모방할 필요가 없이, 그 당시 국가자본주의 사회들인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하나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독자적으로 본국의 조건에 잘 적용시켜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이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사회들이 ―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베트남이 그렇게 했고, 동유럽 사회가 무너지기 전에 중국이 이미 그렇게 했지만 ―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계 제국주의 체제,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1970년대 경제 개방이 완전히 되기 전까지 등소평을 대단히 나쁘게 묘사했던 서방 언론들은 1980년대 들어 등소평을 금년을 여는 [인물로] 선전합니다. 참, 공산당의 당수라는 사람이 자본주의 언론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큰 겁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에는 구공산당 관료들에 의한 자본화의 속도, 또는 제국주의 세계와의 화해 속도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자본화는 1980년대 후반에 서구 국가들도 생각하지 못한 수준으로 발전됐습니다. 예컨대 중국에 가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중국 대학교에는 등록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상교육이 아닌 것이지요. 1980년대 후반부터 그래왔습니다. 사실, 서구의 경우에는 대다수 국가에서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보장하는데, 중국은 아직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었을 때는 그렇게 했다가 세계 제국주의 체제와 화해에 들어갔을 때는 그것을 아주 빨리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등소평은 초기에 좌파적 민족주의 혁명가라고 봐야죠. 물론 본인은 자기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지만, 조금 더 학술적으로 분류하자면 일종의 좌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국민국가 건설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가 돼 있습니다. 좌파적인 민족주의자, 좌파적인 국민주의자들이 얼마나 빨리 제국주의 세계와 손을 잡을 수 있는가를 보면, 자기 민족의 국민국가를 이상으로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로부터 멀리 가지 못했는지, 얼마나 제국주의 세계에 대한 흠모가 많이 남아 있었고, 얼마나 제국주의를 많이 의식해서 혁명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트남만 보더라도 김우중을 그렇게 오랫동안 체류시켜 준다든가, 가끔 <한겨레>나 다른 한국 언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해외, 즉 일본·한국·서양 남성들의 섹스 관광에 대해서 일년에 하루나 이틀은 단속을 해도 나머지 날들은 단속을 하지 않는 태도라든가 … 그러니까 섹스 관광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제국주의 세계와 이 구공산당 관료들의 유착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또는 구공산당 관료들이 평등세상이나 여권, 인권에 대해서 처음부터 얼마나 자각이 없었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사실, 베트남 혁명이 적어도 항미 투쟁에 성공해서 미제 군대를 축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 세계 민중의 경사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경사였죠. 지금도 세계 민중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그 이미지 아닙니까.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들이 마지막 남은 미군들을 끌어넣고 도망치는 모습,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항미 투쟁이 성공해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혁명이 실패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것이 계급적인 차원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처음부터 계급 문제가 아닌 민족 문제를 놓고 일으켰던 혁명이라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호치민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저도 그런 면모가 있다고 보지만, 호치민의 또 하나의 일면을 이야기하자면 그는 소련의 노선을 그대로 따라서 남베트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혁명가라 하더라도 새로운 소련형 국민국가를 만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호치민은 무자비했습니다. 왜 그 혁명이 성공적인 항미 전쟁이 될 수 있었어도 성공적인 계급 혁명은 될 수 없었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저희로서 가장 어려운 얘기 중 하나인 이북의 혁명을 생각해 보죠. 이북 혁명의 과정에서도 제국주의 유산 또는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북의 혁명이 심하게 일인 독재체제로 들어가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남에 비해서 훨씬 선진적이고 민중 지향적인 사회로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1940년대 후반에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월북했던 것은 그만큼 이북의 혁명이 매력적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월북한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정확한 의미의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고 민족적 또는 민중적 성향의 상당히 선량한 지식인들이 이북으로 많이 간 것입니다. 그 당시 이북의 토지개혁은 실제로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북의 토지 개혁이라는 모범이 있었던 것이고, 이승만 정권이 '우리도 어느 정도 안 하면 이북과의 경쟁에서 진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북의 혁명에 대해서 역사적 기여를 대단히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1946년 말부터 1948년까지 이북에서 전개되었던 일련의 캠페인들을 보면 우리가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46년 말부터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이 시작됐는데, 건국사상의 교양을 위해서 모든 국민을 총동원해서 교육을 시킨다는 이야기죠. 그 당시 김일성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던 운동인가 하면, "새로운 민주조선의 일꾼들, 국민다운 정신과 풍습과 도덕과 전투력을 창조하기 위한 사상 혁명"이라는 운동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 또는 총동원이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총동원'은 일제가 일제 말기에 계속 이용해 왔던, 일제 말기 파시즘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총동원해서 사상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 일제 말기의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국민다운 정신, '국민정신', '정신'이라는 말은 일본 유학생들이 한국에 처음 들여온 일본말입니다. 그런데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민족주의 패러다임에서도 일본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북에서 그 당시에 국민정신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아마 소련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 상투적으로 이용됐던 말을 이북 정권이 거의 이어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제 말기에는 다른 나라 국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건국사상총동원교양캠페인'도 그렇고 다른 캠페인들도 그렇지만, 캠페인 진행 방식이 일제 말기의 '총후 보국 캠페인' 같은 대중 캠페인들하고 구별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선전원들을 대대적으로 보내고,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동원시켜 학습시키고, 학습이 안 되거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자아 비판시키고, 사상을 개조시키고 …. 그런데 일제 말기의 대화숙이라든가 하는 사상교양 기관에서 진행되었던 캠페인을 보면 그다지 다른 모습이 아니라는 게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국가를 만들 적에 국민국가의 규율, 국민국가의 억압과 통제장치들의 상당 부분은 김일성 장군이 그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일제의 통치 메카니즘을 참작해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즉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국가가 어쩌면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너무나 많은 유산을 받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우리로서는 지우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캠페인은 최초의 캠페인 중 하나였고 1950년대에도 계속 진행됐는데, 캠페인들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책이 ≪조선전사≫입니다. ≪조선전사≫를 학생 때 읽은 적이 있었어요. 권수가 하도 많으니까 다는 못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저도 '학습'을 받아서 상당히 향수 어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55년 4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기본 사상교양에 대한 기본 방침을 세웠는데, 사상 교양이라는 것은 '당원에게 사회 발전의 법칙을 인식시키며, 사회주의 승리에 대한 필요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시키고, 불굴의 혁명 투사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무엇입니까? 한국어의 언어적 구조를 한번 보시죠. '시키다'는 말이 가장 자주 나오는 거죠. 주민들이 스스로 터득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무장시키고', '인식하게 만들고', '훈련시키고'라는 '시키다'는 말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런 언어를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물론이거니와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것이 1940년대 후반에도 이미 주된 슬로건이었습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인데, 사실은 그것도 일제 말기 파시즘의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영향으로 치부할 수 있기도 합니다.

1950년대 캠페인들을 보면 개인 해방은 이미 꿈도 꿀 수 없는 것이고,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계급적 해방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강조하는 것은 조국, 국가, 민주조선의 통일과 해방의 기지, 그러니까 국가 건설이지 노동자들의 문화적 개인 발전이라든가 생산관계에서의 소외로부터 해방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별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이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고, 국가 통일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고, 그 과정에 일꾼이자 희생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맑스가 생각했던 개인과 사회의 자율적인 발전하고는 이미 거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됐던 겁니다.

사실, 민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북의 역사에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면 대단히 재미있어요. 이북에서 나오는 책 중에 ≪철학사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973년 ≪철학사전≫에서 민족에 대한 정의를 보면, 민족은 언어나 경제의 공통성을 위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985년에 새로운 ≪철학 사전≫에서는 민족에 대한 규정이 달라져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혈통, 공통의 혈통이 드디어 우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북 같은 경우에는 1940년대 말,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족주의라는 말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대개는 사회주의적 애국심,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라는 언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는, 위기에 봉착되고 동유럽권이 무너진 뒤에는 민족주의·민족에 대한 이야기도 그 위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로동신문> 1991년 8월 5일에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자'라는 김일성의 담화문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이북 체제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재미있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이 있고, 계급적 이익을 민족적 이익 위에 올려 세우거나 계급 투쟁을 통일 투쟁과 대비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결국, 민족 투쟁을 지배 이념으로 삼는 사회에서 북한 노동자들 개개인의 이해관계라든가 계급으로서의 이해관계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북한 체제의 민족주의가 실질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것이 1950년대 중반부터이지만, 그것이 표출되어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1980년대, 특히 1990년대 초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이지린 선생 같은 이북의 유명한 학자들이 단군에 대해서 썼던 이야기[를 보면] 그 당시에는 단군을 신화로 봤습니다. 1990년대 단군릉을 보면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역시 이데올로기의 변천이 이 체제의 속성, 민족주의적 속성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민족주의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겠습니다. 결국, 민족주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얘기하자면, 열강을 모범으로 삼아 열강에게 배워서 우리도 한번 열강처럼 돼 보자는 토착 지배층 일부분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반영된 사상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들이 성공한 뒤에는 토착적 유식층, 유산층 중에서 이 운동을 지도할 만한 지적 능력, 재산, 또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득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승리해서 제국주의 점령군을 축출한 사회는 재미있게도 나중에 식민 모국과 가장 친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항불 저항의 전통을 계승한 알제리 정권들이 가장 친한 국가는 프랑스이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북의 한 지도자의 최근 발언으로 기억이 됩니다. "만약에 미국이 우리 체제를 보장해 주면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겠다." 이것은 이북의 지도층, 이북 지배계급의 심사를 대단히 잘 반영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북한이] 미국하고 대결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헤게모니를 잃어가면서 발악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또 북한에 대해서 실제로 갈등, 어찌 보면 거의 전쟁 분위기를 획책하는 미국 쪽의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지배계급은 웬만하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맨 위에 서 있는 미국과의 관계를 사실은 우방 관계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민족주의의 내부 모순성, 저항성과 협력성, 저항성과 모방성의 그 역설적인 이중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상당히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북한의 지배층과 남한의 지배층, 미국 지배층이 서로서로 화친을 하고 평화공존 체제를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로 가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저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남북 지배층의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평화공존 정책을 당연히 지지합니다. 남한 기업이 이북에 진출해서 거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현실적이고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남한에서 심지어 민주노동당이라 해도 남한 기업이 이북 지역에 진출해서 이윤 추구하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라는 생각을 별로 안 갖고 있다는 데 대해서 약간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양쪽의 지배층들이 백성을 총알받이로 삼아 전쟁하는 것보다는 화친을 해서 폭력 없이 진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과정에서는 한편으로는 우리가 총알받이가 안 되니까 득을 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제국주의 착취 체제가 이제는 북한의 노동자층 역시 삼키고 말겠다는 것도 현실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저로서는 우리 사회자분께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싶은데, 과연 남한의 운동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의식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습니다.] 원래 사회자가 저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데 약간 반대가 됐죠? 이제 이야기가 장황해져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와의 대담>

김하영*:
 

노자 선생님께서 오늘 강연해주신 내용이나 그 동안 민족주의와 좌파 운동에 관해 여러 책에서 주장하셨던 내용들 가운데서 제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 선생님의 답변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저한테 던지신 질문도 시간이 있으면 답변을 하죠.

오늘 선생님께서 저항적 민족주의자였던 제3세계 지식인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계급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지적을 해주셨는데, 굉장히 공감이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어쨌든 자국의 노동자·농민을 착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하면 그 나라들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 나라들이 제국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많이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답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 되는데요, 선생님은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에서 "비록 한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해도 지구 전체의 차원에서는 대안 마련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고 지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사회자 김하영은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편집팀원이다.

저서로는《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책벌레, 2002)가 있다.

박노자: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노움 촘스키입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촘스키는 지식인으로서 또 정치사상가로서 출발점이 베트남 침략 반대였습니다. 1970년대, 특히 베트남이 해방된 뒤에 촘스키는 미국 침략이 성공했다고 보는 관점에 섰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미국이 축출을 당했다 해도 거의 4백만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를 봤고, 거의 전 국토가 초토화됐고…. 그 당시 촘스키가 한 얘기가 무엇인가 하면, '미제에 의해서 이처럼 초토화된 베트남은 더 이상 하나의 매력적인 모델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제3세계의 종속화된 민족들에게 베트남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없게끔 만든 것이 바로 미 제국이 바라는 바였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혁명 노선은 올바랐는데, 미 제국의 무자비한 전쟁에 의해 황폐화되어서 다른 피억압 민족의 모델이 될 수 없게 됐다'고 은근슬쩍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미 제국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피해에 대해 보상하기는커녕, 재수교 협상 때 베트남을 강요해서 남베트남이 미국한테 졌던 빚까지 다 받아냈습니다. 미국에 의해서 황폐화된 나라가 미국에 돈을 지불하는 격이 됐으니, 이건 인간의 세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수준이죠. 이런 게 다 맞는 얘기이고 촘스키 얘기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예컨대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노동자들은 자립적인 노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자립적인 노조 활동이 불가능하고, 노조들이 당의 아주 심한 간섭을 받고, 중국의 경우 노조 활동가 중에 공산당 간부 출신이 거의 50퍼센트가 넘죠. 그러니까 실제로 노조가 있다 하더라도 유명무실하고, 독립적 노조를 산발적으로 만들면 당장 탄압을 받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좌파한테 그런 파쇼적 탄압을 분명히 비판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런 것을 단순히 미 제국과의 대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단순히 미군의 폭격이나 황폐화 작전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사실 대결하지도 않지만 말씀입니다. 물론 한 나라가 요새처럼 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 분명히 미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한 피해를 본 지역이 아니더라도 새롭게 집권한 민족주의자들이 역시 계급 질서를 그대로 재현시키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중이 어느 정도 주체화가 됐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국가들의 주체화된 민중과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제가 잘 모르지만, 중국은 요즘 인민 저항이 많이 활성화됐습니다. 저항의 횟수만 해도 작년에 거의 5만 건에 가까웠고, 대규모 파업을 주도하는 지역적인 노동자들의 자율적 조직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사실, 전 세계를 위한 가장 나은 대안은 서구의 민중운동가들과 중국 등지의 운동가들이 서로 소통을 해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좋은 대안인데 아직까지 갖가지 제한이 대단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이나 중국의 좌파적 민족주의 세력의 승리에 대해서 단순히 기뻐하기만은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하영:
    이제, 구한말과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당시의 주류 민족주의자들이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점을 여러 책에서 지적해 오셨습니다. 유럽 자본주의의 가치를 받아들인 것이었죠. 그런데 이런 주류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지배 아래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도 못했고, 결국에는 상당수가 일제에 투항했습니다. 강연에서 베트남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셨는데,  구한말과 일제시대 주류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도 계급적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식으로 역사를 본다면, 한 행위자의 역사적인 행동을 단순히 자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 그 행위자가 어떤 사상 체계를 왜 습득했는지, 어떤 계층의 지지자를 얻었는지, 어떤 계층을 대변했는지, 그 계층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실제, 구한말의 소위 민족주의자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대다수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장지영 선생 같은 경우에는 구미 지역의 장씨인데, 나중에 장직상1) 같은 친일 지주를 배출했던 유명한 문중입니다. 부유한 문중의 출신도 있었는가 하면, 물론 신채호 선생이나 박은식 선생처럼 비교적 가난한 선비 가정에서 태어난 분도 있었죠. 그렇다 하더라도, 신채호는 신기선2) 학부대신의 도움에 의해서 진출할 수 있었고, 박은식은 민병석3), 즉 당시 민씨 족벌의 핵심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의 문객이 돼 서울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대부 사회의 관계자본, 관계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진출하신, 그 사회의 생리를 거의 내면화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본인들의 문화 상징자본을 갖고 진출할 수 있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즉,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보면 경제적 자본이든 문화자본이든 관계자본이든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밑천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어디까지나 가진 쪽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나중에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을 대단히 반겼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과거 중국의 삼대사회와 같이 폭력이 없고 화목한, 침략적이지 않은 새로운 사회가 드디어 출현했다는 일종의 유교적인 이상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님의 계몽기의 글들을 보면 소위 '식산흥업'에 대한 글이 꽤 있어요. 교육 입국에 대한 글도 있구요. '식산흥업'에 대한 그 분의 글이나 그 분이 발간했던 <서우>(西友)라는 잡지에 나왔던 글들을 보면, 가장 재미있는 것이 노동자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입니다. '식산흥업'에 대한 글들의 논점은 대체로 산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 농업을 위주로 해야 하는지였습니다. 이에 대한 그 당시 유산층 사이의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을 위주로 한다면 농지개량·가축개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이 논점이었습니다. 노동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노동력을 훈련시켜야 한다거나 노동하는 사람들한테 기초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정도의 언급이 있었지, 노동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같은 운동의 계급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기 민족주의자였던 유길준은 노동야학을 위해서 교과서를 쓴 사람이에요. 그 당시 조선에서 노동자라고 해봐야 합방 시절에 약 1만 명, 회사는 약 250개 정도였습니다. 노동자라면 인력거꾼이라든가, 여러 가지 잡직, 인부 같은 사람들이었죠. 유길준은 노동자들의 야간학교를 위해서 <노동야학독본>이라는 교과서를 썼는데, 그것이 1907년에 나왔어요. 그 교과서를 보면 그 당시 유길준 같은 대지주 출신의 유식한 관료가 노동자들한테 어떤 사상을 심고 싶었는지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임금에 대한 충성, 국민으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임금을 위해서 분골쇄신하는 정신 같은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임금은 이미 일본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유길준 본인도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들이 계급적 질서를 노동자들한테 얼마나 내면화시키고 싶었는지 그 책에서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구한말의 교과서를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을 겁니다. <노동야학독본>뿐 아니라 <여자독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여학교는 약 120개 정도 있었는데, 부유층 여성들만 다닐 수 있는 특수 기관이었죠. <여자독본>이라든가 <여자초등수신서>, 즉 여자 초등학교의 윤리 교과서에서 여자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되는지[를 규정하는] 여자 덕목의 맨 첫 부분이 뭔지 아십니까? "여자가 얌전해야한다."(청중 웃음) 이것을 다 읽으면 요즘에는 아마 커다란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1) 장직상(張稷相, 1883∼1947): 구한말 경북 관찰사 장승원(張承遠)의 둘째 아들. 그는 일제 초기 하향, 선산 군수를 지내다가 독립군 군자금 제공을 거부한 아버지가 대한광복회의 손에 살해된 뒤 공직을 떠났다. 1920년에 경일은행을 대구에 세웠고, 1930년에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총독부 중추원의 참의가 됐다. 1940년에는 일본 전시 동원체제의 앞잡이였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 됐다. 하리모토(張元稷相) 로 개명한 그는 1945년 일제의 전쟁자금을 조달하는 데 몰두했다. 해방 뒤 남선전기 사장으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사업을 하다가 1947년 사망했다. 동생 장택상은 미군정의 수도 경찰청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냈다.

 2) 신기선(申箕善, 1851∼1909): 1877년(고종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통리기무아문주사·통리내무아문참의 등을 역임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당 정권이 들어서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됐고, 이 때문에 1886년에 전라도 여도에 유배됐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호조참판·군부대신·중추원부의장 등을 지냈다. 1896년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 개화파 정권을 반대하는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의병활동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1907년 대동학회(大同學會)를 창립해 회장을 지냈다.

3) 민병석(閔丙奭, 1858∼1940): 민경식(閔敬植)의 아들이고,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閔復基: 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의 부친이다. 1879년(고종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에 승지, 1884년에 참의군국사무에 등용됐다. 같은 해 수구당(守舊黨)의 일원으로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를 자객으로 보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대사성·강화부유수·제도국총재·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고,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을 잃은 뒤에는 일본 정부의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이 됐으며, 1939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김하영: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 정세가 1백 년 전의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요즘 종종 듣습니다. 물론 당시의 조선과 오늘날 남북한의 세계적 지위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이라는 점에서 뭔가 비유해 봄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특정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거나,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세력균형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 많이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백 년 전의 역사가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 어떤 교훈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이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1백 년 전의 상황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 지역의 구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신제국주의 세력인 일본이 세계 체제의 중심인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구헤게모니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합니다. 그리고 한반도 민족주의자 중의 상당 부분을 협력자로 매수해 결국에는 한반도를 장악하고, 한반도의 유산계급과 일종의 공존 관계를 만들어 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중심인 미국이 아직 그 당시의 청나라처럼 완전히 이빨이 빠질 만큼 약해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쌍둥이 적자를 보면 어쩌면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러가 너무 많이 남발됐고 군사예산의 지출이 지나쳐서, 미국에 투자된 외국 자금이 만약 일시에 빠져나갈 경우에는 급격한 하락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현재 헤게모니 세력인 미국이 상당히 약화돼 가는 것이고, 그 대신 지역의 새로운 헤게모니 세력인 중국이 조금씩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질 수 있는 순간인데, 이 순간에 과연 한반도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물론 사회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한반도의 이북도 이남도 이미 국민국가가 됐고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 같은 경우에는 거의 일종의 아류 제국주의로까지 얘기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기 때문에 1백 년 전처럼 제국주의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식민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1백 년 전에는 두 개의 전쟁을 거쳐서 헤게모니 세력의 교체가 이뤄진 것 아닙니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서 신제국주의 국가 일본이 한반도를 확보한 것이죠. 만약에 한반도가 또 한번 전장화가 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의 소위 '균형자론'은 어찌 보면 남한 지배계급의 가장 트여 있는 부분의 입장을 잘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헤게모니 세력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는 한쪽에만 붙는 것보다는 중간에 위치해서 사태를 관망하고, 교체되는 순간에 등거리 외교를 통해서 재빨리 재편을 선언하는 게(청중 웃음)…. 제가 만약 한국의 지배세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그러니까 그것이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민중의 이해관계와 어디까지는 겹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중국의 민중과 남한의 민중, 그리고 미국의 민중이 들고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킬 가망성이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지배계급과 어디까지는 이해관계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세력 간의 놀음이고, 우리가 아무리 '균형자론'을 십분 적용을 해서, 교체될 순간이 보이자마자 재빨리 바꾼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이 지금은 이라크 독립군에게 시달려서 그렇지, 이라크 독립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벌써 이란→북한의 순서라든가, 북한→이란의 순서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 지배세력을 비롯해서 우리가 이라크 독립군에게 큰 절 한번 올려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제국주의 세력들이 우리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청중 박수)

세력균형이라는 말을 1백 년 전에도 많이 써먹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균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안보에 완벽한 보장이 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특히 남한의 진보세력은 중국의 진보세력 또는 미국의 진보세력과 연대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는 진정한 의미의 민중세력들이 아직 수면 위에서 전국적인 조직 활동을 할 수 없는 단계라서 당분간 현실성이 좀 결여됩니다.
 

김하영: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균형을 잘 맞추는 줄타기를 해야 하지만, 우리들은 다른 나라 진보세력과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박노자:
   그것이 원론적인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특히 중국은 지배세력이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해서 민중의 의식을 상당 부분 순치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김하영:
  그럼 이제 중국·일본·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가 이목을 끌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 우익의 독도 망언 등의 배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자:
  동아시아 지배계급들이 민족주의를 통치 도구로 사용한 지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이미 1백 년이 넘었죠. 일본은 외부의 적을 하나 만들어서 소위 '국민정서' ― 이것도 사실 1백 년 전 일본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 를 거기에 맞춰 모든 국민적 콤플렉스·분노·에너지를 거기에 쏠리게 합니다. 이것은 일본 지배계급이 많이 구사했던 전략입니다.

예컨대 청일전쟁 때 일본내 분위기는 히스테리를 넘어서 거의 집단적인 정신병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일본 신문의 만화판들을 보면 거의 돼지처럼 그려진 중국병들을 열심히 총검으로 죽이는 일본 군사들이 그려져 있었고, 중국을 비하하는 노래들이 동요가 돼 아이들이 거리에서 불렀습니다. 또, 후쿠자와 유키지 같은 거물이 "이것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 하고 한 마디 하고, 지식 사회가 다 재편이 돼서 가장 진보적이다 싶은 기독교인들까지도 '야만적인 중국을 처부셔야 한다'고 한 마디씩 보탰습니다. 이것을 일본의 공격적인 민족주의 대중화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 [때도 그랬습니다.] 잘 기억하시겠지만, 1905년에 일본 가쓰라와 러시아 비테가 담판을 해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실제로는 그 때 한반도의 식민화가 결정됐습니다. 이 때 러시아는 배상금을 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배상금을 무느니 차라리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했고, 일본은 이미 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전쟁을 못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배상금 대신 받아먹은 것이 사할린 남부와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 이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에 [일본] 언론들이 만들어 놓은 소위 국민정서상 ― '국민정서'라는 말이 그 때도 많이 쓰였습니다 ―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포츠머스 조약 소식이 알려지자 도쿄에서 대중 폭동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배상금도 못 받을 수가 있느냐.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배반이다.' 엄청난 폭동이 히비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대중 정서를 어떤 식으로 끌고갔는지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당시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일본인들이 외쳤던 슬로건은 '블라디보스토크부터 시베리아 절반 정도를 우리가 얻었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들이 이와 같은 꿈을 심어 민중을 순치시킨 것이죠.

이런 경력이 있는 일본은 지금 이북을 일본을 위협하는 악마적 세력으로 만들고, 민족주의화 또는 재제국화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하영: 동북공정 또는 독도 망언에 대한 대응 등에 대해서 지적해 주실 부분은 없습니까?

박노자:
   동북공정[에 대해 얘기하면,] 요즘 중국에서 이북과 상당히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북은 1990년대에 신화를 역사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단군릉이 생겼고, 단군이 역사 인물이 됐습니다. 그리고 개성에서 고려 왕조의 수도라는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줄 만한 대대적인 유적 개조, 개·보수가 이뤄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중국은 요즘 황제릉 ― 황제는 단군과 성격이 비슷한 중국의 전설적인 시조입니다 ― 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를 비롯해서 동포인 화교들의 대표자까지 같이 제사 지내는 풍경을 연출하고, <인민일보>는 그 이야기를 커다랗게 씁니다. 공산당 간부가 전설적인 인물한테 제사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끔찍하죠. 또, 요즘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근대적인 과학적 사학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역사 인물이 아니라고 봐 온 요(堯)임금 시대 중국의 재복원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합니다. 신화를 역사로 만들고, 중국을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아주 다방면적인 노력이 진행중입니다. 중국 고고학계의 정설들 가운데 가관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구석기 시대의 소위 시난트로푸스를 중국인의 시조로 보는 것입니다. 시난트로푸스는 40만 년 전의 원인류입니다. 아직 호모 사피엔스도 아닌 것이죠. 그것을 시조로 보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이상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1920년대에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견됐던 시난트로푸스의 해골이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는 얘기가 교과서에 나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죠.

동북공정은 이런 배경을 깔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국내 [논의]에서 제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동북공정이 공격적이라기보다는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영토적인 요구에 대비하는 부분이 가장 강하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물론 공격적인 면도 있을 수 있죠. 예를 들어서, 중국의 역사 지도를 보면 한사군(漢四郡)을 유달리 강조합니다. 한사군은 한나라 시대 때 있었지만, 당나라 시대의 지도를 봐도 꼭 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북공정과 관련된 문건을 보면 한반도에 대한 공격적 야욕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동북지역이 늘 중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국민과 민족국가를 과거에 투사시켜 영원불변의 위대한, 도덕적으로 가장 높고 세계 중심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김하영:
   오늘날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으면 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억압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 외세의 압력에 대한 반감이 있는 동시에, 다른 민족에 대해 고통을 주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은 "피해의식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가 '우리' 지배자들이 다른 나라 또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 저지르는 행위에 둔감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어느 글에선가 하신 바 있습니다. 좀 전에도 남한이 아류 제국주의 수준에 올랐다고 얘기하셨는데, 남한의 "아류 제국주의"로서의 면모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도 그런 사례입니까?

박노자:

파병 당시에 <매일경제신문>은 '우리가 단순히 소수의 파병뿐만 아니고, 미국을 화끈하게 도와줘서 미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이라크에서 독립적인 영향권을 확보하자'고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보수 신문, 극우 신문에서 '이라크에서 우리의 독립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다' 하는 얘기가 적지 않게 나왔으니 아류 제국주의 같은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파병은 아류 제국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남한 제국주의의 아류성 또는 종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노무현 정권의 이해타산으로는 파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무현 정권 자체의 목표로 봐서는, 그리고 지지자들을 이탈시킨 부분이라든가 여러 정치적인 고려로 봐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계륵 같은 부분이었죠. 그래도 노무현이 파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노무현 정권의 관료 기구들이 얼마나 미국쪽하고 가까이 지내고,  얼마나 미국적인 논리에 젖어 그것을 내면화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의 관료기구, 특히 파병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외교 또는 국방 분야의 기구들이 얼마나 자국의 논리보다 제국의 논리에 충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파병에 대한 결정, 정치적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실무 작업은 해당 관료들이 하는 것이고, 결국에는 해당 관료의 판단이 정치 판단의 근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뿌리치려면 노무현으로서는 갖지 못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결국 노무현이 실무자들의 판단을 따르는 듯한 인상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파병을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성 내지 예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가 분류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해를 봤다', '우리가 피해를 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 당연히 조선 민족 전체의 지위가 강등됐고 모욕과 피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겠습니다만, 일제시대 때 피해를 안 보고 영달한 사람도 좀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피해를 본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영달한 사람들이 꽤 있었고, 이 사람들이 지금도 일제에 대한 향수 젖은 글도 가끔 쓰지 않습니까? 본인 가문의 출세 배경이라든가 본인 계급의 등장 배경을 생각해서 가끔 일제에 대한 향수 어린 글을 쓰죠. 저는 한국 사학계의 나이 드신 분들 중에서 '나는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훨씬 잘 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청중 웃음) 이건 단순히 피해 본 것으로만 보기는 좀 곤란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피해를 봤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민중이 피해를 본 것이고, 유산층 또는 상당수 유식층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서 계급적인 지배를 유지·강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여기에서 약간 기만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피해를 준다'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보면, 한국 남성들이 돈을 지불해서 베트남에서 섹스관광 하는 것이 베트남의 빈민층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이고,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교역을 넓히는 것이 베트남 간부층 또는 중간관리자층이나 전문가층한테 하나의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베트남 같은 곳에서 소위 '한류'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제적 진출이 그 곳 일부 계층에게 혜택을 주는 바가 있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 곳 중산층 자녀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라는 말이 참 기만적입니다.

김하영:
   몇 가지 질문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청중석으로 마이크를 넘겨서 질문이나 주장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청중석 질의·주장 생략)

 김하영:
    이제, 정리 발언을 해주실 시간인데요, 정리 발언을 하시면서 한두 가지 질문에도 함께 답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의 지적대로 민족주의는 노동자 계급과 지배계급을 하나로 묶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제국주의에 저항해 싸워주기를 희망하죠. 동시에, 우리 나라 좌파 민족주의자 동지들이 그렇듯이 미국 제국주의와 정권에 맞서 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민족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족주의의 극복은 어떻게 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요, 선생님께서는 "개인주의가 사회·정치적 무관심을 의미한다는 오해만큼이나 지배층에게 유리한 오해는 없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건강한 개인주의와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조직적 저항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지, 오늘날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반전·반자본주의적 저항들과 어떻게 연관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에 대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노자:

민족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가장 가시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 전대협 등의 학생운동 단체에서 분명한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활동했던 고급 활동가 일부가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시죠. 지금 정권과 국회에서 가장 부끄러운 것입니다. 한나라당에도 그런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이 더 부끄럽지만요. 이 사람들이 굉장히 쉽게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에게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이 대표하는 중간 자유주의자들, 중간 부르주아지들과 좌파적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전대협의 옛 지도자들 같은 분들이 아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헤게모니 장악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서는 우리가 연합을 해야 되고, 중간파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할 말을 못하는 것인지…. 이것이 이분들의 실천입니다. 그러면, 민족통일을 위해서 이라크 파병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분들한테 그냥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주의적 색깔을 가지고 있던 주로 유식층 내지 유산층 출신의 활동가들이 중간파 부르주아지들과 이렇게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배경이 민족주의 사상 자체에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본질이라든가 민족주의의 효과들을 설명하려면, 앞서 얘기했듯이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전쟁에 성공했던 여러 나라들이 과연 나중에 어떤 계급 구조를 이루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북한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은데, 이북 역사에서 계급 구조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발전했고, 실제 계급 사회의 작동이 어떤지 우리가 조금 더 정확하게 실질적인 사례를 가지고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개인자율주의'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레닌이 죽기 직전에 이미 혁명이 왜곡되고 변질돼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레닌 전집 제45권인 것 같은데, 1921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한테 지금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기 양심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그리고 늘 양식과 양심에 기반해서 행동하는 동지들이다. 그런 동지들이 없다면 이 썩어빠진 관료 기구가 결국 당을 장악할 것이다.' 레닌은 혁명이 이미 왜곡돼 가고 있고, 패배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죽은 겁니다. 그리고 레닌은 자기 양심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 그런 당 활동가들이 있어야 혁명의 왜곡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구지도층이 생각했던 혁명가 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율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를 터득하고, 늘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형이 출현하기를 바랐던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동료로 생각했던 것이죠.

어차피 지금 존재하는 모든 체제들이 불완전한 것이고, 또 어떤 사상도 실현 과정에서는 온갖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권력 관계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어떤 사상도 권력 담론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개인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사상의 권력 담론화를 방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양심에 거스르지 않고 자기 조직 안에서도 조직의 문제점을 제기해서 조직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얘기이지만, 그런 의미의 개인주의자가  어떤 조직 안에 없다면 그 조직은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조직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람이 존재해야 합니다. 결국 그런 면에서는 개인의 행복과 조직의 행복이 둘이 아니고 하나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인데,(청중 웃음) 제가 생각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집단과 연대 행동의 가능성은 제가 보기엔 둘이 아니라 하나일 것입니다. 이제 사찰에서 하는 법문 같아져서 마쳐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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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퍼온글] 어느 혁명가의 피로 쓰여진 역사
김원봉연구 - 한국현대인물연구 2 한국현대인물연구 2
염인호 지음 / 창비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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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있는 김원봉 관련 서적들>

 김약산은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상해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려 다녔지만 김약산은 언제나 조용하였고 스포츠를 즐기지도 않았다. 그는 거의 말이 없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했으며 톨스토이의 글도 모조리 읽었다. 그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하였다. 그가 빼어난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ㅡ 김 산, 님 웨일즈,<아리랑>, p107, 동녘, 1984

 우리 시대 '잊혀진 혁명가'의 한 사람인 약산 김원봉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창설된 의열단의 의백이었으며, 1935년 좌, 우가 연합하여 통일민족전선의 표상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였다. 후에 중일전쟁이 터지고 1938년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의 대장이었으며 의용대를 북상시키고 홀로 임시정부에 남아서 임정군무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정에서 주석 김구 다음으로 제 2인자의 자리를 굳혔으며 보수적인 임정개조를 위해 험난하고 아무 소득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광복후 환국한 김원봉은 육군사관학교 초대교장을 지냈으며 좌파 계열의 단체가 모두 참여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의장을 맡았다. 또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을 잇는 인민공화당의 총서기를 지냈다. 후에 미군정과 친일파의 득세로 남한의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그는 남북연석회의참가를 위해 38선을 건넜다. 회담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계속 북한정권에 머물며 국가검열상을 지냈지만 58년 반당종파 사건에 휘말려 예순의 나이에 숙청당했다.(그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지만  숙청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상이 매우 개략적으로 살펴본 혁명가 김원봉의 생애이다. 이 책은 92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진보적이고 독보적인 자료로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생애를 세밀하게 복원해 내었다. 1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어도 요즘의 연구성과와 큰 차이가 없지만 지은이인 염인호가 최근에 낸 책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과 비교해 읽어보면 그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매우 성실한 학자임을 깨닫게 만든다.

 1935년 김원봉의 주도아래 재중국 독립운동자 사이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민혁당은 좌파계열의 모든 단체는 물론 임시정부의 한독당까지 참여한 좌우연합의 상징이었다. 이때 약산은 부지런히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며 서로 대동단결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이때 김구는 임정에서 나와서 한국국민당을 만드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에 약산은 김구를 찾아가 민혁당에 가입할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구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김구는 자신의 [백범일지]에서 밝히는 것처럼 공산주의자인 김원봉과 같이 일할 수 없어서 거절했다고 했지만, 실은 중국에서의 판도가 자신이 아닌 김원봉에 의해 주도되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또 김원봉 밑에서 일할 수는 없다는 치졸한 의식이 발로하여 민혁당 가입을 완강히 거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사를 살펴볼때 이것은 저마다 자신이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어떤 단체에도 속하려 들지 않는 한국인들의 치졸한 습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은 두 셋만 모여도 무리를 짓고 당을 이뤄 '정치단체'를 만든다며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비웃고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제로도 내가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온 독립운동, 정치단체는 100개 가까이는 되는 것 같았다. 조선인들은 곧잘 단체를 만들긴 하지만 대개 단명하고 거의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원봉이 만든 위 단체들의 활동은 우리의 독립운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김원봉과 김구는 필생의 숙적이자 라이벌이 되었다. 오늘날 김구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법통을 이어준 임정의 주석이자 뛰어난 인격자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저작들을 통해 내가 알게된 김구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 또한 간과할 수 없이 많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류를 임정에서만 찾고 그 밖의 독립운동단체는 모두 부정하는 통에(북한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일성 휘하의 만주빨치산부대에서만 독립운동과 인공의 정통성을 찾는다) 그 임정의 지도자였던 김구만을 미화하고 떠받들다 보니 김구의 진면목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어쨌든 김구는 김원봉이 하는 일에는 모두 완강히 반대만 하였고 '민족대동단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산주의와의 모든 종류의 연합을 거부하였다.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42년 조선의용군의 젊은 천재 '김학무'는 황하를 건너 공산당지구로 들어가 팔로군과 연합한 조선의용군의 정치지도원이었다. 당시 연안 팔로군의 포병학교 교장이자 포병사령관이었던 조선인 무정장군은 중국공산당상부의 밀명을 받아 독자적인 조선인부대 의용군을 중공의 휘하에 두려고 당시 의용군의 실력자였던 최창익과 김두봉 등을 핍박하고 갖은 모략으로 의용군탈취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에 의용군의 사분오열을 걱정한 김학무는 당시 연안에서 중경까지의 만리길을 마다 않고 김구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에게 분열에 빠진 의용군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김구는 그 모든 요구를 묵살했고 결국 재중국의 유일한 조선인부대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해방전의 이러한 김구의 태도에 비한다면 해방후 그가 그토록 남북연합을 강조한 것은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왜 좀 더 일찍 태도를 바꾸고 좌파와의 연합을 서두르지 않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실로 나는 많은 것들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왜 그 지독하고 위험했던 항일시기를 견뎌내었던 혁명가들이 해방후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어처구니 없이 죽어갔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의열단의 의백으로서 늘 일경의 체포대상 1호였던 김원봉은 27년 간의 피나는 항일기간 동안 단 한번도 일경에 피체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신출귀몰하였고 같은 의열단원들끼리도 그가 당장 오늘밤 어디서 자는지를 아무도 알지못했다고) 하지만 그는 해방정국에서 친일파악질경찰 노덕술에게 잡혀서 뺨까지 맞았으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구의 사주를 받고 한밤중 들이닥친 김두한에게 큰 곤욕을 치루고 친구를 찾아가 3일 밤낮을 운뒤 머리를 삭발하고 38선을 건너기도 했다. 정통의 극좌파 공산주의자(박헌영, 김산류의)가 아닌 언제나 민족의 화합과 민중의 이익에 헌신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인 그에게 해방후의 분열상황과 그로 인한 테러위협은 그로 하여금 북행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민족의 큰별과도 같았으며 해방직후 김구나 이승만보다도 대중의 지지를 더 받았던 여운형은 20여 차례의 테러위협 끝에 결국은 한 극우 청년에게 피살되었다. 김구 또한 1932년의 윤봉길의거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악에받친 일경에게 쫓겨다닐때도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중국친구들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해방정국에서 같은 민족에게 쓸쓸히 살해된 것이다.

 이밖에도 남로당의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이관술 같은 탁월한 민중의 지도자들까지도 일제시대의 혹독한 감옥에서도 살아남았건만 해방 후 같은 민족에 의해서 쓸쓸히 죽어갔다. 왜 우리는 화합하지 못하고, 통일 또한 이뤄내지 못했는가... 통일을 위해 죄악적인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결국은 각자의 밥그릇을 보존키 위해 상대의 영역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더러운 타협을 보고야 말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헐벗은 민중을 안타까이 여기고 민족의 좌우연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김원봉같은 이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이 책에서 제시해주는 바에 따라 김원봉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매우 현실적인 정치감각을 가진 실리적인 진보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시대 백 아니면 흑, 공산주의 아니면 민족주의 하는 식의 극단적인 구분틀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1927년 당시 장개석의 4.12 쿠데타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김원봉은 같은해 8월 1일 강서성 남창봉기에 참여한다. 그 유명한 남창봉기는 하룡이 일으키고 그 하룡부대를 진압하라고 파견된 주덕군이 이에 호응하였지만 결국 공산당 역사상 가장 뼈아픈 학살의 현장이 되고 만다. 이때 하룡군에 있었던 김원봉은 극적으로 또 한번 살아남게 되었지만 그를 따라나선 의열단원들은 거개가 희생당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배에서 김원봉은 남의 나라 혁명에 조선혁명자들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뼈아픈 진실을 깨달았으며 의열단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무거운 중책도 실감하게 된다.

 이어 그는 해방을 맞아 중국을 떠날때까지 중국의 혁명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좌와 우의 한 중간에서 필요에 따라 장개석을 이용하기도 하고 중공을 이용하기도 하며 독립운동을 꾸려나갔다. 이는 같은 시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하여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부에 가입시키던 김산(장지학)의 부끄러운 행보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밝혀진 장지학의 행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극좌파의 그것이었으며 실제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그가 관여한 바는 매우 미미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의 나라 땅에서 한 명의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며 코민테른(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갖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원봉은 그것을 해내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아닌 민족의 독립과 혁명에의 길을 올곧게 걸어간 비정통의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나는 얼마전 KBS의 [영상실록]과 [인물현대사]라는 프로에서 낡은 흑백필름 속의 김원봉을 보았다. 1947년의 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대중연설회였는데 화면 속의 김원봉은 정말 멋있었다. 카메라가 다가오자 자기 연설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박헌영과 여운형은 멋적어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바빴다.(그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쑥스러운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말쑥한 양복차림의 김원봉은 담배 연기를 뿜어 올리며 카메라의 렌즈를 큰 눈으로 날카롭게 응시하였다. 그 눈은 근 30여 년을 항일혁명가로 살아온 한 양심적 선각자의 정직한 눈빛 그 자체였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미국과 소련같은 강대국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민족의 변혁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애쓰는 정직한 '직업적 혁명가'(그는 언제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의 고단하지만 좌절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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