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손녀딸의 부엌에서 글쓰기
차유진 지음.그림.사진 / 모요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부엌, 하고 발음하면 입가에 따뜻함이 번지는 것 같다
더 이상 집안에 불을 피우지 않게 된 현대생활에서 유일하게 진짜 ‘불’이 남아있는 공간이 부엌이라서일까. 아니면 부엌이란 장소가 대개 ‘엄마’의 공간이기 때문일까.
힘들고 지쳤던 어느 저녁,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을 때 온 집안에 가득하던 밥 뜸드는 냄새.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다정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런 냄새. 마법같았던 순간.
책 속에 나왔던 그런 순간들을 불러다 앞에 펼쳐주는 것 같았다. 이 책은.
빨간색 세계어린이명작동화 전집에 있었던 <매부리코 난장이>부터, 비슷한 연배라면 누구나 기억할 <위그든씨의 사탕가게>, 나 역시 특히 좋아해서 몇 번이고 그 음식들을 상상했던 <그리스 로마신화> 속 바우키스와 필레몬 이야기 같은 것들.
읽고 나서는 나도 수다떨듯 말하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했던 책 속의 그런 장면들을.
초원의 집 시리즈 <큰 숲 작은집>에 나오던 버터만드는 장면.
“이윽고 엄마가 나무 뚜껑을 열자 우유 속에는 금빛 덩어리의 버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엄마는 나무 주걱으로 그 덩어리를 건져내어 나무그릇에 담아 찬 물로 여러번 씻었다.......그 다음이 버터 만들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차례다. 엄마는 주걱으로 버터틀에 버터를 가득채워넣었다. 그리고 접시 위에 뒤집어 놓고 밑바닥에 붙은 손잡이를 힘껏 눌렀다. 조그맣고 단단한 버터가 딸기 알맹이와 잎사귀 모양으로 찍혀나왔다.....일이 끝나자 엄마는 두 아이에게 맛있고 신선한 버터우유를 한 잔씩 주었다”
딸기모양이 새겨진 버터라니, 신선한 버터우유란 건 또 뭘까. 어린 시절 무수히도 상상했던 그 장면을 얼마전 집에서도 따라해보았다. 생크림을 하나 사서 5살 꼬마에게 전동거품기를 돌리게 했다. 오래 기다리니 정말 하얀 덩어리가 분리되고 멀건한 우유가 남았다. 예쁜 딸기모양 틀은 없었지만, 동그란 통에 흰 버터를 담고, 남은 우유를 (이게 버터우유이겠지) 맛보았다. 책에 씌인 것처럼 신선하고, 그리고 고소했다. 나도 그 우유를 열심히 거품기를 잡아준 5살 꼬마에게 주었다. 뭐 이런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 주변 사람들은 궁상스럽다고 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홈메이드 코티지 치즈 만드는 법을 적어놓은 손녀딸은 공감해줄 것만 같았다.
손녀딸이 좋아했다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이야기를 읽고선 <빨강머리 앤>의 진통제 들어간 케이크도 좋아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고,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에 나오는 ‘무어야 할머니’의 아이스크림을 아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했던 <검둥이 삼보> 이야기에서는 손녀딸의 어깨를 탁, 치며 둥그런 노란 도넛모양이 되었던 호랑이버터 그림이 내게도 생생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요즘 나오는 일본동화책 <바무와 게로> 시리즈에 나오는 도너츠와 팬케이크도 한 번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집에 있는 부엉이> 책에 나오는 ‘눈물차’ 이야기도, 왠지 그 이야기를 읽고 쓴 것일 것 같다고 혼자서 추측하고마는, 장이지 시인의 <안국동 울음상점> 같은 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웨딩케이크' 이야기가 나올 때는 웬지 '퀸틴 블레이크'의<내가 가장 슬플 때>에 나오는 생일케이크와 촛불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말하는 건 사실 조심스러운 일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야, 라고 아무에게나 권하기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아 말해둔다.
읽고 나서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 책,
끼어들어 참견하고 나도, 나도, 손들고 말을 보태고 싶은 책은 참 오랜만이었다고.
그래서 무척 즐거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