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생각 세계사 시인선 124
이규리 지음 / 세계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저 여자 내 생을 설명하는 거라면

누군가 그 아래 의자를 놓아주지 않을까


[……]

서서 죽는 꿈

어찌해도 저 生은

의자가 없었다

비명조차 잘라먹은,

                    ―「마네킹」 중에서


이 시집에서는 욕구와 같은 주체가 많이 발견된다. 마네킹은 그런 시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 생은 사회에 원인이 있는 것인가? 시인 자신에 대한 문제의식도 그렇다 치겠지만,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사랑의 변질에도 원인이 있는 듯하다.


한데 쏟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농심라면이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과

식은 국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은 이제 가라

[……]

복제된 사랑 안에서 오늘 누가 울고 있나

추억도 나날이 소비되는 것

[……] 

쇼핑백 속 훌쩍거리는 비애덩어리들

[……]

대량 생산된 코카콜라처럼 마셨던

여름이 있을 뿐

                      ―「앤디 워홀의 생각」


「앤디 워홀의 생각」은 사랑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고 있다. 과학문명이 이 사회를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대량 생산’ 된 코카콜라와 농심라면은 불어터져―즉 붓기와 허세만 가득한―이 세상이 사랑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현대문명을 말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추억은 나날이 소비된다. 이런 세상에서 일그러지거나 불량이 되어버린 추억이 없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허기를 채우려고 라면을 먹지만, 밤에 먹는 라면은 얼굴을 붓게 만든다.


아주 조금씩 울고 가는 아이도 있다

저쪽은 이제 내가 잊어야 하는 곳

내 몸은 너무 커서 자전거 바퀴나 유리지붕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하는 놀이는 그림자를 옮기는 일

                    ―「그림자 놀이」중에서


그의 추억은 불량이다. ‘아주 조금씩 울고 가야 하는 아이’에서 보듯, 이 세상은 울고 싶은 것을 다 울어버리자면 그 울음이 그칠 날이 없다. 그의 사랑은 성숙하여서 ‘자전거 바퀴’나 ‘유리지붕’으로 들어가는 등, 천진성을 상실하고 있다. 무거워져서 그 흔한 ‘그림자를 옮기는 것’이 그의 놀이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무거워진 시인은 아직도 울고 있다.


꽉 조인 하루가 있어요 그대는 내게 소화불량이거나 체지방이에요 [……] 그리움이 막 조여와요 그건 썩지 않는다 말하지 말아요 허연 콜레스테롤 같은 시간 도려내고, 내 흰 뼈와 살들만 남길 거예요

                      ―「코르셋」 중에서


시인은 다 자란 사람이다. 꽉 조이는 코르셋 같은 세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의 하루는 꽉 조여 있으며, 그것은 소화불량이라고 느끼며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움은 썩지 않는 것을 안다. 시인은 그것을 벗겨 내려고 용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것인가? 벗겨 내려면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추억은 껌 같아서 무조건 긁개를 들고 눈을 감고 죽어라 긁어내면 긁히지 않는 것이다.


상처는 아물어 갈 때 자꾸 가렵다고 한다

[……]

나는 저 상처의 무게를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던 허세를 안다

어디가 가려운 것은 부끄러움을 보는

다른 증세이다

[……]

긁어 덧나지 않게 나를 견디는 일

                      ―「가려움증」 중에서


시인은 이 통증이 ‘가려움’ 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간섭해서 생긴 상처일 수도 있고,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은 애초에 뭐라고 했던가? ‘상처는 아물어 갈 때 가렵다’고 했다. 이미 시인은 아픔에 대한 고찰이 끝나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아문 상처를 뚫고 나오는 연둣빛 잎사귀

망설이던 등을 낯선 시간이 밀어주었다

                      ― 위와 같은 시


이미 시인은 기나긴 시간에 의해 치유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뚫고 나갈 자신은 없고, 주저주저― 시인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인 듯하다. 이 시도 똑같은 맥락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일찍부터 공허를 품고 다닌 게 아닐까.


[……]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 「재촉하다」 중에서



이미 꽃이 되어 있는 자신을 각성하지만, 나는 일찍부터 공허를 품고 있었다. 그 공허를 버리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