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문학과지성 시인선 283
조용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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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일만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를 보고 그냥 덮어버리고 말았다. 왜 이렇게 어두운 것이야! 하면서…. 그러다가 공부 같이 하는 선생님 말씀 듣고 다시 펴보게 되었는데… 일단 깊이가 무지막지했다. 좋은 시였다. 두 시집이 모두 어둡다는 점만 뺀다면….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그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이 시집의 기조는 근본적으로 죽음이라고 되어있다. 그런 이유로 시들은 대체로 어두웠고, 활기보다는 깊이를 봐야 했다. 깊이는 무지막지했다. 어려운 시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죽은 듯한 나날들,

밖으로 신음 소리를 내본다

삶이 한 음계 더 낮아진다

낙우송 잎들이 깃털을 날리며

오래 떨어져 내린다

[……]

먼지를 뒤집어쓰고 허옇게 서 있는

도로변의 나무들

저 치욕을 어떻게 견딜까

                                        ―「음계」에서


나무가 밖으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음계다. 시작을 ‘죽을 듯한 나날들’로 했으므로 전제는 말그대로 죽을 것 같은 모습이다. 신음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삶들, 깃털이 오래 떨어져 내린다. 살고 싶지 않은가? 엄청나게 힘든 삶이지만, 살고 싶다, 한 번 질러보지 않은 적은 없을 것이다. 시인의 인식에 의하면 고뇌스런 삶은 치욕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먼지가 내려와 그들을 덮는다. 은행나무와 낙우송을 똑같은 것으로 본다면(억지겠지만) 나무에겐 삶 자체가 치욕이다. 고로, 시인은 삶을 암담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새는 여덟 겹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

녹슨 쇳덩어리 같은 커다란 돌은 여덟 번의 허물을 벗고 나서야

작고 단단한 검은 알맹이가 되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만이 아니다


부화석은 까만 알을 품고 있다

알의 어미는 화산 활동이 일어나던 때부터의 시간이다

하지만 부화를 돕는 것은 어미의 부리가 아니라

이 정체 모를 이상한 녹슨 돌덩어리를

바위에 대고 깨뜨리고 있는 사람이다


까만 알이 나올 때까지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는 사람의 호기심이다

검은 알 옆에 가득 쌓인 부스러진 돌의 껍질들,

햇빛을 영영 보지 못할 부화석의 알들이

벼랑의 바위틈이나 비탈에 숨어 있다


천년만년 알을 품고 있어도 썩지 않는,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아도 죽지 않는

기다림만이 시간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한 겹 더 껍질을 입는

내가 꺼내지 못할 검은 알들

                                        ―「부화석」전문


재 묻은 돌에서 이런 상상을 한 것이 놀랍다. 새는 8번의 허물을 벗고 나왔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새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알의 어미는 화산 활동이 일어날 때부터의 시간, 즉 모든 생명이 시작될 때의 시간을 연상시킬 때 태어났다. 그의 부화를 돕는 것은, 인간의 호기심을 가진 뒤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바위에 깨뜨린다, 는 사실은 ‘인간이 지각을 가진 뒤에 시작되었으므로’ 그것은 인간이 생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가까이에서 깨뜨리고 부딪쳐 보며 사람, 즉 生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돌은 벼랑이나 바위틈, 비탈에 숨어 있다. 생은 어려운 곳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꺼내지 못할 검은 알들’이라는 말 속에서 시인은 알을 꺼낼 수 없다, 는 것을 알고 만다. 도대체, 이 시인은 왜 이러느냐? (진이정처럼)세상 다 산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어째서 그럴까, 이 시에서는 원인을 설명해주고 있다.


비는 다 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窓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투처럼 위태로운 것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에서


시인은 격무에 시달리는(이든 아니든 아주 피로한) 사람인 것 같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임을 꿈속에서 안다. 살고 싶다, 일어서서 일하고 싶다, 는 그녀의 의지는 비도 일어서 있다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손톱사이로 드러난 살을 ‘누런 삼베옷’이라고 말했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명료한 삶은 얇은 비닐봉투처럼 위태롭단다. 그는 한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말,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그녀의 근황을 모른다- 아마 시인들은 거짓말이 많다고 들었다. 그렇길 바란다.)


스물일곱 李賀

스물여덟 李箱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폭풍처럼 찾아오는

이른 죽음을


일찍이

魂과 魄이 하나 된

이른

변신을


종유석처럼 고독한 뼈를

가슴 한가운데 심어놓고

키우던 사람들


그들의 自畵像을

내 등 뒤의 거울로 비추어보던 시간들

멀지 않은데

                                        ―「이하리를 지나며」에서


이번엔 이상과 이하다. 아마 시인은 그들을 닮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혼과 백이 하나 된 이른 변신’이라고 말한다. ‘종유석처럼 고독한 뼈’는 아마도 「부화석」과 상관이 있는 것 같다. 그들도 삶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는 게으르지 않았을 터…. 이상이 자신의 삶을 고찰하며 썼다는 「終生記」를 시인도 쓰고 있다.


살아도 살아도 고통은 새록새록 새로웠다

나뭇잎 말라비틀어져도

치욕은 파릇파릇 잎을 틔웠다

이제

이른 봄에 돋아나는 새싹 같은 그것들을

데리고 간다

                                        ―「終生記」에서


「음계」를 풀어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치욕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시인이 그것에 애태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이지 않았던 죽음은,

기억하지 말아다오

살아서 단 한 번도 나의 것일 수 없었던

모든 그리운 것들의 거처를

                                        ― 전과 같은 시 끝행.

생이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욕이었고, 죽음마저도 시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슬퍼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것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그녀는 사로잡혀 있다.


정약대는 대금의 명인이다


정약대는 낙타가 아니다 10년을 한결같이 매일 인왕산에 올랐다 도드리를 한 번 불 때마다 나막신에 모래를 한 알씩 넣었다 신에 모래가 가득 차야 산을 내려왔다


어느 날 나막신에 쌓인 모래 속에서 풀잎이 솟아올랐다


풀잎! 모래알 하나가 觀音을 한 것인지 得音을 한 것인지 바람이 지나가는 듯하기도 하고 비가 스치는 듯도 한 그의 대금 소리에 마른 모래알에서 자꾸 풀잎이 돋아났다


약대라니…… 낙타처럼 먼 길 위에서 대금을 연주했구나


청아하고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향해 대금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할 운명을 火印처럼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그의 귀는 10리 밖에서도 대금 소리를 잡아냈을까


정약대는 낙타였다

                                        ―「정약대의 대금」전문


시인은 정약대라는 대금 연주자에게서 그의 이름에서 언어유희를 하는 듯, 낙타가 아니다 맞다 장난하는 식으로 보이지만, 결국 또 하나의 삶의 의미를 도출해내고 있다. 처음에 시인은 정약대가 낙타 같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끝내 시인은 그가 낙타라고 인정하고 만다. 그의 삶, 혹은 모든 사람의 삶이 사막을 건너는 낙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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