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245
고창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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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서울역 철도문고에 남아 있는 이 책을 보고서다. 한번 그냥 살짝 훑어보고 괜찮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의 생활을 알 수 없으나, 사서 본 그의 시들은 음울하고, 답답했다. 다분히 감상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떠돌아다닌다는 이미지가 많아서일까, 바람이 상당수의 시 중 시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쩌면 가파르게 지나쳐왔을 삶

밭은기침을 쿨럭이며

사내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망망한 것이 저 바다뿐일까

사내가 두 손 가득 얼굴을 묻는다

                        ―「6시 10분 버스」 중에서


밭은기침을 쿨럭이는 사내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망망한 바다를 한탄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자신의 약한 모습이 괴로워서일까. 시들은 대체로 밝음으로의 반전보다는 참담한 도시인들의 심경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바람이 많다고 말했듯이, 그는 이 도시를 끌고 가지 못한다. 이들 시에는 도시에 질질 끌려가는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다. 하지만 그는 벗어나려 하고 있다. 맨 끝에 있는 「疑視」라는 시를 보면,


늘어진 나무 사이

좁은 길들이 꿈틀거린다

긴 그림자들이 끌고 가는 거리

                        ―「疑視」 중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끌고 가는 거리, 좋은 표현임을 넘어서, 자신이 아무리 음울한 세계를 보며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아무리 자기 자신의 자신이 이 시대를 끌고 가는구나, 생각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좋다고 하겠다. 하지만 제목이 「疑視」, 즉 ‘의심하며 보다’라는 뜻이기에 자신이 그것이 맞는가를 파악 못하는 것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는 시대적으로 분명히 거대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침침하고 음울한 시대상만 그려오던 그의 시적 의미는 맨 끝에서 재빨리 반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둡다. 그의 의심은 시집 내에 아주 짙다.


누군가 산길을 걷는다 재빨리 지워지는

슬픔의 단서, 우기의 한낮은 검은 장막과 같다

사람들은 느릿느릿 물렁거리는 어둠 속을 빠져나온다

공원의 길들이 지상에서 떠다닌다

젖은 날개를 품고 그들은 중얼거린다

빗소리처럼 뒤섞인 알 수 없는 문장들이 쏟아져

내린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雨期」 중에서


날개는 ‘젖어’ 있다. 추억은 무겁기만 하고, 슬픔의 단서는 지워졌으나, 사람들은 물렁거리는 어둠속을 방금 빠져나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젖은 날개를 달고 중얼거린다. 그들은 날개를 달고 있다. 구름만 걷힌다면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껀덕지는 많으나, 시인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의심이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는?


내 삶의 가벼움과

더러워진 발자국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왜 침묵만이 오래 기억되는지

저 스위치는 알고 있다


[……]

숨쉬지 않는 기억은

말라버린 무성한 뿌리를 갖고 있다

                        ―「스위치는 알고 있다」 중에서


시인에게 삶은 가볍고 길은 더럽다. ‘몹쓸 꿈의 조각’은 발자국 없이 떠돌아다닌다. 즉 추억은 낭비된다. 결국 숨 쉬지 않는 기억은 뿌리가 말라 무성하기만 할 뿐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이유로 시인은 삶을 쉽게 신용할 수 없는 탓으로 의심하게 된 것이다.


어린 나무들의 근심 어린 눈빛을 세상은 함부로 잊곤 하지만 굳은 흙은 상처에 민감한 법,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이빨로도 들추지 못할 內省의 시절이 있는 것이다

                        ―「흙」 중에서


하지만, 그의 추억은 현대문명이 들추어낸 일견 ‘포크레인’으로 상징되는 물건으로도 들춰지지 않는다. ‘흙’ 즉 시인 자신에게는 그 기억에 대한 심각한 내성이 있다. 버리고자 해도 버려지지 않는 심각한 열병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다.


먼 훗날, 손풍금을 울려본다면

황성 옛터나 번지 없는 주막이 스며나오고

사내의 목쉰 삶도 구구절절 배어나올 것이다

                        ―「손풍금」 중에서


결국 사내의 목쉰 삶이 우리 모두의 삶과 이퀄이 아닌지, 이 삶을 끊임없이 반성해 봐야 할 일이다. 손풍금 아니라, 어쩌다가 리코더를 꺼내들어 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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