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65
김명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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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나는 이 말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설에 나온 말 그대로, (아니 인생 자체가 설명하듯, 모든 생에(아니 무생물조차도) 허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다른 방식의 허무를 그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내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시집 자체는 불멸보다는 허무에 가깝다.

농협 공판장 앞 차부엔 사람이 안 보이고
무대리 오르는 마을버스는 텅텅 비었다
오래전 문 닫은 정미소집
[ ……]

누군가 미끄러진 물웅덩이에
나 또한 기어코 발 헛딛고 미끄러진다

빗줄기가 휘어잡은 고요의 뿌리가
거듭 파헤쳐진 물웅덩이가

길고 긴 고랑을 이루면서 흘러내린다

                                     ―「강물이 시작하는 곳」 중에서

「홍유릉 日氣 」연작 등 많은 작품들 에서도 그 말은 유효하다.  그의 시는 쓸쓸하며, 서정적이다.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 「목련」등 일부 작품에서는 활기차기도 한 방향으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표제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는 곤충들의 꾸준한 노동에서 불멸의 샘을 추출하고 있다.

앗!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은둔하는 하루살이들이 개미 떼들이
바위 속을 온통 하얗게 누비고 있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바위 속으로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널찍한 신작로를 내는 일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들의 대지에
또 한 그루 망개나무를 심는 일
해 넘어가기 전에 불멸의 식탁을 마련하는 일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중에서

해 넘어가기 전을 준비하고, 봄이 가기 전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음을 불멸의 샘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불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의 행동엔 언제든 '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곤충들의 행동을 보자면 '愚公移山' 이라는 느낌이다. 뚜정뚜정 순리대로 살아가는 곤충과 식물들, 하지만 이것은 거시적으로 보면 불멸이 아닌 것이 된다. 무엇이 끝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사람들이 그냥 보자면, 너무나 '모범적'인 생활방식으로 여겨지며, 싱겁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타이트한 인생을 말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이겨내는 방안은 바로 사랑이다.

꽃바람 드센 어느 해 봄날
절집의 뒤꼍에서
아무도 모르게 어린 내 입으로
떠넘겨주시던, 할머니의 肉饍!
그토록 질긴 사랑의 힘으로 나 지금 여기 서 있다
어떤 거센 바람도 절명의 사랑 속으로는
몰아치지 못한다 
                                     ―「淸明」
중에서

그 사랑의 힘과, 끝이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더 치열하게 불타오르는 인생의 굵기 모르는 테이프들의 접붙임으로, 불멸이 된다고 나는 이 시집을 한마디로 정의하고 싶다. 전체적으로 시는 좋다. 어렵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음에 든 시 하나...

터진 피부에 스며오는 저 얇은 북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한 생애의 마지막 굽이가 쳐들어가서
얼어붙은 강물의 잔잔한 속주름을
마저 부풀리는 사이
우리들 양껏 먹고도 남은,
졸아붙은 찌개냄비 속의 이 묘한 비릿한 냄새
뼈마디 앙상한 미루나무 속엣가지를 부러뜨리며
잘못 들은 귀울음인 듯
북소리 차츰 멀어져가고
한 사람의 주검을 사무치게 떠받치려는
오 아직 여기까지는 몰려오지 않는 저 희미한 눈발
                                     ―「팔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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