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란 무엇인가
정용섭 지음 / 홍성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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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비평으로 유명한 정용섭의 책이다.

그때까진 그냥 막연히 가장 존경하던 분의 설교를

까니깐 그게 싫었다. 그 싫음이 고대로 정용섭에게 이어졌다.

지금은 아니지만

편입을 하기로 결심하고

ㅇ 대학과 ㄷ 대학을 고민했는데 

ㅇ대학은 정용섭 목사가 있었다. 머 그것 때문에 안 간건 아니지만

어쨌든 거부감은 있었다. 


그러나 정용섭에 대해 알아가니 대가는 대가더라. 

그 대가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Ⅰ. 느낀 점 


 끊임없이 저자는 텍스트의 세계로 빠지라고 강조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를 샅샅이 살피며 설교에 대해 이야기해 나간다.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는 익히 알고 있지만

예화 과잉, 감상주의, 도덕주의, 기복주의, 지나친 정치적 색깔 보이기, 역사 허무주의, 성속 이원론, 가부장주의, 성서 문자주의, 반지성주의 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정용섭은 끊임없이 텍스트의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설교자들이 우선 "성서의 놀라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성서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 텍스트 안에, 그 성서 언어 안에 무엇이 존재한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계시다. 그런데 그 계시는 이 세상의 역사와 긴밀히 결속되어 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면 설교자는 늘 성서의 변죽만 울리고, 값싼 은총론에 떨어지거나 도덕군자연하고, 결국 그런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성서는 도구화되고 말 것이다. (p. 102-3)


다시 강조하지만 설교는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텔링 등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아니라 그 내용이 근본이다. 설교의 내용이어야 할 하나님을 알면, 즉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청중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찾아서 전하게 될 것이다. (p. 124)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점에서 공감되고 얻은 점도 많았다.

그리고 나름 이 부분은 조금 아니라는 부분을 보기도 했다. 

느낌은 들었지만 나의 성서학의 지식으로는 그걸 반박할 내용은 없었다. 

찜찜함을 남겨두고 나중에 주석을 찾아보거나 해야지 마음 먹었다. 

그 내용은 바로 여호수아에 관한 내용이었다.(p. 106-8)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 너무 어떤 전제를 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생명 존중의 관점으로 성서를 읽으니 여호수아의 학살 같은 경우는

성서 기자의 의도보다는 그것을 지워버리고 본인의 의사를 투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부분을 김회권이 정확하고도 근거 있게 지적하는 것이다.(p. 273) 

아! 이런 부분에서 내공의 차이를 느낀다.


그래도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았기에 좋은 책이였다!



. 메모

 



 예컨데 같이 산다 갈라선다 하는 부부가 주일 아침에 생태학적인 설교를 듣는다면 어떻게 귀를 기울이겠는가 말이다. 청중과 설교자의 주파수가 다르다 보면 내용이 아무리 충실해도 무의미한 설교가 될 수밖에 없다.( p.84)

-고민이다, 고민. 


그런데 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소리를 내서 말씀하신 것처럼 묘사한 것일까?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성서 기자들은 시인과 같다. 그들은 절대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다...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이다. 성서 기자들의 그 경험을 따라가는 것이 성서를 읽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p.144-5)

-글쎄? 요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도 이런 절대적인 체험이라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는 성서의 기자들이 직접 소리를 내서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정말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입과 성대 없이도 말할 수 있지 않으실까. 이 역시 나의 믿음이다. 나는 보수적이다!허허


<겨울연가>의 배용준을 죽고 못 살듯이 따라다니며 '은혜를 받는' 일본 중년 여성들 역시 비슷하다.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현상만 놓고 성령이 주도하는 설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p. 177)

-공감. 같은 차원인데 그리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앙의 강화냐, 신앙의 심화냐 (p.178)

-우와!

 

일종의 심리적 대중 치료라 할 이런 열광주의를 기독교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난 월드컵 때 수많은 붉은 안마들이 경기장과 대도시 광장에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열광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과 별 차이가 없다. (p. 193)

-맞아! 이 차이. 감동의 은혜라면 영화에서도 문학에서도받는다. 이 차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 책 속 中


그렇다. 설교자 앞에 놓인 성서는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특히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야말로 오늘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의 능력이다. 설교자들은 이렇게 엄청난 세계를 청중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 p.21)


우리는 나름 진지하게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코미디처럼 보인다면 선교적 차원에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는 당연히 물질 만능주의, 성공 지향주의 같은 이 시대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맞서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흔히 나타나는 기본적인 세계관의 오류에 있다. 영육 이원론, 성속 이원론, 레드 콤플렉스,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 역사 허무주의 등등이 선교 행위와 말씀 선포에 노출되는 경우가 한두 번이겠는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이후에도 천동설에 집찹하거나 다윈 이후에도 진화론을 무조건 배척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다. (p. 101)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역사적 산물이다. 성서 형성에 관계된 개인이나 민족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안에서 살았고, 그 세상에 직면했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대답을 찾았다. 말하자면 성서에는 역사와 세계가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와 세계를 읽을 줄 모르면 성서는 죽은 문서가 될 수도 있다. (p. 102)


첫째, 청중이 목사의 설교에서 영적인 자극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교 자체에 관심도 없다. 청중은 설교보다는 주말 드라마에서 훨씬 재미를 느끼고 있으며,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가대의 찬양이나 광고에 관심이 더 많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연인들이 부모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운명과 같다. 이건 강단의 위기다. (p. 115)


그 위기의 본질은 설득 기술 차원에서 설교에 접근한다는 사실에 있다. (p. 116)


좁은 의미로 문학, 역사, 철학을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모든 인식론적 노력을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 해석학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수도원 영성과 신학적 사유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p. 141)


성서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을 신뢰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이런 긴장에서 손쉽게 벗어나려 요령을 피우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가슴에 안은 채 종말의 불빛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길을 갈 것이다. 이 도상에서 인문학적 통찰은 길벗이 되어 줄 것이다. (p. 142)


예배 참석, 철야 기도회, 헌금, 봉사, 성서 공부와 성서 쓰기 등등 신앙 생활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행위가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 종교 행위를 익숙하고 세련되게 하는 능력을 신앙이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 그런 능력 자체에서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종교 행위가 신앙의 강화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증거다. 장로 선출 문제, 평신도의 위계질서, 헌금 제도 등등 거의 모든 교회 조직과 프로그램이 신앙 강화의 수단으로 제공된다. 어떤 교회는 제직들을 특별 새벽 기도회에 나오도록 독려하려고 출석부를 만든다는데, 이런 기발한 발상은 종교 생활의 외적인 강화만 강조할 때 나온다. (p. 179)


구원론적인 설교가 무엇인지 한두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설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도대체 살린다는 게 무엇인가. '산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인가? 삶 또는 생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구원론적인 설교와 연관되는데, 결국 구원론적인 설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직결된다. 성서와 신학에서 생명은 영의 문제다. (p. 208)


그렇다. 단순한 윤리. 도덕교범, 인생철학에 관한 설교가 아니라 내 존재를 화염으로 불사를, 인간의 모든 프로그램과 설계도를 뛰어넘는, 궁극적으로 언어까지 뛰어넘는 하나님의 카봇을 전하는 설교를 듣고 싶다. 그런 설교 앞에서 내 영혼은 충격을 받을 것이며, 겸손하게 무릎 꿇고 진정으로 영광의 찬양을 올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은, 더 나아가 예배와 설교는 근본적으로 송영이다.

...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 행위인 생명의 신비가 오늘날 구체적인 노동 현장과 가정생활, 정치, 경제 및 국제 정세를 비롯해서 청중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는 훨씬 많은 과정을 통해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인 신학을 공부해야 하며, 오늘의 삶을 해석하는 인문학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은밀한 중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기도는 이 모든 것의 토대다. (p. 218-9)


교회가 나서기보다는 그들을 돕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다. 물리학은 그들 전문가들이 맡아서 할 일이지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목사는 모든 일에 나서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만큼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서 텍스트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버거운 과업이며,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치열하게 투쟁하고 참여해 온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과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오늘 교회 안에 살려 내는 일만 해도 숨 가쁘다. (p. 230)


거의 모든 설교에서 나는 질문을 한다. 위 설교도 질문으로 이어졌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송영을 불렀는가? 그 송영이 말하는 존귀와 영광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설교자는 청중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p.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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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설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리처드 H. 콕스 지음, 김창훈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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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들어 뇌과학에 대한 성과가 엄청나게 나오고 있단다. 

더구나 '자유의지'는 없다는 그들의 주장에 

신학이나 철학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몇 년 전 들었던 정재승의 강의나 얼마 전 들었던 김대식의 강의나

뇌 과학의 강의는 너무 재미있었다.

고인공지능이 과연 가능할까. 

김대식은 50년 후였나? 30년 후였나? 

그때는 가능할 것이라 보던데. 

김대식은 고인공지능에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아무튼 그런 뇌과학의 성과를 듣고 있자니

이 책의 제목이 너무 땡겼다.   


Ⅰ. 느낀 점 


그런데 높은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읽고는 조금 실망을 했다. 

과학과 설교학의 어설픈 조화랄까. 

올해 설교의 관한 책 4권을 읽었지만 

그 중 가장 별로이긴 하다. 

설교에 대중에 뇌의 작용을 인식하기 보다는 

정용섭의 말처럼 텍스트에 깊이 빠져 설교하는 게 낫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의 논지에 그리 집중되지 못하고 대부분을 흘려 들었던 이유일지도. 


. 메모와 코멘트


p. 270페이지에 '확실히 목회적인(?) 책인 거 같다.'라는 문장만 있을 뿐 다른 문장은 없다. 

아마 후반부에 들어 목회자적인 성찰이 보여서 이렇게 적은 거 같다.


. 책 속 中


다음 주 설교와 관련된 서적들과 자료들에 끊임없이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그들과 다른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설교가 있는 예배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방법들을 파악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p. 71)


'말의 능력'이라는 어구는 말들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오래 된 지식으로부터 왔다. 설교자들에게 이 어구는 두 가지의 매우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 (1) 인간의 말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을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입에서 나온 말들은 그 말들을 받아들이는 귀에 이르게 될 때 의미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정으로 바뀌게 되고, 그 결정은 행동으로 옮겨진다. 물론 결정되는 모든 정보가 반드시 행동으로 바꾸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바꾸어지느냐 아니면 행동으로 바꾸어지지 않느냐의 차이는 대개 그 정보가 근거하고 있는 출처의 신뢰성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근거해서 메시지를 선포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이 된다. (p. 127-8)


설교란 이미 준비된 성도들의 뇌 속으로 정보를 소개하여 수락하도록 하든지 아니면 정신의 쓰레기 통 속으로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뇌는 청각의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자극을 거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은 뇌에 깊이 새겨지며 또한 이미 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지식의 창고에서 정보로 처리된다. 그래서 설교는 규칙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성도들의 머릿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는 것에 기초해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설교는 성도들의 감정적인 결단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p. 139)


아주 잘 준비되고 계획되어 실행된 설교는 성도들의 뇌가 어떻게 개념들이 전개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해서 지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준다...뇌는 계속해서 생각들을 정리하고, 들은 말씀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각자의 뇌가 가진 성향과 분석 능력에 따라서 들은 정보는 나름대로 질서 있게 분류하고 저장한다. (p.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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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5
김교신 지음, KIATS 엮음 / 홍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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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다. 이름이 멋있지 않은가? 

내가 김교신을 안건 고등학생 때였다. 

존경하는 분이 우치무라 간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기에

나도 우치무라 간조의 책 '구안록'을 하루, 단숨에 읽었다. 

물론 내용은 어려워 그냥 눈으로 따라간 경우다. 

그런 우치무라에게 제자들이 있었는데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이 있었다. 

 

이 세 분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그 잡지는 조와 사건을 통해 폐간 되었는데 

그 내용은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에 나온다. 

어찌나 전율을 느꼈던지. 

 

그 김교신의 글을 이번에 읽었다. 

사실 평전인 줄 알고 있었다.허허 


 

Ⅰ. 느낀 점 

 

이 책은 과연 80여 년 전에 쓰여진 책인가 싶었다.

'망하면 망하리라' 편과 '우찌무라 간조론에 답하여'에서 특히나 더했다. 

아니 내용 곳곳에 지금 들어도 생생할 정도의 외침이 들렸다.(p. 38-41, 82, 89, 139 등)  

그래서 메모를 남기고 코멘트를 적을 때 '지금도 통하는 말이다!' 연일 캄탄 했다. 

특히나 모 대학원에서 말도 안되는 사건이 터졌을 때 그 때나 지금이나...

남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연전에 조선 기독교인 105명의 옥사 당시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정의를 위하여, 조선 예수교회를 위하여 노력한 일이 있은 외에는 대체로 우치무라 선생은 조선 기독교와는 관계 영향이 전무합니다. 그 우치무라 선생을 향하여 '종교의 독재 제국 건설'이니 '조선 영계를 탐탐웅시(노려보고 위세를 보이면서 남을 대함)'하는 영적 제국주의 야심' 운운함은 너무도 사실을 왜곡한다고 하기보다도 군인이 군비에 관하여 신경과민한 것처럼 교회인이 교회 방비에 관하여 과도하게 신경이 쇠마하여진 병증으로 볼 수밖에 없을까 합니다.

'전도 데이', '전국총동원', '대거전도', '대거기행렬' 등의 문구나 선동은 일찍 한 번도 우치무라 선생께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 전도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대 기적을 행하려 말고, 오직 신명을 중히 하고, 그 말씀이면 다만 좇고, 신을 믿는 것이 곧 사업인 줄로 믿고, 무위에 유사한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신앙생애의 대부분은 인내다. 정숙이다. 그러므로 활동 비약을 사랑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하는 생애다. 그러나 이것이 신과 함께 걷는 생애다..... 아무런 사업을 일으킴이 없을지라도 감히 불만을 느끼지 않는 생애다. 또 신에게서 어떤 것도 받지 않을지라도 저 자신을 주셨으므로 그 외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생애다." (p. 137ㅡ9)

후반부에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왠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코멘트도 달지 않겠다. 

김교신의 글 그대로 읽어보자. 

 

Ⅱ. 책 속 中 

 

신앙생활이라 하여 복술자(점을 치는 사람)처럼 길흉화복을 예측하거나 특별한 청탁으로써 하나님의 총애를 편취(치우쳐 취함)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술이 아니라, 천도의 대도, 공의를 활보하는 생활입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써. (p.40-1)

 

그러므로 기독자는 단지 소극적 금욕주의자가 아니요, 또한 단순히 미래의 천당만을 동경하는 자도 아니요, 실로 현실 생활에서 위대한 욕구를 품고 맹렬히 진구(나아가 힘써 구함)하는 자이어야 하겠습니다. 병고에 신음하는 형제, 실직과 빈한에 공구(몹시 두려워함)하는 형제, 위대한 기도를 품고 시세의 불운을 단식하는 이들은 우선 한 번 모든 급박한 소원을 제쳐 놓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보지 않겠습니까. (p. 82)


지금은 설교로 또는 소위 문서전도로써 복음을 증거할 시대가 아니요, 신도의 전존재 그것으로써 입증하여야 할 때를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된 것은 그 학식과 문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실로 존재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금일 전도자는 무취무흔(냄새와 흔적이 없음)하여 팔방미인적인 문화인이 어찌 그리 많습니까. (p. 89-90)


그러나 저 자신에게는 50년 전 일본 청년들과 같은 고상한 야심이 주 동기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세속에 수흔(상처를 줌)한 전비를 씻고 다행히 후생에 극락세계에 입족하기를 애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사후 성불의 문제가 아니었고, 철두철미하게 현생의 문제만 생각하였습니다. 사후에 천사로 화하거나 혹은 지옥 열화 중에 태워지거나, 이런 것이 저의 심령의 오전(괴로움을 평정함)에 반거(근거를 잡고 굳게 지킴)한 가장 긴급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현재의 육체와 심정 이대로를 가지고서 현생에서 1일이라도 완전에 달성할까?' 이것이 저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p. 94)


저들은 허위 조작을 보고 듣고도 분내지 않고, 불의를 목도하면서도 노발할 줄 모르며, 억울한 일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구제할 마음이 발동하지 아니함으로써 도를 통했고 세석울 초탈한 까닭인 줄로 자긍합니다. (p. 102)


그러나 우리가 10년에 걸쳐 우치무라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경'이었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설령 우치무라 선생의 내심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심산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에 관한 왈가왈부의 변론을 당할 때는 우리는 대개 유구무언하니, 이는 우리가 전공한 부문이 아닌데 저편에서는 훨씬 열정적으로 공구(힘써 연구함)한 문제인 듯이 보이는 까닭입니다. (p. 114)


그러므로 교회 개혁 운운의 일절의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성서의 진리를 배우며 자신을 채찍질하여 그리스도의 족적을 따르려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래도 무교회주의라고 부르고 싶거든 부르십시오. (p. 114-5)


오늘날 우리 기독도의 앞에서 진리를 거역하는 역할을 메고 대립한 자는 심히 강대한 괴물입니다. 여호와를 경배하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만 바치고자 하는 무리는 모조리ㅡ교회의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할 시대를 당하였습니다. (p. 118)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모든 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 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기독보다 외인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회당을 중시하는 자의 집에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 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초부(나무꾼) 1인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상론(서로 의논함)하라. 동지를 1세기 후에 기약한들 무엇을 탄식하겠는가. (p. 168)

 

 모진 동결은 고통과 절망을 심각하게 하나 춘양의 기쁨을 절대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동상은 춘양의 부활을 확연히 하고자 하는 데 없을 수 없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확실히 임합니다.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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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동안 백만 마일 - 위대한 모험으로 떠나는 여정 천년 동안 백만 마일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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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낀 점

 

'아버지의 빈자리'는 먼가 약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마 그건 부재의 고통이 나에겐 부재했기 때문일거다. 

'아버지의 빈자리' 리뷰를 보면 꼭 이 책을 강추하더라. 

어느 날 밀러의 이 책이 손에 땡기길에 쭉쭉 읽어 나갔다. 

 

이 책은 이야기에 관한 책이다. 

나도 평소에 이야기에 대해서 그러니깐 네러티브!에 대해서 말한다. 

얼마 전 청년들이랑 놀러를 갔을 때도 이와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이런 요지였다. 

 

'이야기에는 배경(무대), 캐릭터,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임원 체제로는 온전히 이야기를 다 담아 낼 수 없다. 

사람은 조연이기 보다는 주연이길 바란다.

(물론 조연을 원하는 사람이 있지만 살아가는 시점에서는 모두 주연이다.)

그런데 임원체제에서 그러니깐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회계의 체제에서는 

주연과 조연의 짜임새가 좁아진다. 그 외의 인물들은 모두 조연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셀체제는 어떤가? 배경도 역할도 캐릭터도 모두 주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피어오른다. 

그것이 더해져 다른 셀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꽃핀다. 

그래서 더 큰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이야기를 잘 만들어가는 셀이 있는 가하면 그렇지 못하는 셀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하나의 큰 중심축에서 파장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작은 중심축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파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감을 느끼는게 더 쉽지 않을까.'

 

대충 이런 요지였다. 

 

그런데 도널드 밀러에게서 그런 통찰을 본다.

"영웅 역할을 연기하는 여자치고 자기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는 사람은 없지. 딸은 이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잠시 잊었던 것뿐이지." - p. 69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그 속에서 어떤게 변화되어지고 

이야기 되어지고 우리의 삶도 영화와 같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끝까지 알려준다. 

의미를 잃어버린 지금 사람들에게 

조근조근하게 또는 덤덤하게 그는 말한다. 

나는 그 조근과 덤덤이 참 좋다. 

 

. 메모

 

그런데 이제 문 안에 들어섰으니 어쩔 수 없이 살도 빼고 그녀와 부대껴야 되리라. 살이야 꼭 빼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비극이 될 것이다. 비극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드디어 내게 동기가 생겼다. 이튿날 나는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 (p. 125-6)  


-사건이(이야기) 인물을 변화시킨다. 


한번은 그에게 어떻게 사내들을 그렇게 결속시켰느냐고 물었더니, 카이는 남자들을 결속시키는 열쇠는 함께 목숨을 걸게 하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암벽 등반, 급류에서 카약 타기 같은 걸 말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 (p. 201)


-어디 남자들 뿐이랴. 어느 공동체 역시도 목숨까진 아니지만 함께 하는 공유된 기억이 우리를 결속 시키는 것 같다. 고로, 수련회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Ⅲ. 책 속 中

 

 가정에 이야기가 없다 보니 딸은 위험과 모험, 반항과 독립이 있는 이야기를 택한 것이다. "딸은 나쁜 아이가 아니야." 친구가 말했다. "그냥 그나마 제일 나은 이야기를 택한 것뿐이지."

 나는 그의 딸이 이를테면 삶의 채널들을 쭉 돌리다가 그 순간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야기, 자기에게 뭔가를 주는 이야기에 채널을 고정시키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사람들은 이야기 없이는, 연기할 역할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p. 67)

 

 라디오에서 어떤 여자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정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여자들이 대부분 현재의 상황 속으로, 그러니까 자기를 구타하는 남자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했다. 진행자가 이유를 묻자 그 여자의 말인즉, 대다수 여자들이 가족들에게 피할 수도 있고 자기를 받아 줄 친구들도 있음에도 구타하는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그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p. 116)

 

조던은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야기이지 발단의 사건이 아니라고 말했다. "발단의 사건은 인물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만드는 장치예요." 벤이 말했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문이라고 할까요. 나머지는 이야기가 알아서 하죠." (-p. 119)


 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 없거나 겁을 먹으리라는 생각도 못했지만 그난 자신 없고 겁먹은 모습이었다...

 "뭐하고 변명할 말이 없구나, 아들아." 그가 내게 말했다. 30년 동안 못 본 사람한테 아들 소리를 들으니 이상했다. 누군가의 아들이라는게 이상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도 왠지 다른 시간, 다른 장소, 실제로 벌어진 적이 없는 다른 이야기에나 맞을 것 같았다. 

 "미안하다." 그 말 끝에 그는 울었다.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맥주를 내려놓고 자기 의자의 팔걸이 위로 해서 소파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감정이 겨워 목소리가 갈라졌다. "날 용서해 주겠니?"

 "네, 용서합니다." 내가 말했다. 용서해야 함을 그때는 몰랐지만 어쨌든 했다. 그를 용서한 뒤로는 그에게 어떤 반감도 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무픔이 바스러지겠다 싶을 때까지 내 무릎에 손을 얹고 꽉 쥐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책을 들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잘 썼던데." 그가 시간 저 너머에서 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야기들이 정말 기막히게 좋구나."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의미도 없기를 바랐다. 그의 인정을 필요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자아의 일부는 영혼이며, 우리의 영혼은 목마르다. 아버지의 말은 내 영혼 속에 물처럼 스며들었다. (-p. 170)


 확신컨대, 이야기의 가장 환상적인 순간, 마침내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시점은 정작 실생활 속에는 오지 않는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오만 가지 방식을 다 생각해 보았지만, 인간의 삶이 실제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여 인생 만사가 한순간에 형통하는 방식을 나는 알아낼 수 없다. 영화와 책에는 늘 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없을 것이다.(-p. 215)


 교회에서 자란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배웠다. 우리 마음속에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섹스, 마약, 로큰롤 같은 네모꼴 말뚝으로 메우려 했고, 하지만 우리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원형 말뚝뿐이라고 배웠다. 나도 일부는 그런 약속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구멍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며 여전히 그분을 따른다. 하지만 예수님이 모든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거라는 개념은 거짓말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성경의 신학이 광고의 언어로 변질된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이곳 지상의 모든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바울이 광고에 나와 예수라는 명품을 증언하면서, 한때 권력과 권세를 누리던 자신이 예수를 쓰고 나서부터 감옥을 전전하고 매 맞고 걸핏하면 뱀에 물렸다고 말하는 게 상상이 되는가? 그 제품을 살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베드로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 스데반은 성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요하는 끓는 기름 가마속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토록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된 종교가 어쩌다 이 땅의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로 탈바꿈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예수님이 상황을 더 좋아지게 해주실 수는 있지만, 완전히 해결해 주실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여기서는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p. 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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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김영봉 목사님 페이스북에서 였다.

50대 베이비부머(1955~1963년)들을 인생을 담았다기에 언젠가 새벽 기도 설교를 위해 찜해둔 책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각 선교회별 총회를 하는데 사역자들이 들어가서 설교를 한 편해야 한단다. 

내가 설교하러 갈 요한 선교회는 45-50대 그러니깐 베이비부머들과는 바로 밑인 나이다. 

그래도 그리 세상 살이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이 책을 며칠 안에 다 읽어버렸다. 

 

Ⅰ. 느낀 

 

초중반에 들어가는 시도가 아주 좋다. 대리기사를 하시는 50대 아버지의 삶을 

초점으로 송호근 교수가 하고픈 이야기들을 넓혀 나간다. 

미혼의 미스 박이 짐 싸는 것을 거들었다. 25년 올인했던 직장에서 마지막 짐을 싸는 일은 여름날 홑이불 걷기보다 쉬웠다. 미스 박이 건네준 가방에는 견적서, 시방서, 마지막 결재서류, 그리고 줄자와 먹줄통, 조선의 장인들이 애지중지하던 전통 건축 기구가 들어 있었다. 회사를 나섰다.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햇빛이 눈부셨고, 바람에 나부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처진한 표정도 스쳤다. 기대에 찼던 부모님의 따스한 표정도 흩어졌다. 여태 땅에 묻혀 살았던 맏형의 거무스레한 얼굴도 스쳤다. 얼룩이는 송아지를 낳았고, 송아지는 다시 얼룩이가 됐고, 얼룩이는 다시 송아지를 낳아 외양간을 채웠던 세월이 스물다섯 번 흘렀던 것이다. 

 

-p. 19

설교에도 인용을 했지만 우리 아버지들은 3가지 짐을 진다고 했다. 

입시(학원비) 지옥, 경제(등록금) 지옥, 결혼 지옥. 

이거 다 뒤처리를 우리네 아버지들이 하신다. 

이렇게 

1장은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2장은 같은 또래의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책을 써나간다. 

3장은 저자의 전공이 빛을 본다. 사회학 교수라서 그런지 대단히 분석적이다. 

1,2장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지만 3장부터는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 같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펑클의 노래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중 가사 한 구절에서

50대 베이비부머들의 삶을 본다. 

그 가사는 이렇다.

"당신이 이 험한 세상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어줄게요."

저자는 말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1960년대까지 펼쳐진 세상'과 '1980년대 이후의 세계'는 양적, 질적으로 너무나 다르다. 1960년대와 1980년대의 시대적 차이는 여타의 차이보다 크다. 예를 들어,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그다지 못 느낄 정도로 유사한 반면, 1980년대 이후는 도시의 발달 정도, 의식주 환경, 시민들의 의식 성향과 가치관 등에서 새로운 진화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미 현대로 들어선 이후의 사회였다. 단순화한다면, 1960년대까지는 근대였고, 1980년대 이후는 현대였다. 1970년대는 근대와 현대 간에 느닷없이 형성된 절벽이었다. 이 절벽을 잇는 가교를 베이비부머들이 '내 몸을 누이는 방식'으로 설치했으며 스스로도 '그렇게 다리가 되어' 1970년대를 넘었단느 말이다. 

-p. 198 

50대 베이비부머들은 소리를 내어서 울지 않는단다. 

우는게 사치라서 그럴까?

우는게 불필요해서 그럴까?

우는게 나약해 보여서 그럴까?

울 시간이 없어서 그럴까?

아니면 

우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까? 

 

나의 아버지도 베이비부머다. 

그 세대의 어느 사람들처럼 아버지도 고생이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난 아버지가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모르겠다. 홀로 있을 땐 많이 우셨는지도. 

 

바라건대 

하나님 앞에서는 울었으면 좋겠다. 

그럼 왜 우는지 한번이라도 물어볼거 아닌가? 

우십시오. 시원하게 우십시오. 

그 울음 곁에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Ⅱ. 메모와 코멘드 


 교육 열망은 한국인이 세계 제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왜 그럴까? 선진국 학자들은 자주 그 이유를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지식인이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 고관대작, 양반층이 모두 지식인이었다! (p.45)

-계급 상승의 욕망이 아닐까?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대선후보들은 앞 다투어 정년 연장을 약속햇지만, 그걸 곧이듣는 베이비부머 태직자들은 드물었다. 사회학자인 나도 '글쎄'였다. 베이비부머 일자리를 늘리면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을 대선후보 누구나 일순위로 공약했고, 복지와 무상 혜택에 투입할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 증액을 동시에 약속했다. 청년들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생산하는 대기업과 재벌은 성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베이비부머와 자식들은 일자리를 두고 서로 다투는 형국이다. 베이비부머가 우선 양보하는 것이 순리지만, 자식들 취업을 위해 베이비부머가 우선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생 둘에 고등학생 하나를 둔 K 씨는 더욱 그랬다. (p.160-1)

-딜레마

 

1980년 초여름, 사회학과 은사님들 앞에서 대학원생들이 성토대회를 열었다. 광주사태로 상처를 입은 젊은 영혼들은 하소연할 대상이 없었다. 나는 은사님들을 상대로 장문의 성토문을 읽어나갔다. '교수님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나, 문학인들이 시대의 전선에서 싸울 동안 사회학자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계셨나, 지식인의 반역이란 교수님들을 두고 하는 말 아닌가' (p.231)

-주어는 다르지만 나는 목사님들을 넣어서 말한다. "목사님들은 도대체 그때 머하고 계셨습니까. 억압받고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멀 하고 있었어요?" 물론 속으로 말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세상이 훨씬 나아진 덕에 비판 예봉이 꺾인 학생들이 학문 정신을 살려 나에게 던지는 성토문을 낭독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교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청춘 시대의 의지가 우리 세대를 이렇게 현실 벽에 가뒀는가, 아니면 당신의 안위를 위해 반역과 타협의 교묘한 오솔길을 용케도 잘 걸어오셨는가', 뭐 그런 질책 말이다. (p.231)

-너무 이르지만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요즘 내 질문이 부메랑처럼 다가와 내 마음을 때린다. "넌 어쩔꺼니?" 나도 못하니깐 닥치고 순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약함을 알고 갈수밖에... 

Ⅲ. 메모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 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 경쟁으로 변했다. (p.59)

 

재워주고 먹여준 공장 생활의 한 달 급료는 공동이 7만 원, 공순이는 6만 원이었는데, 공돌이들은 씀씀이가 헤퍼 근처 식당과 주점에 외상을 지기 일쑤였음에 반해, 공순이들은 아줌마 외판원들이 조달하는 화장품을 구입했을 뿐 월 2~3만 원씩 고향집으로 송금했다. 아마 그 돈은 고향에서 청운의 꿈을 꾸던 동생 학비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하춘화와 나훈아, 남진의 노래가 포장마차와 주점에서 자주 흘러 나왔다. 송창식과 윤형주, 양희은의 노래가 각광을 받았던 캠퍼스와는 대조적이었다. (p.98-9)


20년 넘게 애 엄마와 함께한 교회 사람들은 그럭저럭 새로 연 건강원의 단골이 되어주었다.....그만큼 남은 고객관리가 중요했기에, 예배다 봉사다 해서 일주일이면 나흘씩 교회에 나가는 애 엄마한테 큰소리를 내고 싶을 때도 참았다. (p.116-7)


아들 친구들 중엔 월급 백 몇 십만 원으로 편모 편부에 동생들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애들이 제법 됐다. 어린 아들이 벌어온 돈으로 어떻게 먹고산대, 정신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사글셋방 전전하며 가장 노릇 하는 아들 친구들이 불쌍해서 그 애들을 지베 데려온 날이면 밥 한 그릇이나마 따뜻하게 먹이곤 했다. 그런 애들 볼 때마다 가난한 동네 고갯마루에 2억도 채 안 되나마 세 식구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게 새삼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p.127)


퇴직한 사람들을 더 만났다. 한창 일해야 하는 나이의 기술, 지식, 경륜이 쌓일 대로 쌓인 고참 직장인, 이제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어 젊은 시절의 치기를 안주 삼아 술 한잔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을, 그러나 세상이 지시하는 대로 직장에서 밀려나 아직 마치지 못한 부양 의무를 마저 이행해야 한다고 속울음 우는 이들을 말이다.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더러 아내가 아프기도 했고, 대학생 자식들이 사회 연착륙을 위해 열심히 출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아직은 아니다, 10년은 더 버텨야 한다! 베이비부머의 공동 슬로건이 시시때때로 울려퍼진다. 나는 의기투합한다. 아니 성원을 보낸다. (p.130)


어찌 보면 당신의 안식처였던 가족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닐 수도 있다. 가족도 유기체이므로 변화한다. 당신이 돌보던 예전의 가족이 아니다. 이미 성인이 된 자식들은 인생 설계와 연애와 사랑에 몰두해서 퇴직한 부모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를 가늠할 겨를이 없다. 눈치를 챘다 할지라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p.214)


이들이 일군 사회적 자산들, 고도성장의 열매를 '사유화'하느라고 (우리 세대 자신을 포함해) 미래 세대를 위한 '공적 자산'을 별도로 축적하지도 못했다는 그 세대적 직무 유기는 젊은 세대로부터 엄중한 성토문을 통보받아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빈약한 복지 제도가 그렇고, 젊은 세대의 사회적 진입 비용을 한없이 올려놓은 것이 그렇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에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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