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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세례, 성경, 성찬례, 기도 로완 윌리엄스 신앙의 기초 3부작
로완 윌리엄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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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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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도서 정가제 시행 전 그의 책이 풀티나가 할인을 했다. 

영화 '용의자 X'를 재미있게 본 터라 그 원작 작가에 대해

일찌감치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책들이 영화로 나와 

그에 대한 호기심은 자꾸 늘어났다. 

그런 차에 신참자와 탐정 갈릴레오를 구입했다. 


신참자는 몰입감이 상당히 높았다.

내가 일본 소설을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책 역시도 줄줄줄 읽혔다. 


이 책의 내용은 

신참자 그러니까 니혼바시 경찰서에 신참으로 온 가가와 교이치로가 

고덴마초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다. 

1장에서 9장까지 각각의 사건의 실타래들을 풀어나간다. 

옴니버스라고 하나? 무튼 이 책의 핵심사건과 일견 상관없을 법한 

일들을 형사가 해결해 주곤 한다.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추리력(관찰력?)은 별 의미없어 보이는 사건으로 보이지만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느낀 점


추리소설을 안 읽어봐서 말을 하기가 민망하지만 

이 책은 살인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야할까나. 

따뜻함? 정겨움? 가족애? 등등 

삭막한 현실에 일견 삭막해 보이는 그의 추리력이지만 

그는 그것을 이용해 역설적으로 따뜻함을 보인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이 되는 도시 역시

과거의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장소를 

택한게 바로 그러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에도 문화가 상당히 많이 암아 있는 동네군요. 아, 일본 문화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가게가 있는 것도 아마 그 덕분이겠죠. (p. 355) 

 

그의 대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가가 씨는 사건 수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물론 하고 있죠.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다미코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젓가락을 꼭 쥔 손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풍경이 딸랑딸랑 울렸다.  

이 대사에서 나는 이렇게 메모를 해놨다. 

"형사야? 치유자야?ㅋㅋㅋ"

일본의 소설가에게서 무언가 목회자적 자극을 받는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거 같지만 

묘하게 연결된다. 

아! 히가시노 게이고! 

이 매력적인 작가! 

그의 책을 조금 더 사서 봐야겠다.^^


-p.s. 메모와 책 속 중은 스포가 될까봐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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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쓴 러브레터 - 이방인들의 구원과 삶을 위해
이한수 지음 / 솔로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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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작년 수업 레포트 교재였다. 

총신에서는 바울신학의 거두로 불리는 분이라서

좋은 참고가 될 거 같아 도서관에서 빌리지 않고

구입을 했다. 

하워드 마샬의 제자라는 그 명성을 기대하며 읽었다. 


. 느낀 점


이한수 교수 책과 같이 읽은 책이 

톰 라이트의 에브리원 고린도전서 주석과 

권연경의 로마서 산책이다. 

함께 같이 읽어서 인지 글체가 눈에 보였다. 

이한수의 글체는 먼가 평이하다. 아무런 매력이 없다. 

독특함도 없으며 위트도 없으며 약간은 지루하다. 

그러나 권연경의 글체는 살아 있다. 본인의 생각이 맛깔나게 보인다. 

톰은 어떤가. 번역된 서적이라서 비교가 그리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글 전개는 앞서 내가 쓴 리뷰에 특징이 드러난다. 

(내 리뷰 '로마서 산책'에서 한 번 비교해보라. 톰의 글도 있다. 같이 그들의 문체를 보라)


나의 문제는 누구누구의 제자라고 하면

너무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던의 제자, 마샬의 제자, 김세윤의 제자,

밀리오리의 제자, 몰트만의 제자 등등 

분명 세계적인 신학자의 제자라면 

훌륭한 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명성은 잠시 내려놓고 연구의 성과를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겠다. 


무튼,

그러나 나름 좋았던 점도 있었는데 

그래도 국내 저자가 써서 그런지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문체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인걸까?ㅎㅎ 

각 서적들을 나름 잘 정리가 되어있어서 좋았다. 

어쨋던 저자 역시도 그러한 점을 목적으로 썼다고 한다.(p. 707-10)


아, 저자는 쉽게 쓰려고 해서 그런지 학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어느 학자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p. 244 등) 

비전공자들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없겠지만 

전공자 입장에서는 누구의 의견인지 알 수 없는게 조금 아쉽다. 

이건 머 어쩔 수 없는 나의 아쉬움이다.허허 



. 메모


하나님의 의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경험되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결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한다(롬 3:22-23). 22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란 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란 표현을 중복시키고 있다. 후자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이 믿음"이란 문구를 의역한 것이다. 이 소유격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성"을 뜻하는 말로 해석한다. 두 해석 다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성실성에 기초하며 믿는 모든 자들에게 경험된다. (p. 270)

-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새관점 의견이 아니었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한수 교수는 새관점을 그리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 아닌가?ㅎㅎ 


 

. 책 속 中



교회 내에서 심각한 윤리적 부패 행위가 존재하는데도 이를 묵인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근본적으로 망각하는 것이며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실한 권징으로서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p. 163)


그들은 (신약의 성례처럼) 다 같은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은 다 모세의 인도 아래 세례도 받은 사람들이다(고전 1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았다. 바울이 무엇을 교훈하려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의식이 아무리 거룩하고 중요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신뢰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p. 173)


초대교회의 만찬은 현대 교회가 행하는 그런 상징적인 식사가 아니라 실제 식사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집에서 만찬을 기념할 음식을 가져다가 공동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부한 자들이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고 가난한 자들은 가져온 것이 없어서 굶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사실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그의 구속적인 죽음을 기념하며(고린도전서 11:24, 25), 주의잔과 떡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교제의 식사였다. (p. 178)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이지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논증되는 살아있는 신앙이었다. 바울의 믿음을 너무 행위와 대치시켜 주지적인 신앙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칭의의 선물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칭의의 기초가 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릿속의 공허한 믿음이 아니요 전폭적인 헌신과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심스러운 믿음일 수밖에 없다. (p. 178)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간의 전형적 긴장이 발견된다. 성경 저자들은 이들 두 언어 중에서 한 쪽 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긴장의 한쪽 요소만을 강조하면 그릇된 신관에 빠지게 된다. 신적 주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면 하나님은 폭군적인 존재가 되고, 인간의 자율만 강조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에 제한된 우유부단한 존재가 된다. (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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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나님 - 중국 공산주의의 엄혹한 탄압 아래서 기독교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랴오이우 지음, 박명준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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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초 이벤트로 기독교 서적 10권과 일반 서적 10권이 왔다. 

기독교 서적 10권 중에선 눈에 띄는게 

김병년 목사님의 '바람 불어도 좋아'와 

이 붉은 하나님이 두 권이었다. 

그 책을 12월 마침내 다 읽었다. 


. 느낀 점


초반에는 저자의 절제된 어투 때문에

먼가 흡입력이 딸렸다. 

나는 이 책에서 고난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줄 알았는데 

저자는 덤덤했다. 

하지만 중후반쯤 그 덤덤함이 이리도 가슴 아릴까. 

마치 얼음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건드리다가 

후반부에는 무섭게 덤덤하게 치는 느낌이었다. 


중후반부가 주로 기억에 남는다. 

그들도 갈등이 있었다. 

정부가 인정하는 삼자교회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정부에서 인정하지는 않는 지하교회로 남을 것이냐.

이들이 말하는 삼자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공산당 치하에 있었기에 온전한 기독교인이라 말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개종하지 않는 이 중국에 남은 기독교인들에게 

끔직한 고통이 다가온다. 


고문과 평생을 감옥에서 살았지만

또, 죽으러 가는 그 순간에 가족간에 대화가 나의 가슴을 무겁게 친다.  


 : ..."나는 사상 개조에 실패했소." 예의 목회자의 어조로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변하지 않았으니,이제 내가 당하는 일은 모두 나의 책임이며 또한 받아 마땅한 일이오. 하지만 모든 가족이 나를 따라오지는 마시오. '위에서'하는 말을 잘 듣기 바라오."


랴오: "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정부를 뜻하는데, 선친의 말은 "하나님"을 뜻하는 것 같군요


: 정확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뜻을 즉각 알아챘습니다. 이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먹을 것과 옷을 머련하시오. 개인 위생에 신경 쓰고 건강해야 합니다. 아프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말에 우리는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은 아버지가 틈틈이 들려주시던 할아버지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해준 이야기였던 겁니다. 나는 아버지께 다가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위에서'하는 말씀을 귀담아 들을게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자녀들이 집에 많이 있어요. 사상 개조를 못 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그 자녀들은 어떻게 하죠?" 내 말은 아버지는 목사이며 교회의 지도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양 떼에게는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달걀 여섯 개를 꺼내 아버지에게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피 묻은 손을 내밀어 어머니의 얼굴과 가슴과 어깨를 마지셨습니다. 그러고는 달걀을 둘로 나누어 세 개는 갖고 세 개는 돌려주었습니다. 


랴오: 삼위일체를 말한 건가요?


: 우리는 그 상징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때 간수가 오더니 공지했습니다. "왕즈밍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형 집행은 내일 공개재판 후 있을 예정이다. 범죄자의 시신은 정부가 처리하며 가족은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p. 173-4)

3부 의 마지막 18장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새로운 시대가 되어 

기독교인이지만 고난을 모르고 자란 젊은 사람과의 대화가 나온다. 

그의 생각을 엿보자.


랴오: 지하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나요?


: 아니요. 엄마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1985년에는 청두 시에 지하교회가 없었어요…. 저는 그런 게 대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봐여.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이 있을 뿐이고 그분은 우리 모두를 인도하시죠. 어디서 예배하는가가 중요한 건 아니예요. (p. 314)

오히려 비기독교인인 랴오가 놀란다. 

나는 그래서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이 젊은 세대를 말하며

랴오는 위험을 말하는 게 아닐까.


선배들의 고난을 마치 대단치 않은 양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양

잊은 것도 아니고 아에 모르는 이 세대에게 말이다. 

(곁가지로 빠지는 말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도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이제는 서서히 등장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튼, 

신앙인들의 신성하게도 보이는 그 순교의 역사에 

랴오의 마지막 장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 메모와 코멘트


 랴오: 1950년 초 중국의 삼자애국운동을 설립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들은 중국 기독교회가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맺고 있는 모든 유대관계를 끊고 자치, 자양, 자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 목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교회가 중국 정부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죠. (p. 314)


- 한국초대교회사에서도 자치, 자양, 자전의 방식을 썼다고 배웠는데 그 맥락과는 다른 맥락인가 보다.  


. 책 속 中


 우리는 기도했어요. 길에서도 기도하고, 산을 오르면서도 기도했어요.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긴 세월을 견뎠어요. 머리와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한 땀 한 땀 아로새겨졌어요. 정부가 아무리 애쓴다 해도 그렇게 새겨진 말씀은 지워지지 않아요. (p. 58)


 나는 입당 원서를 쓸 수 없다고 말했어요. "선배님이 들은 이야기는 소문이 아닙니다." 상사는 크게 놀랐고 짐짓 내 말을 못 들은 척했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 마음을 이미 정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상사는 화가 나서 노발대발했습니다. "자네는 이미 공산당 체제 안에서 공직을 맏고 있네. 공산당 체제 안에서 봉급도 받고 혜택도 누리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니? 예수가 뭘 해줄 수 있지? 예수가 자네에게 먹을 것을 주나, 옷을 주나?"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작심하고 말했습니다. "지금 사직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을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p. 142-3)


 우리 가족은 가난한 농민 계층으로 분류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혁명의 열매"를 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땅도, 집도, 돈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p.166-7)


우리는 혁명군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끝없이 조롱받았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다니, 아버지와 분명히 선을 그어라."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다. 마오 주석과 공산당이 인민의 구원자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마오 주석과 공산당을 믿는가?" (p. 172)


랴오: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신가요?

: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을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복음을 전하던 1960년대 중반 우딩 현의 그리스도인 숫자는 2,795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1980년에 우딩현의 그리스도인 숫자는 1만 2천 명으로 선장했고, 지금은 3만 명에 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혼란스럽지요. 다른 어느 때보다 바로 지금이 복음의 말씀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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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 Orthodoxy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홍병룡 옮김 / 상상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그 유명한 체스터턴의 책이다. 

언젠가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12월에 다 읽었다. 

루이스가 그랬다지, 강한 무신론자로 남고 싶으면 그의 글을 경계해야 한다고. 

어쨌든 강영안 교수님의 추천사로 글을 시작했다. 


. 느낀 점


언젠가 체스터턴은 글을 쓰지않고 조교인가한테 

말하고 쓰게한다고 들었다. 

다 읽고 그 내용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어디인지 출처를 확인할 수가 없다.ㅠㅠ 

어쨌든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걸 고치지도 않고 그저...ㅎㄷㄷ

천재인가!!


무튼

다 읽었지만 모든 부분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의 논지를 따라가기 벅찼을 때도 있었고 

쾌제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시대의 공격에서 기독교를 변증한다. 

가장 와닿았을 때가 포스트 모던에 대한 비판을 했을 때다. 


"즉 고정된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는 뜻이라면, 가령, 여인들이 우아하게 되고 싶다면, 한 시대에는 뚱뚱해짐으로써 그리고 다른 시대에는 날씬해짐으로써 조금씩 진보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아해지고 싶은 소원을 그만두고 타원형이 되고 싶은 마음을 품기 시작한다면 그들이 진보를 이룩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만일 표준 자체가 변한다면, 어떻게 표준에 함축되어 있는 진보가 있을 수 있겠는가?" - (p.83)

논리들을 단순히 잘 비튼다. 

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보자. 


"현대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저 높이 치솟은 유물론은 결국 한 가지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만일 한 사물이 계속 반복해서 움직이고 있다면 아마 죽은 상태일 것이라는 가정이다. 시계의 태엽장치가 그런 것처럼... 즉 그 힘이나 욕망이 점차 죽어가거나 꺾어지기 때문에 생긴다. 사람은 약간 쇠약해지거나 피곤해졌기 때문에 동작을 바꾸게 된다. 걷는 일이 피곤해져서 버스를 타게 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지겨워서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 (p. 129)

그의 유쾌한 논증을 한 번 보자. 


 현대의 논쟁석상에서, 이런저런 신조는 한 시대에는 신봉할 수 있지만 다른 시대에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습관이 생겼다. 어떤 도그마가 12세기에는 믿을 만했지만, 20세기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떤 철학은 월요일에는 믿을 수 있어도 화요일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차라리 우주가 3시 반에는 적당한 상태였으나 4시 반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당신의 우주관을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 

 한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시계나 세기에 달려 있지 않고 그의 철학에 달려 있다. 만일 어던 사람이 불변하는 자연법칙을 믿고 있다면, 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기적도 믿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법칙 뒤에 있는 어떤 의지를 믿는다면, 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기적도 믿을 수 있다. (p, 157)


만일 내가 중세인이 어떤 면에서 미신적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의 궁극적인 답변은 중세인이 기적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만일 내가 "한 농부가 유령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런데 농부는 아주 속기 쉬운 사람이다"라고 응답한다.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속기 쉬운가?" 라고 물으면, 그들이 유령을 보기 때문이라는 답변만 얻을 뿐이다... 여기에다 한 가지 사항을 덧붙ㅇ는 게 공평하겠다. 실은 불신자가 합리적으로 기적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논법이 있는데도 보통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용하지 않는다. - (p. 294-5)

마치 C. S. 루이스가 떠오른다. 이리도 유쾌한 논증이라니!허허 

그 외에도 그의 변증은 내 책 속 中을 보길 바란다.

그의 예리한 논증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맛배기는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표시해논 그의 유쾌한 논증을 다 옮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가기에 몇 개만 옮겨다 놓는다.


체스터턴의 유쾌한 논증을 옮기다 보니 역시 또 행복해진다. 

어찌 이를 생각하며 쓰는게 아니라 

떠오는 말로 그냥 떠들었을까? 

그 대단한 순발력이 부럽다.



. 메모와 코멘트


도덕이란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네가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이런 거래 관계가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우리가 이 거룩한 곳에서 서로 치고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그 흔적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을 얻은 셈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배양하지 않았다. 신전을 위해 싸우다보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결함을 배양하지 않았다. 제단을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하다보니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잉글랜드 사람에게 알려진 유일한 초기 문서이므로, 이런 사실은 그 문서에 근거해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p. 145)

- 이 논증은 현대에 통할까? 이제 이 논증은 인류학자에게 맡기자!ㅎㅎ 


자살은 하나의 죄일 뿐 아니라 대표적인 죄이기도 하다. 그것은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기를 거부하는,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악이다. 즉 인생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p.154)

- 당시의 자살이 어떤 맥락인지 모르겠다. 앞에 문맥을 보면 자살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들 때문에 이리 강경하게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를 비난하는 비난하는 전자의 입장은 그것이 병적인 눈물과 위협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의 품에서 기쁨과 자유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기독교가 허구적인 섭리를 들어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즐거운 보육원에 둔다는 것이었다. 한 위대한 불가지론자는 왜 자연은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왜 그것은 자유로워지기 어려운가 하고 물었다. (p. 177)

-와우! 


블래치포드 씨와 같은 대중 과학의 신봉자는 기독교와 불교가 아주 비슷하다고 늘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도 흔히 그렇게 믿고 있다. 나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믿었었다.

-당시엔 이런 주장이 유행했나 보다. 


 어떤 현대의 몽상가들은 개미와 벌이 우리보다 우월한 사회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나의 문명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는 그것이 열등한 문명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줄 뿐이다. 이제까지 개미 언덕이 유명한 개미의 형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이제까지 벌집이 그 옛날의 멋진 여왕의 이미지로 깎여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는가? 그런 적은 없었다.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큰 간격은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 282-3)

- 헙. 현대의 건축은 개미와 벌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걸로 아는뎅ㅠㅠ 이런!! 허허


 이방인의 작은 꼬리표였던 기쁨이 지금은 그리스도인의 거대한 비밀이다. 이제 내가 이 혼란스런 책을 덮으면서 기독교의 기원이 된 그 이상한 작은 책을 다시 열어본다. 그리고는 다시금 일종의 확신에 사로잡힌다. 복음서들을 가득 채우는 그 거대한 인물이 다른 모든 면에서 그렇거니와, 이 면에서도 스스로 크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상가들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그의 연민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심결에 표현된다시피 했다. 고대와 현대의 스토아학파는 눈물을 감추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결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고향 도시의 앞날을 내다보며 공공연하게 백일하에 눈물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감추었다. 장엄한 초인들고 위엄 있는 외교관들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결코 분노를 억제하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앞 계단에 있던 가구를 뒤엎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를 억제했다. 나는 지금 경외심을 품고 이말을 하는 중이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 인물 속에는 수줍음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한 가닥의 실이 있었다. 그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을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감춘 그 무엇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침묵하거나 서둘러 고득을 택함으로써 계속해서 은폐한 그 무엇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땅 위를 걷는 동안 너무나 커서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때로 나는 그것이 그분의 환희가 아니었나 하고 상상해본다. (p. 311-2)

- 아! 마지막 이 한 문달을 나는 기대했던 걸지도! 그렇다! 오, 예수님! 정녕 그러한 분이시다!!




. 책 속 中


광기를 실제로 낳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시인들은 미치지 않는데 비해 장기꾼들은 미친다. 또 수학자들이미치고 돈을 계산하는 출납원들이 및니다. 반면에 창조적인 예술가가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지금 논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신이상의 위험은 상상 속에 있지 않고 논리 속에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p. 47)


광기란 뿌리 없이 사용된 이성, 빈 공간에 있는 이성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올바른 근본 원리가 없이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미치게 된다. 그는 첫머리부터 잘못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다. (p. 68) 


즉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병적인 논리학자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만들려고 애쓰다가 모든것을 신비롭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신비주의자는 한 가지를 신비로운 것으로 내버려두다 보니 다른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결정론자는 인과론을 아주 분명하게 정립한 뒤에는 자기가 가정부에게 "만일 당신이 괜찮다면"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의지를 거룩한 신비의 영역에 그냥 있도록 허용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자신과 가정부와의 관계는 투명하고 확실한 관계가 된다. 도그마의 씨앗을 가장 캄캄한 곳에 둔다. 그런데도 그것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풍성하고 자연스러운 건강을 자랑한다. (p. 69)


이전 시대의 조롱꾼은 너무 교만하여 설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 겸손해서 설득을 할 수가 없다.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러나 현대의 회의주의자는 너무 온유해서 그 유업조차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지적인 무력감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점이다. (p.77-8)


당신은 호랑이를 우리에서 해방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그의 줄무늬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낙타를 그 등의 혹으로부터 해방시키지는 말라... '삼각형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썼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으나, 만일 삼각형이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삼각형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을 것이 확실하다. (p. 92-3)


우리 문학에서 풍자가 사라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은 맹렬하게 붙잡아야 할 원칙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p. 96)


우리는 모두 똑같은 정신적 재난을 당한 상태에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우리가 상식, 합리성, 실용성, 실증주의 등으로 부르는 그 모든 것은, 삶의 수평적 차원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영, 예술, 황홀경 등으로 부르는 그 모든 것은, 어느 장엄한 순간에, 우리가 잊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p. 118) 


가장 흔한 부류의 문제는 이 세계가 거의 합리적이긴 하지만 무언가 조금 부족하다는 점이다. 삶은 비논리적인 실체가 아니다. 하지만 논리학자에게는 하나의 함정과 같다. 그것은 실제보다 조금 더 정확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정확성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실은 부정확성도 감춰져 있다. 그 황폐한 면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p. 169)

 

그런데 크롬웰과 앨바의 대량 학살 역시 기독교 특유의 범죄였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언제나 전쟁을 금하는 동시에 언제나 전쟁을 저지른 이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욕했다가 돌아서서 항상 싸우려 한다고 욕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 엄청난 학살과 이 엄청난 연약함은 과연 어떤 수수께끼 같은 세계에서 태어난 것인가? 기독교의 모습은 매 순간마다 더 괴상한 모양으로 변해갔다. (p. 180)


기독교의 교리는 삶의 변칙성을 간파했다. 즉 삶의 법칙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외적인 것들도 내다보았던 것이다. 기독교가 자비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과소평가하는 셈이다. 누구든지 자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모든 사람이 그걸 발견했다. 그러나 자비로운 동시에 엄격하게 되는 계략을 발견하는 일, 이것은 인간 본성이 지닌 이상한 필요를 미리 내다보는 조치였다. (p. 201)


불평등은 평등만큼이나 하나의 가치 기준을 함축하고 있다. 동물들의 무질서로부터 귀족정치를 끌어내는 것은 거기서 민주주의를 끌어내는 것처럼 감상적인 처사다. 귀족정치와 민주주의는 모두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일 뿐이다. 후자는 모든 사람이 귀중하다고 말하고, 전자는 일부 사람이 더 귀중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은 고양이가 쥐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 주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고양이는 탐나는 동물이라거나 쥐는 불쌍한 동물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고양이를 더 우월한 동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대다수가) 생명이 죽음보다 낫다는 특정한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쥐가 독일 비관주의를 좇는 쥐라면, 그는 고양이가 자기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가기가 무덤에 먼저 도달함으로써 고양이를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고양이를 계속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그에게 무서운 벌을 가했다고 느낄 것이다. 마치 세균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비관주의적인 쥐는 자기가 고양이 속에 의식적인 실존의 고문을 재발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할 것이다. 이 모두는 쥐의 철학에 달렸다. 당신이 무엇이 우월한지에 과한 모중의 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자연속에 승리나 우월성이 있다는 식으로 두무지 말할 수 없다. 만일 득점 시스템이 없으면, 고양이가 득점을 올리고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p.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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