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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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열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쿄에 거주하는 30대의 직장인들이다. 현대 도시문명의 요람 속에서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물질의 세례에 이질감 없이 적응한 채 샐러리맨으로서의 공적 삶과 사랑에 굶주린 개체로서의 사적 삶을 동시에 밀고 나아간다. 어찌 보면 우리의 30대 보통 남녀의 삶의 조건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만으로 우리가 이 소설을 비롯한 현대 일본소설에 국내 소설보다 더 호감을 갖거나 열광하는 현상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설명의 보충을 위해 현대 일본소설의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을 꼽고자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일본 소설에는 간간히,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요리명, 서명 등 일본 문화의 소품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의 국민성, 역사,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내용이 거의 없다. 우리 소설에서의 분단, 80년대를 둘러싼 역사적 부채 의식에 필적할 만한 모티프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우리 드라마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주제화되는 가족내의 갈등이나 윤리 문제도 돌출되지 않는다. 철저히 해부하고 숨겨진 음영을 가려보지 않는 한 현대 일본소설은 이처럼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속성을 보인다.

 

위 두 가지 속성은 소설속 인물들을 자유롭게 한다. 진공 속의 자유, 공허한 자유, 무책임한 자유라는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유롭다. 단편 [두 사람의 이름]의 남녀 주인공들처럼 결혼도 안 하고 몇 년씩 자기 사유물에 각자의 이니셜을 적으면서 아슬아슬한 동거 생활을 하기도 하고, [스타팅 오버]의 마유미처럼 16살부터 30세까지 단 일주일도 안 쉬고 남자친구를 갈아대며 살기도 한다. 그래도 '여론의 심판'을 받을 염려가 없다. 가족들의 훈계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모든 기성의 집단적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각자의 삶을 자기 의지대로 요리해 나가려는 듯하다. 물론 삶이란 언제나 다른 삶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므로 굴절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체의 선택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오히려 과도한 자유, 과도하게 자유로운 사랑이 부담이 되기까지 한다. 자유는 주체의 선택과 사랑의 의미 찾기를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시다 이라와 그의 인물들의 고민도 여기 있는 듯하다. [슬로우걸]의 바람둥이 남자 주인공은 너무나 순진한 장애 여자와 만남을 지속하기로 결단한다. 하룻밤 섹스로 끝내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한 가치를 그 여자의 웃음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옛 남자친구]의 여주인공은 오래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설레는 가슴을 느낀다. 고된 직장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을 받아줄 만한 사람이 그 남자친구밖에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1파운드의 슬픔]에서 1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연인은 그 애달픈 하룻밤의 만남 끝에 헤어짐의 슬픔과 그 가치를 서로 확인한다. 이처럼 이시다 이라는 현대 일본, 그 극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외견상 자유로워 보이는 남녀들의 힘든 사랑의 의미 찾기를 시도한다.

 

좋, 은, 소설을 쓴다, 이 작가는.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진공,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애정의 양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현대 일본의, 혹은 여기 한국의, 나아가 보편적 공간의 보편적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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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도다 세이지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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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지독한 삶을 몇 번이라도 다시?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능한 일이더라도 고개를 저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삶을 몇 번이라도 다시' 누릴 수 있다면 왜 하필 '지독한 삶'인가? '행복한 삶', '보람 있는 삶'이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의 [인생]편에서 말하듯 인생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하나 벗겨내는 양파와 같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양파를 다 벗겨낸 후의 후련함에 이르기까지는 오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짧은 후련함을 위해 오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지독한 삶'의 존재 조건은 인류에게 보편적이다.

[몇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는 우리가 '지독한 삶'을 왜 지독하게 버텨야 하는지, 또 무엇으로 '버티는 것'을 넘어 미소로 음미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 지독히 재수 없는 날, 밤거리에서 만난 도둑고양이를 친구 삼기([검둥이]), 135일의 칩거를 끝내게 한 희한한 꿈(내 삶이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일깨워준), 창작의 전제조건이 상처라는 걸 알고 그것을 껴안는 경험([꽃]) 등등 우리에게 이 '지독한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고, 끝내 몇 번이라도 감내하겠다고 다짐하게끔 하는 이유는 사실 이 '지독한 삶' 곳곳에 조약돌처럼 박혀 있다. 다만 손톱을 다쳐가며 그것을 파내거나, 외면하고 파내지 않는 것은 우리의 몫.

항상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세속적 경구는 사실 인간에게 당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지독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당위다, 어찌 보면 달갑지 않은. 이 책을 보고 찬찬히 돌아보자. 그 당위를 당위 아니게끔 만드는, 내 삶의 밭에 박혀 반짝이는 조약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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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9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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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쓰오 유미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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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을 '깔아보는' 지적 독서 취향은 여전히 존재하며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르소설의 대립항으로서의 '본격소설'이 제도와 결탁하여 공식 문단과 대학 커리큘럼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물론 지적 독서 취향의 '거드름'도 차차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재 제도권 밖에서 '정전'(canon)의 문법과 장르소설의 문법을 아우르는 시도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수의 장르소설이 영상물의 서사로 변모해,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예가 잦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까지는 거의 국외 저작물에 한정된 현상이지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지속적으로 정전의 신비를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 '엄숙성'의 구속을 지긋지긋해 하는 축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가끔씩 장르소설을 손에 쥐어본다. 그 전제는 역시 "장르소설의 모종의 문법이 보다 자유롭고, 심도 깊은 문학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의 장점도 위의 문제 제기 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환상문학의 기법으로 인한, 섬세하고 직접적인 '타자의 내면 탐험'이다. 어느 평범한 여자 경리가 "애인으로 추측되는" 유부남 출판 관계자의 집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전후 상황은 그녀가 자살한 것임을 뚜렷이 증명하지만 아주 사소한 의문거리가 남아 있다. 사체의 머리에 자그마한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애인'이 죽은 여자와 애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는 것. 이 상황에서 '본격소설'은 그녀의 죽음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어떤 서술 방식을 택할까. 당연히 간접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모종의 인연으로 인해 어떤 인물이 죽은 여자의 주위를 탐문하며 실마리를 캐고,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추측하고, 최종적인 '의미'에 도달하는 것, 이런 방식이 소위 '정통적인'  방식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장르문학에 속하는 '추리문학'의 문법일 수 있겠지만, 본격문학이라면 추리의 논리 전개를 따르면서 다양한 삶의 가치 문제를 결부시키는 식으로 '싸구려 냄새'를 희석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지난한 도정인가. 죽은 주체의 내면을 '산 주체'가 더듬으며 어떤 식으로든 복원하려 애쓰는 일이란.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 죽은 여자를 '유령'으로 등장시켜 고백하게 한다. 그녀의 내면은 '산 주체'인 그녀가 죽은 집의 새 입주자 누마노 와타루 앞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이것은 환상소설이다!"라는 장르소설의 코드를 인정함으로써 이 모든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내면고백만으로 죽음의 비밀이 밝혀지지는 않으므로 여기에 추리소설의 문법이 개재된다. 누마노는 한편으로 그녀의 존재를 집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또 한편으로 그녀에게 묘하게 매혹되어 탐정처럼 그녀의 주변을 캐고 다닌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말하고, 그녀와 함께 해석하고, 그 와중에 죽기 전의, 그리고 죽은 후의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현실의 죽음이 수수께끼인 것처럼, 죽은 그녀의 내면도 수수께끼 투성이다.  

 

모든 소설은 보편적으로 '개연성'의 구속에 시달린다. 이것은 소설의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면서 글쓰기의 거침 없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덜컥거리게 만든다. 장르소설의 미덕이란 이 점에서 귀중하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우리는 환상소설과 추리소설의 문법에 기대어 이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유령의 내면에 직접 뛰어들어, 단지 살인 사건 그 자체의 비밀을 밝히는 걸 넘어서 이 북적대는 도시공간에서 외로움과 사랑의 열병에 시달렸던 한 여자,  나아가 그 여자가 대표하는 모든 일상적 주체들의 지금, 이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이 책은 책장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위의 잡설을 다 폐기하고, 좋지 않은가, 우리 일상에서 이 정도의 기분 좋은 흡인력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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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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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후기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책은 자신이 지금까지 다뤄온 주제들, "레즈비언, 근친간의 사랑, 텔레파시와 심퍼시, 오컬트, 종교 등등"을 모두 모아놓았다고. 이것들 모두 어느 하나 비주류가 아닌 것이 없으며, 그래서 보통 이상으로 시선을 끈다.


일본소설의 미덕 중 하나는 무엇일까? '담담함'. 하지만 그건 담담함 그 자체가 아닌, 담담할 수 없는 감정과 사태를 담담하게 전할 수 있는 자기통제력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담담함의 객체가 위에서 말한 근친애, 레즈비언 등 비일상적인 것들이라면 효과가 더 크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다. '담담함'은 어디까지나 진정성을 담보해야 한다. 아니면 객기나 선정적 포즈로 전락할 테니까.


바나나의 [N.P]에서 보이는 담담함은 진정성일까, 객기일까. 나는 책을 덮고나서도 헷갈린다. 중간 이상까지 객기라는 판단에 기울었지만 결말 부분의 그 섬세한 문체에 홀려 진정성이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다. 역시 이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나름의 몫.


[N.P]는 역시 바나나문학(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의 정수 혹은 한계이다. 그녀가 이 이상의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난 회의적인 입장이다. 더더욱 그런 것이 나는 그녀의 [키친]이 훨씬 매력적이었으므로. 청춘물의 작가는 보통 데뷔작이 가장 좋다. 그리고 청춘물 전문 작가는 그저 박제로 남거나, 남는 것이 좋다. 슬프지만 합당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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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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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은 매개다. 주인공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교란하기 위한. 콧수염을 깎은 자신의 변화를 못 알아보는 아내, 직장 동료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전혀 다른 페르소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나'도, 지인들이 알고 있는 '콧수염이 없는 나'도 결국은 타자들에 의해 구축된 자기정체성, '가면-페르소나'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주인공은 정체성 혼란에 어쩔 줄 모른다. 귀중한 기억들이 타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무화되고, 낯선 기억들이 역시 타인들의 '인정'으로 사정없이 틈입해 들어온다.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의 탈주지 홍콩의 부두이다. 그는 시선만으로 자신을 해체, 재구축하는 타자들을 피해, 낯설어서, 그래서 비존재와도 같은 외국인들 틈에 낀다. 그리고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왕복 페리선에 몸을 맡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머지 여생을 이렇게 보낼 수도 있다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건조한 뱃고동, 승객들의 지껄임, 홍콩 근해의 더러운 바닷물, 승무원의 줄 선 제복.....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그 이미지들만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주인공은, 나는 고정된 실루엣으로 좌석에 앉아 있다. 절대 불가능하지만 한번쯤 누구나 꿈꿔봤을 시공간. 이 책으로 인해 다시 꿈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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