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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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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심미안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평생 글을 다루며 살아왔지만 그래서 본격적인 창작을 못하고 번역과 윤문만 했는지도 모른다. 시의 운율은 알지만 음악의 선율은 몰랐고 단어의 배열은 알지만 그림의 구도는 몰랐다. 몰라서 음악, 그림, 사진, 디자인 앞에서 늘 주눅이 들었고 전시장과 공연장을 피해 다녔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부르주아 예술은 취미 없어.”, “내가 좀 없이 살았잖아.”라고 궁색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심미안수업』(지와인, 2018)의 저자 윤광준 선생은 대단히 명징한 조언을 해준다.

“우리가 심미안을 갖게 된 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능 같은 것이다. 더 좋은 것, 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습관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미적 활동의 결과물인 예술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솔직히 나는 이 구절을 더 오래 전에 봤어야 했다. 사실 삼사 년 전부터 나는 아내와 함께 드문드문 예술의 전당 전시회에 들르곤 했다.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의 대표작들도 보았고, 잡지 <라이프>의 회고 사진전도 보았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영미권 현대 예술가들의 전시도 여럿 보았다. ‘심미안’도 길러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랬을까? 전시장에 가면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야수파의 거장 모리스 드 블라맹크의 전시회는 특히 잊을 수 없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8월이었는데 만년에 그가 주로 그린, 파리 근교 시골의 겨울 풍경들을 마주하고 그 을씨년스러운 삶의 이미지에 소름이 돋았다. 하나의 전시회는 하나의 세계의 산물이자 그 자체였고 내게는 그것과의 조우가 후줄근한 일상을 툭툭 털어 말끔히 펴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나 역시 윤광준 선생의 말대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능”에 기인하여 그런 식으로 소박하게나마 “심미안을 갖게 된 것”인지 모른다. 나를 무릎까지 파묻고 있는 내 해묵은 세계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예술의 세계’의 언저리를 무의식중에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멀쩡한 직장을 걷어치우고 세계여행을 나섰다. 그 이후로 주머니 가벼운 예술 애호가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삶의 여유가 있을 때 무엇인가를 즐기는 것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더 소중하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윤광준 선생의 술회다. 예술 애호가로, 그것도 “주머니 가벼운 예술 애호가”로 살아가기 위해 아무나 멀쩡한 직장을 걷어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심미안이 있어서 진정 인간 예술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여러 조화와 균형을 읽어낼 수 있다면, 혹은 그런 심미안을 향한 강한 열정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내가 젊지 않기에 할 수 있다. 불안과 불안정을 상징하는 그 시간대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술 애호가이기는 바랄 수 있으되 “주머니가 가벼운 것”만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더 소중하고 오래간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내게도 아름다움의 기억은 현재보다 과거에, 덧붙여 생시보다 꿈속에 있다.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은 예술의 문 앞에서 주저하는 우리의 손을 잡고 함께 문턱을 넘어가준다. 본래 사진작가이면서도 글, 그림, 음악, 디자인의 아름다움과도 모두 소통하는 그는 우리에게 각 예술의 미적 원리부터 감상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친근한 화제에 실어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예술에 관해 가르쳐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예술에 다가서고 예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성찰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봐야지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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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킵 -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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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킵]을 다 읽고 중국 친구와 한, 중 양국에서의 일본 소설의 영향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중국 친구는 “중국 독자들은 일본 소설을 잘 읽지 않아요. 그리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앞으로도 영향력이 크지 않을 거에요.” 내 생각은 달랐다. “반일감정으로 치면 한국인이 중국인보다 훨씬 극렬하지. 하지만 일본 소설의 독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냐? 민족 감정은 별도로 하고 작품의 재미와 문학성이 월등하면 그 파급력을 막을 수 없는 거야. 중국도 5년만 있으면 일본 소설 열풍이 불어닥칠 거야.” 중국 친구는 수긍하는 척했지만 썩 이해 가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또 말했다. “현재 한국 독자들은 일본 소설을 ‘볼 능력’이 있어. 중국 독자들은 아직 그런 능력이 없지. 문화 발전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5년 후에는 마찬가지로 그 ‘볼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거야. 중국 출판계도 미리 그 때를 대비해둬야 할 거야.”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5년 후에도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 소설의 수준을 따라잡을 만한, 그들의 소설에 비견할 만한 소설을 ‘쓸 능력’은 갖지 못할 거야. 일본의 문화 인프라에 절대로 미치지 못할 거야.” 나는 입맛이 씁쓸했다. 중국 친구가 물었다. “일본 소설이 그렇게 대단해요?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많다. 신인들을 양산해내는 일본의 숱한 문학상의 파워도 중요하고, 그런 신인들이 데뷔한 후 전업작가로서 꾸준히 활약할 수 있는 경제, 문화적 토대도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문학 내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너, 한국과 중국은 엘리트문학과 장르문학이 너무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니?” 중국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일본은 소위 장르 작가들이 만만치 않은 ‘필력’을 갖고 있어. 또 장르문학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이 있어서 그런 작가들을 뒷받침하지. 너희나 우리나 짧은 시기에 이것이 가능하겠냐? 어차피 21세기 문학의 중심 코드는 대중적 상상력이야.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대가 아니라고. 장르문학이 주도권을 갖고 독서계를 이끌어갈 거야. 따라서 문학성과 재미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작가군을 보유하고 엘리트문학과 장르문학의 간극이 거의 없는, 이른바 ‘경계문학’의 대국이 동아시아 문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될 거야.”


나의 이런 ‘거창한’ 견해를 한층 굳어지게 만든 작품이 바로 [스킵]이었다. SF적 설정 위에서 성장소설의 아련한 느낌을 자아내는 한편, 인간적 시간에 관한 진지한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이 소설, [스킵]. 장르문학의 놀라운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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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옷 마을로 오세요
D[di:] 지음, 이윤원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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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나 만화, 특히 장편 작품을 읽고난 뒤면 항상 '납득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소설의 경우엔 책을 펴보기도 전에 질려 버리는 '부담감', 책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그 부담감은 더더욱 무겁기만 합니다.......반면 만화의 경우는 읽는 속도는 소설보다 몇 배나 빠르지만 장대한 스토리가 빈약해지거나, 배경은 거창한데 그에 비해 주인공들의 세밀한 감정이 축소돼버려......"(작가 후기에서)

 

이런 이유로 소설가 겸 만화가 겸 패션 모델 겸 가수인 작가 D[di:]는 이 '노블코믹'이라는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언뜻 카툰 에세이류가 아닌가 오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첫 페이지를 펴는 순간부터 그런 오해는 불식된다. 정통만화책의 박스식 편집, 하지만 그 박스마다 채워진 엄청난 양의 활자, 그리고 활자가 감당하기 버거운 임팩트가 요구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건조하고 그로테스크한 양식의 만화, 짤막하지만 의미심장한 말풍선들.......이것이 노블코믹이다.

 

하지만 '소설의 표현력+만화의 속도감'을 기대하고 책을 펴자마자 난 '소설의 치밀함+만화의 상징성'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예상했던 독서시간을 서너 배 초과한 것은 기본. 덧붙여 우울함과 그로테스크함의 범벅이 덕지덕지 내 시간에 늘어붙어 영 떼내지지 않는다. 하긴 작가의 전작 [엔젤미트파이]의 존재감을 알면서도 헛된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내가 생각하는, 소설독서의 '매니아'는 다분히 나, 개인적인 해석의 소산이다. 그것의 요건은 첫째, 전형적 플롯과 스토리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 플롯과 스토리를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된다. '전형성'이 모든 예술성을 밀어내는 건 아니니까. 다음 둘째, 취미와 본업의 경계가 모호해야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소일거리야, 하며 독서와 자기 삶을 한참 멀게 떼어놓는 태도는 매니아의 태도가 아니다. 혹 그것이 사실일지언정(대부분 사실이다) 독서의 광희와 그 여운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전적으로 자기를 몰입시킨다. 그것이 매니아다. 흠, 여기까지 써봤더니......나는 매니아가 아니다.

 

[인형옷 마을로 오세요]의 주인공 도시는 철저히 유원지 운영을 위해 세워진 '인형옷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떠나고, 돌아오는 운명의 인물이다. 미남, 미녀가 아닌 거주민은 몽땅 귀여운 '인형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그 마을의 영향력을 도시는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반항의 대상의 의미에서든 그리움의 대상의 의미에서든 도시는 인형옷의 감각과 마력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간다.

 

"인형옷이 덮고 있는 건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정신까지도 인형옷에 꽁꽁 싸여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덮어버린 '거짓'의 또 다른 이름."(p.131)

 

인형옷을 입는 대가로 마을은 유원지의 수입을 받아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 마을 주민들은 그 삶에 침잠하여 '바깥'에는 눈도 돌리려 하지 않는다. 가정마다 유리로 된 '전시실'을 만들어 밖을 오가는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사생활을 눈요기로 제공하고, 학교에서는 무슨 '관광 과목' 같은 걸 잔뜩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가식의 상징인 인형옷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을 꽁꽁 싸고 있다. 도시는 결국 자기와 마음이 맞는 두 친구-바닐라와 마망-와 함께 '바깥'으로 도망친다. 그에게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뭔가 '예쁜' 것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픈 꿈이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물론 마을 밖 숲에 진을 치고 마약소굴을 여는 등 신비주의 냄새를 팍팍 내는 G 지구, 관광객들에게 불손한 주민들을 잡아가둬 세뇌교육식 개조사업을 벌이는 뭉게뭉게 수용소 등 불편한 요소들이 많기는 하지만 너그럽게 참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제부터 작가 D는 본격적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탈출한 도시 앞에 놓여진 현실, 그것은 '바깥'에 나가니 '중앙'(토쿄 같은 대도시를 의미하는 듯함)이라는 또 다른 '바깥'이 있고, '적나라한 현실'은 '인형옷이라는 가식'보다 훨씬 차갑고 적대적이라는 사실. 도시는 영혼과 육체 모두에 생채기가 끊이지 않는다. 따뜻했던 우정도 더 이상 보금자리가 돼주지 못한다. 나아가 그 차가운 '바깥'은 제정신을 가진 인간, 꿈을 간직한 인간을 모조리 바보, 천치, 머저리로 멸시하고 내치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 도시, 그는 마침내 '거짓'의 또 다른 이름 '인형옷'을 그리워하기에 이른다.

 

불편하다, 읽기 힘들다, 그로테스크하다.......하지만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우리의 고뇌와 삶의 여정에서 한결같이 우리를 덜 고뇌하게 하고 중도에 여정을 포기하게 하는 '전형성'은 눈꼽만치도 없다. "착한 사람이 잘 되게 돼 있어", "우리집이 젤 좋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등의 판에 박힌 말들, 그것들은 정말 눈물나리 만큼 고맙게도 청춘기의 우리를 잘도 위로해줬었다. 하지만 이제 와 나는 그 위로의 말들을 내가 믿지 않으면서도 너무 지쳐 수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인형옷 마을로 오세요]는 그 말들에 대한 수락이 아니라 거절의 산물임을, 그래서 '위안이 필요없는 매니아들의 필독서'임을 인정하고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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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운드의 슬픔
이시다 이라 지음, 정유리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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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집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쿄에 거주하는 30대의 직장인들이다. 현대 도시문명의 요람 속에서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물질의 세례에 이질감 없이 적응한 채 샐러리맨으로서의 공적 삶과 사랑에 굶주린 개체로서의 사적 삶을 동시에 밀고 나아간다. 어찌 보면 우리의 30대 보통 남녀의 삶의 조건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유사성만으로 우리가 이 소설을 비롯한 현대 일본소설에 국내 소설보다 더 호감을 갖거나 열광하는 현상이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설명의 보충을 위해 현대 일본소설의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을 꼽고자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일본 소설에는 간간히,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요리명, 서명 등 일본 문화의 소품을 제외하고는 일본인의 국민성, 역사,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내용이 거의 없다. 우리 소설에서의 분단, 80년대를 둘러싼 역사적 부채 의식에 필적할 만한 모티프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우리 드라마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주제화되는 가족내의 갈등이나 윤리 문제도 돌출되지 않는다. 철저히 해부하고 숨겨진 음영을 가려보지 않는 한 현대 일본소설은 이처럼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속성을 보인다.

 

위 두 가지 속성은 소설속 인물들을 자유롭게 한다. 진공 속의 자유, 공허한 자유, 무책임한 자유라는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유롭다. 단편 [두 사람의 이름]의 남녀 주인공들처럼 결혼도 안 하고 몇 년씩 자기 사유물에 각자의 이니셜을 적으면서 아슬아슬한 동거 생활을 하기도 하고, [스타팅 오버]의 마유미처럼 16살부터 30세까지 단 일주일도 안 쉬고 남자친구를 갈아대며 살기도 한다. 그래도 '여론의 심판'을 받을 염려가 없다. 가족들의 훈계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모든 기성의 집단적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채 각자의 삶을 자기 의지대로 요리해 나가려는 듯하다. 물론 삶이란 언제나 다른 삶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므로 굴절이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체의 선택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오히려 과도한 자유, 과도하게 자유로운 사랑이 부담이 되기까지 한다. 자유는 주체의 선택과 사랑의 의미 찾기를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시다 이라와 그의 인물들의 고민도 여기 있는 듯하다. [슬로우걸]의 바람둥이 남자 주인공은 너무나 순진한 장애 여자와 만남을 지속하기로 결단한다. 하룻밤 섹스로 끝내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소중한 가치를 그 여자의 웃음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옛 남자친구]의 여주인공은 오래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설레는 가슴을 느낀다. 고된 직장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을 받아줄 만한 사람이 그 남자친구밖에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1파운드의 슬픔]에서 1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연인은 그 애달픈 하룻밤의 만남 끝에 헤어짐의 슬픔과 그 가치를 서로 확인한다. 이처럼 이시다 이라는 현대 일본, 그 극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외견상 자유로워 보이는 남녀들의 힘든 사랑의 의미 찾기를 시도한다.

 

좋, 은, 소설을 쓴다, 이 작가는. 무국적성과 무혈연성의 진공,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애정의 양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현대 일본의, 혹은 여기 한국의, 나아가 보편적 공간의 보편적 사랑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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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도다 세이지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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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삶을 몇 번이라도 다시?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능한 일이더라도 고개를 저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삶을 몇 번이라도 다시' 누릴 수 있다면 왜 하필 '지독한 삶'인가? '행복한 삶', '보람 있는 삶'이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의 [인생]편에서 말하듯 인생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하나 벗겨내는 양파와 같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양파를 다 벗겨낸 후의 후련함에 이르기까지는 오래 눈물을 흘려야 한다. 짧은 후련함을 위해 오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지독한 삶'의 존재 조건은 인류에게 보편적이다.

[몇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는 우리가 '지독한 삶'을 왜 지독하게 버텨야 하는지, 또 무엇으로 '버티는 것'을 넘어 미소로 음미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 지독히 재수 없는 날, 밤거리에서 만난 도둑고양이를 친구 삼기([검둥이]), 135일의 칩거를 끝내게 한 희한한 꿈(내 삶이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일깨워준), 창작의 전제조건이 상처라는 걸 알고 그것을 껴안는 경험([꽃]) 등등 우리에게 이 '지독한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고, 끝내 몇 번이라도 감내하겠다고 다짐하게끔 하는 이유는 사실 이 '지독한 삶' 곳곳에 조약돌처럼 박혀 있다. 다만 손톱을 다쳐가며 그것을 파내거나, 외면하고 파내지 않는 것은 우리의 몫.

항상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세속적 경구는 사실 인간에게 당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지독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당위다, 어찌 보면 달갑지 않은. 이 책을 보고 찬찬히 돌아보자. 그 당위를 당위 아니게끔 만드는, 내 삶의 밭에 박혀 반짝이는 조약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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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9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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