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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
마쓰오 유미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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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르소설을 '깔아보는' 지적 독서 취향은 여전히 존재하며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장르소설의 대립항으로서의 '본격소설'이 제도와 결탁하여 공식 문단과 대학 커리큘럼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물론 지적 독서 취향의 '거드름'도 차차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재 제도권 밖에서 '정전'(canon)의 문법과 장르소설의 문법을 아우르는 시도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수의 장르소설이 영상물의 서사로 변모해,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정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예가 잦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까지는 거의 국외 저작물에 한정된 현상이지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지속적으로 정전의 신비를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 '엄숙성'의 구속을 지긋지긋해 하는 축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가끔씩 장르소설을 손에 쥐어본다. 그 전제는 역시 "장르소설의 모종의 문법이 보다 자유롭고, 심도 깊은 문학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의 장점도 위의 문제 제기 안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환상문학의 기법으로 인한, 섬세하고 직접적인 '타자의 내면 탐험'이다. 어느 평범한 여자 경리가 "애인으로 추측되는" 유부남 출판 관계자의 집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전후 상황은 그녀가 자살한 것임을 뚜렷이 증명하지만 아주 사소한 의문거리가 남아 있다. 사체의 머리에 자그마한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애인'이 죽은 여자와 애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는 것. 이 상황에서 '본격소설'은 그녀의 죽음의 비밀을 풀기 위해 어떤 서술 방식을 택할까. 당연히 간접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모종의 인연으로 인해 어떤 인물이 죽은 여자의 주위를 탐문하며 실마리를 캐고,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추측하고, 최종적인 '의미'에 도달하는 것, 이런 방식이 소위 '정통적인'  방식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장르문학에 속하는 '추리문학'의 문법일 수 있겠지만, 본격문학이라면 추리의 논리 전개를 따르면서 다양한 삶의 가치 문제를 결부시키는 식으로 '싸구려 냄새'를 희석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지난한 도정인가. 죽은 주체의 내면을 '산 주체'가 더듬으며 어떤 식으로든 복원하려 애쓰는 일이란.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는 그렇지 않다. 죽은 여자를 '유령'으로 등장시켜 고백하게 한다. 그녀의 내면은 '산 주체'인 그녀가 죽은 집의 새 입주자 누마노 와타루 앞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이것은 환상소설이다!"라는 장르소설의 코드를 인정함으로써 이 모든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내면고백만으로 죽음의 비밀이 밝혀지지는 않으므로 여기에 추리소설의 문법이 개재된다. 누마노는 한편으로 그녀의 존재를 집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또 한편으로 그녀에게 묘하게 매혹되어 탐정처럼 그녀의 주변을 캐고 다닌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말하고, 그녀와 함께 해석하고, 그 와중에 죽기 전의, 그리고 죽은 후의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현실의 죽음이 수수께끼인 것처럼, 죽은 그녀의 내면도 수수께끼 투성이다.  

 

모든 소설은 보편적으로 '개연성'의 구속에 시달린다. 이것은 소설의 이해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면서 글쓰기의 거침 없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덜컥거리게 만든다. 장르소설의 미덕이란 이 점에서 귀중하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우리는 환상소설과 추리소설의 문법에 기대어 이 평범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유령의 내면에 직접 뛰어들어, 단지 살인 사건 그 자체의 비밀을 밝히는 걸 넘어서 이 북적대는 도시공간에서 외로움과 사랑의 열병에 시달렸던 한 여자,  나아가 그 여자가 대표하는 모든 일상적 주체들의 지금, 이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이 책은 책장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위의 잡설을 다 폐기하고, 좋지 않은가, 우리 일상에서 이 정도의 기분 좋은 흡인력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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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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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후기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책은 자신이 지금까지 다뤄온 주제들, "레즈비언, 근친간의 사랑, 텔레파시와 심퍼시, 오컬트, 종교 등등"을 모두 모아놓았다고. 이것들 모두 어느 하나 비주류가 아닌 것이 없으며, 그래서 보통 이상으로 시선을 끈다.


일본소설의 미덕 중 하나는 무엇일까? '담담함'. 하지만 그건 담담함 그 자체가 아닌, 담담할 수 없는 감정과 사태를 담담하게 전할 수 있는 자기통제력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담담함의 객체가 위에서 말한 근친애, 레즈비언 등 비일상적인 것들이라면 효과가 더 크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다. '담담함'은 어디까지나 진정성을 담보해야 한다. 아니면 객기나 선정적 포즈로 전락할 테니까.


바나나의 [N.P]에서 보이는 담담함은 진정성일까, 객기일까. 나는 책을 덮고나서도 헷갈린다. 중간 이상까지 객기라는 판단에 기울었지만 결말 부분의 그 섬세한 문체에 홀려 진정성이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다. 역시 이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나름의 몫.


[N.P]는 역시 바나나문학(이런 말을 쓸 수 있다면)의 정수 혹은 한계이다. 그녀가 이 이상의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난 회의적인 입장이다. 더더욱 그런 것이 나는 그녀의 [키친]이 훨씬 매력적이었으므로. 청춘물의 작가는 보통 데뷔작이 가장 좋다. 그리고 청춘물 전문 작가는 그저 박제로 남거나, 남는 것이 좋다. 슬프지만 합당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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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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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콧수염'은 매개다. 주인공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교란하기 위한. 콧수염을 깎은 자신의 변화를 못 알아보는 아내, 직장 동료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전혀 다른 페르소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콧수염을 기른 나'도, 지인들이 알고 있는 '콧수염이 없는 나'도 결국은 타자들에 의해 구축된 자기정체성, '가면-페르소나'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기억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주인공은 정체성 혼란에 어쩔 줄 모른다. 귀중한 기억들이 타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무화되고, 낯선 기억들이 역시 타인들의 '인정'으로 사정없이 틈입해 들어온다.

인상 깊은 장면은 주인공의 탈주지 홍콩의 부두이다. 그는 시선만으로 자신을 해체, 재구축하는 타자들을 피해, 낯설어서, 그래서 비존재와도 같은 외국인들 틈에 낀다. 그리고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왕복 페리선에 몸을 맡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념에 젖어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머지 여생을 이렇게 보낼 수도 있다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건조한 뱃고동, 승객들의 지껄임, 홍콩 근해의 더러운 바닷물, 승무원의 줄 선 제복.....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그 이미지들만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주인공은, 나는 고정된 실루엣으로 좌석에 앉아 있다. 절대 불가능하지만 한번쯤 누구나 꿈꿔봤을 시공간. 이 책으로 인해 다시 꿈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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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 - 안개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현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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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본 저서 목록만 보더라도 '글쓰는 기계'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추리물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

그리고 게임이라고는 테트리스밖에 모르는 내게 '명품게임'이라 알려진 'ICO'.

이 두 가지 선지식 없이 [이코-안개의 성]을 펼쳐들었다. 책 한 권을 읽으려 사전 정보를 성실히 머리 속에 빼곡이 쌓아둘 수 없는 내 개인 스케줄의 문제로.

나는 내 표상 능력으로 표상 불가능한 상상 밖의 시공을 늘 꿈꾼다. 그런 시공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문자텍스트, 영상물은 무조건 다 좋다.

하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내게 무리였다. '상상 밖의 시공'이 그야말로 내 상상력의 한계 밖에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구체적인 표상이 아니었다.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면 주인공이 본 SF의 한 장면이 나온다. 이름 모를 혹성의, 몇천 킬로미터 깊이의 붉은 협곡 속을 헤매는 우주인의 고독이 잊혀지지 않는다.

만화 [브레임]을 보면 불특정 연대의 미래에 수직적 구조물의 파괴된 공간을 '넷단말 유전자'를 찾으러 여행하는 파이터가 나온다. 인간이 부재하는, 오랫동안 '자기충족적 삶'을 살아온 거대 콘크리트 구조물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코]의 안개의 성은 위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상상 밖의 시공'들의 하나다. 수천 년간 시간이 정지된 공간, 그 속에 머무는 삶은 육체적 삶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 그리고 마법에 의해 성숙과 노화의 가능성이 박탈된 가녀린 소녀 한 명. 나머지는 공허한 암흑과 석상이 돼버린 희생자들뿐이다.

그속을 뛴다, 이코와 요르다는. 요르다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곳을 황폐화시킨 자책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이코는 그녀를 데리고 성을 벗어나고 싶지만 모든 비극의 원인이 그녀에게 있다는 당혹감이 엄습한다. 그래, 아무래도 좋다. 우선은 뛴다, 도주한다. 비정상적인 성의 구조를 헤집으며 암흑과 여왕을 피해 미로 곳곳을 헤맨다.

몇 분, 몇 시간, 며칠을  뛰고 있는지, 목마름은 없는지 피로는 없는지 리얼리스틱한 감각은 부재하다. 과거의 상기와 현재의 긴장, 미래의 막막함이 두 주인공과 독자의 사념의 전부다. 두렵고 슬프고 흥분되며 이 세 감정이 영구동력의 모터인 양 그들의 다리와 우리의 시선을 재촉한다. 도주는 공간적인 이동만이 아니다. 요르다와 안개의 성의 슬픈 역사가 휙휙 지나치는 풍경 속에 흩뿌려진다.

그 시공 속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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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불 다시 살아나 - 현대성에 저항하는 현대성
왕 후이 지음, 김택규 옮김 / 삼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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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적 모더니티의 지향과 현실 비판

- 왕후이, 『죽은 불 다시 살아나』의 해체 작업


 


『죽은 불 다시 살아나』(死火重溫)는 칭화대 왕후이(汪暉) 교수의 1990년대 전반에 걸친 이론적 사유의 총화다. 그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길, 자신이 1989년부터 줄곧 중국 사상사 연구에 매달려 왔으며 그 목적은 중국 근대사상의 의의를 총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사상사 연구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중국 근대사상의 명제들을 중국 전통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 명제들을 유럽 사상의 충격에 대응해 탄생한 것으로 전제하고 과거 서양 이론 및 서양사를 폭넓게 소화해 일종의 비교사상사적 시각 속에서 그 명제들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학술 연구’와는 별도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의식해 오늘날 중국의 변화와 지식인 문제에 관한 논의에도 줄곧 참여하여 ‘지식-권력’의 야합과 그로 인한 지배담론의 형성을 날카롭게 비판해 왔다. 요컨대 『죽은 불 다시 살아나』는 위와 같은 그의 두 가지 연구 방향과 비판 작업의 실천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작이다.

그런데 왕후이의 이론적, 비판적(사회적) 실천을 거시적으로 조망해 보면 그 실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는 공통된 전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계보학을 통한 선(先) 관념의 해체다. 그는 갖가지 힘들-정치・사회・문화적 권력, 거대서사, 오리엔탈리즘 등-에 의해 구축, 혹은 왜곡되어 과거와 현재의 중국을 보는 프리즘 역할을 해온 선 관념들, 특히 중국의 모더니티를 둘러싼 그것들을 해체하는 데 주력한다. 그것들이 서양에서 수입된 거라면 원(原) 탄생지의 컨텍스트를, 중국에서 생성되었거나 왜곡된 거라면 그 생성/왜곡의 중국적 컨텍스트를 묘사하여 허점을 발견, 해체한다. 그는 그런 바탕 위에서만 그의 일차적 목적-중국 근대사상의 의의를 총괄하는 것-을 달성하고 나아가 진정한 모더니티, 과거에 단초를 보였으며 미래에 한껏 지향, 발현돼야 할 중국적 모더니티(배리적 모더니티)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과학주의 해석모델과 현대적 이원론의 해체


민주주의와 함께 5・4의 양대 가치였던 과학, 오히려 민주주의보다 더 중국인 개개인의 실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이 키워드에 관해 왕후이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1980년대 중반, 중국의 한 연구 경향, 즉 ‘과학주의 해석모델’의 광범위한 적용이다. 그 연구 경향은 “과학 방법의 사회적 적용이 곧 중국에서 독재정치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근현대 중국인들이 자연과학의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사회・문화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국가의 절대권력과 총체적 계획모델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후이는 「‘과학주의’와 사회이론의 몇 가지 문제」에서 그런 과학주의(과학만능주의) 해석모델로는 실제로 과학, 과학정신, 과학방법이 중국사에서 수행한 해방의 역할을 설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근대 중국사상의 전체주의적・목적론적 특징은 근대사의 특수한 정치・경제・군사・문화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결코 어떤 사상의 결과로 단순화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과학주의 범주로 근대사상의 역사 해석 방식을 비판하기보다는 차라리 ‘민족-국가’와, ‘시장 사회’ 및 그 원동력으로 문제의식을 전환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것들이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인가 아니면 외부적인 압력 아래 어떤 사회세력들이 주도하고 구성한 결과인가 하는 것이다.(p.140)


왕후이가 보기에 과학주의 해석모델의 등장은 국가, 독재정치를 ‘기획의 결과’로, 사회, 시장, 개인을 ‘자연적 존재’로 보는 이원론자들(자유주의 이론가들)의 책동이다. 현대의 시장질서와 사회질서는 결코 자연적인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적인 창조물로서 그 성격은 결코 과학주의 해석모델의 이원대립적 시각에 의해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왕후이는 서양 사상계의 과학주의 비판의 예(하이에크, 야스퍼스, 포퍼)를 하나하나 들면서 그 비판들이 하나같이 전체주의와 총체적 계획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고,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사유 중에서도 일부(마르쿠제, 폴라니)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자율적 시장과 파시즘 사이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현대 중국의 과학주의 해석모델이 이런 이론적 풍부성을 고려하지 않고 굳이 친자유주의, 친시장적 입장을 고수하는 까닭은 “불평등하고 독단적이며 현실적인 또 다른 사회질서에 정당성을 제공하려는” 목적이 아닌지 왕후이는 의심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계보학적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그것은 자유주의 이론의 석학, 하이에크의 과학주의 비판의 검토, 그리고 그가 비판의 바탕으로 삼은 주체/객체, 시장/계획, 사회/국가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 마지막으로 만청(晩淸) 시대 국가가 주도한 ‘시장’, ‘사회’ 창출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원론에 대한 뿌리 깊은 신봉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었으며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통제를 위해 민주주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 양자에서 공히 존재해 왔음이 밝혀진다.

결국 왕후이는 ‘과학주의 설명모델’의 권위 해체에서 시작하여 그것의 교조적 이원론의 해체에까지 나아간다. 이 작업은 철저히 관련 지식의 역사적, 이론적 컨텍스트에 대한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실천되면서 오늘날 과학 개념 및 그것과 연관된 모든 키워드들의 ‘조작된’ 합리성을 분쇄한다. 아마도 이런 작업의 근저에 그가 갖고 있는 신념은 푸코의 담론 개념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모두 특정한 지배-피지배 관계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들은 권력과 야합하여 현존하는 지배-피지배 관계에 정당성을 제공한다. 과학의 남용이든, 과학의 남용에 대한 비판이든, 아니면 일원론이든, 이원론이든간에 그것들 어느 한쪽의 절대 선(善)은 무엇으로도 보증될 수 없다. 단지 그것들이 제공하는 유사 정당성, 유사 합리성이 채택되는 사회에서 한시적 선의 지위를 누릴 뿐이다.


2. 자유주의적 가치의 해체


냉전 종결 후 세계의 지배적 담론이 돼 버린 자유주의도 왕후이의 눈에는 여러 선들 중의 선, 그것도 서구중심적인 선에 불과하다. 그는 「승인의 정치, 만민법, 자유주의의 위기」에서 롤스의 규범적 연구를 주로 분석 대상으로 삼으면서 오늘날의 자유주의는 동질화와 이질화가 교차하는 세계 속에서 보편적인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는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구질서가 전지구화를 주도하면서 자유주의적 가치로 국제관계를 재단하는 현 상황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자유주의 이론이 전세계의 민족적, 문화적 다원성을 포용하는 용광로가 될 수 있을까? 또한 그런 판단에 근거하여 전지구적 상호관계에서 벌어지는 각양각색의 문제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만민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

확실히 식민주의 시대의 매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무역・소비의 다국적화, 유례없는 이민과 인구 이동이 빚은 탈영토화 등은 오늘날 민족, 문화 간 경계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국가간, 민족간, 문화간 상호관계의 심화가 반드시 보편적 문화, 통일과 융합의 문화를 낳고 있지만은 않다는 건 냉전 후 세계의 국지적 분쟁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아무리 자유와 평등이라는 추상적 가치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외쳐도 이러한 현상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왕후이는 자유주의가 “가치중립이라는 전제로 차이를 소홀히 하면서도, 오직 이 전제만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간들의 평등한 의사소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이론은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 그리고 정치와 종교를 구분할 것을 거듭 천명해 왔다. 그 목적 중 하나는 바로 논쟁을 부를 수 있는 차이와 대립을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 두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한다. 즉, 자유주의가 다원적 문화의 담지자들을 다 같이 한 자리에 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제는 지극히 ‘특수하고’ ‘서구적’이다. 정통 이슬람 국가에 “인간들의 평등한 의사소통을 위해” 정교 분립을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이라고 자처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강권이다. 그리고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라는 요구 역시 중국 같은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의 국가에서는 무리한 바람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가치가 보편주의적 관념으로 세계에 역설되는 건 자유주의가 “타인들에게 어떤 문화를 강요하며, 자신의 모델에 맞춰 다른 문화들을 타자로 개조하는 것”에 불과하다. 롤스가 공들여 고안한 자유주의적 상호관계의 표본 ‘무지의 베일’조차 굳이 왕후이의 분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념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왕후이의 눈길은 과학주의 해석모델에 대한 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현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 바뀐다.


우리 생활 속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가득하다. 부패하고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은 합리적 사회질서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에 불과하며, ‘시민사회’나 시장 사회가 우리를 자연스럽게 공정하고 민주적이며 행복한 시대로 데려다줄 거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어떤 이들은 통제를 받는 시장을 통해 새롭게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자고 촉구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불간섭주의’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왜 여러 이론가들이 민족국가와 거대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캐물어야 한다.(p.350)


자유주의적 가치는 단지 정체(政體)나 외교관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경제와 무역면에서 시장사회, 극단적 자율경쟁, 부의 축적의 옹호로 이어진다. 그것이 교조가 될 때, 자유주의의 사각(死角)에 놓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자유주의의 장막 뒤에 숨어 극단적 이기주의를 충족시키는 소수 열강, 특혜 계층, 거대 자본의 작용을 은폐시킨다. 이것을 못 보거나, 눈 감은 채 자유주의・시장주의・글로벌리즘을 구호로 외치는 자들을 가리켜 왕후이는 ‘속류 자유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그들은 한때 전통 사회주의의 비판자, 신계몽주의의 투사로 활동했지만 현재 세계의 변화 속에서 ‘신질서의 변호인’이 돼 버린 것이다. 왕후이는 그들을 향해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호소한다. 오늘날 중국학계는 그를 ‘신좌파’의 수장격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신좌파’라면 그것은 네오마르크시스트의 함의를 담지 않는다. 단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권력과 자본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협력해 온 모든 이론적 자원들의 ‘역사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사고함으로써 그 각각에 대해 정당한 평가와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신좌파’인 것이다.

3. 친권력적 학술 담론의 해체


왕후이의 사상 논의의 출발점은 항상 지금, 여기이다. 그는 “오늘날 세계의 변화는 너무나 풍부하고 복잡해서 맹목적으로 갖가지 새로운 사조나 우상을 추종하기보다는, 차라리 목전의 논의에서부터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현재 중국 학술계에 대한 그의 불만 중 하나도 역시 “왜 먼저 가까운 일들을 분석해 오늘날 중국의 현실과 우리들 자신의 역사, 우리 시각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실마리를 제시하지 않고 있는가”이다. 그의 눈에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유주의자도, 신좌파도, 포스트모더니스트도 우선 의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런 그의 눈은 루쉰의 눈과도 흡사하다. 루쉰은 외국에서 ‘신명사’(新名詞)를 수입해 그 본의를 철저히 왜곡했던, 그리고 그것으로 문단 권력을 쥐기에 급급했던 5・4의 명사들을 비판했었다.

왕후이가 현실에서 지향하는 뚜렷한 목표는 중국의 사회적 평등과 사회적 공정성의 성취다. 그의 수많은 학술적 동지들도 한때 그와 뜻을 같이 했었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 이후, 그와 그의 친구들은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그를 비롯한 소수는 『독서』(讀書)와 『학인』(學人)을 근거지로 하는 비판적 학술운동으로, 또 혹자는 망명과 이민으로, 더 많은 이들은 대학과 정부 관료로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변화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외부의 압력이나 자발적인 선택으로 1980년대 계몽적 지식인들의 방식을 포기했다. 그들은 지식 규범의 문제를 논의하고 더욱 전문화된 학문 연구에 매달리면서 직업화된 지식 응용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즉 학문 직업화의 시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더 이상 지식인이 ‘문화 영웅’ 혹은 ‘선지자’가 될 수 없는 이 상업문화의 시대에 학문의 직업화는 어쩔 수 없는 추세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학문적, 도덕적 신념과 별도로 지식인은 학원과 정부의 일원으로서 현 제도의 운영과 새로운 제도의 기획에 참여해 일종의 ‘국가 이성’에 속하고 만다. 그 결과는 대단히 심각하다. 왕후이는 그 구체적 실태에 대해 “오늘날 중국 사상계는 자본 활동 과정(정치자본・경제자본・문화자본의 복잡한 관계를 포함하는)에 대한 분석을 포기하고 있으며, 시장・사회・국가의 상호 침투과 충돌 관계에 대한 연구 역시 포기하고 있다. 단지 도덕이나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 시야가 갇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특별히 주목해야만 할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즉, 중국의 지식인들이 국가 주도의 현대화 과정 그 자체에 복속되어 제대로 비판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유사 자본주의의 지평에서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에서보다 더 심화되고 있는 부의 편중, 빈부격차, 관료의 부패, 그리고 경제 개혁의 뒷전으로 밀려 지지부진한 정치 민주화, 대중문화의 이상 발전으로 나날이 위축되는 고급문화 등의 문제는 국가권력 및 거대자본과 거리를 두지 않고서는 도저히 엄밀한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율적 시민사회, 그리고 시민사회 주도의 공공영역이 자생적 발전을 이루기 힘든 중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위와 같은 조건에서 학술은 어용화 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담론투쟁이 장이 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모두 문화권력의 쟁취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왕후이가 분석하여 해체하는 담론이 최근 중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중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곧바로 받아들여 중국의 신계몽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신계몽주의의 주체성 개념과 역사적 태도를 비웃었다. 우리가 이미 상업화된 매체가 지배하는 소비주의의 ‘포스트모던’ 사회에 살고 있음을 근거로 신계몽주의의 낙후성을 비판했다. 그런데 왕후이는 중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보완 형식’이라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중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결론이 ‘시장화’에 대한 희망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가치의 구조를 해체한다고 하면서도 현대적 삶의 주요 특징을 구성하는 자본의 활동은 분석하지 않았고 시장화 과정에서 엄연히 자본의 제약을 받는 사회형태를 중립적이며 비이데올로기적인 ‘신상태’라고 이상화하였다. 그들은 “시장화의 결과로 반드시 낡은 ‘위대한 서사’가 만들어낸 불균형 상태가 극복되고 이 불균형이 만들어낸 사회적 동요와 문화 상실이 통합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다다른다. 서구에서 ‘신보수주의’의 혐의를 받기도 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중국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체제옹호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셈이다.


4. 무엇을 위한 해체인가


이상과 같이 현대 중국의 분석틀이 되어온 모든 선(先) 관념들에 대한 왕후이의 해체 작업은 얼핏 보면 무차별적이다. 그의 심중에는 절대적인 거대서사도, 지고지상의 명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다원주의, 전위주의와 국수주의, 시장주의와 계획경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등 서로 대립적으로 보이는 어느 한쪽에도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을 노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항대립적 사유 자체에 내재된 정치적 의도를 꼬집고 어느 항에 속한 담론이라도 파시즘이나 관변이데올로기 같은 최악의 형식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신봉하는 ‘주의’는 없다. 굳이 신봉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굳어진 ‘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태도이다. “현상에 대한 정확한 고찰을 토대로 어떤 사건이나 이념의 역사적 컨텍스트를 철저히 파헤치는 비판적・성찰적 태도”이다. 그에 의해 이미 『죽은 불 다시 살아나』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는 이것은 단순히 연구자의 태도를 넘어 지식인 일반의 온당한 태도로 요청된다.

한편 왕후이의 해체 작업이 단순히 ‘해체를 위한 해체’가 아닌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 그의 계보학적 선 관념의 해체는 중국적 모더니티의 지향이라는 연구 과정의 앞 단계에 위치한다. 즉, 자체의 전통과 연결된 채로 중국 근대사의 특수성 속에서 형성된 중국적 모더니티는 그 표상화를 위해 반드시 이전의 분석틀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서구적 모더니티관과 발전론적 사관, 과학과 민주주의 등의 가치를 지식의 계보학을 통해 해체하고, 보다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지평 위에서 중국적 모더니티의 형성사를 복원하려는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만 중국적 모더니티의 미래 또한 기획될 수 있다. 아마도 왕후이의 이어지는 대작, 『현대 중국 사상의 흥기』가 곧 그의 연구 과정의 중간 단계, 즉 해체에 이은 복원의 소산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두 번째 이유는 역시 성찰적 현실 비판을 위해서이다. 왕후이는 루쉰의 현실 비판을 검토하며 그람시의 용어,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유기적 지식인’이란 자신의 사상 활동을 사회생활과 밀접한 유기적 연계성을 갖도록 전개하는 지식인을 말한다.


루쉰 시대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미디어의 활동을 통해 사회・정치・대중과 직접적으로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문화적 실천, 특히 그 시대의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효과적인 사회・문화적 변혁의 주된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의 미디어에서도 ‘학자’나 ‘지식인’의 표상이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만 그런 ‘표상’의 ‘지식인적’ 특성은 문화적 허구와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지식인’의 미디어 활동을 추진하는 주요 원동력은 성찰적 비판 기능이 아닌, 지배적인 시장 규칙이기 때문이다.(p.436)


왕후이의 ‘유기적 지식인’은 우선 하나의 연계와 하나의 단절, 다시 말해 사회와의 연계와 각종 권력과의 단절을 전제로 하지만 그 구체적인 전략은 역시 ‘해체’가 될 수밖에 없다. 루쉰은 전통과 현대의 중간물로서 자신의 비극적 정체성을 오히려 전통적, 현대적 지식인 양자의 허위를 해체하는 무기로 삼아 평생을 일관했다. 이에 비해 왕후이는 적극적으로 전통적 지식과 현대적 지식의 복잡한 그물망을 스스로 습득함으로써 역시 오늘날 중국의 현상들을 낳은 배후를 철저히 해체하고 있다. 두 사람은 공히 유기적 지식인이며, 그들의 전략도 공히 계보학적 해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일 수도 있겠지만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가 우리에게 갖는 의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독재의 해소라는 중심 쟁점이 기본적으로 사라진 지평에서 ‘성찰적 비판’이라는 자신의 기능을 어떤 대상에 새로이 겨눠야 할지 다양한 모색을 해왔다. 환경, 소외집단, 생체권력, 소비문화 등 다양한 문제들이 연이어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것들이 거시적 목표가 사라진 지점의 깊은 공동을 적시에 다 메울 수는 없었다. 아울러 인문학적 가치의 절하와 대중문화의 발달은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뿌리째 뒤흔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택하는 길은 왕후이의 탄식과 그리 무관하지 않다. 직업훈련소가 된 대학의 교육 기술자로 편입되거나 소비문화적 출판, 미디어에 글을 파는 ‘글쓰기 기계’가 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길이 돼 버렸다. 물론 아직도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려는 이들이 다수 존재하겠지만 누구에게나 ‘유기적 지식인’이 되는 길은 좁고 지난하다. 당장 지식인이 연계해야 할 사회는 과거와 달리 그들의 목소리에 크게 반향하지 않는다. 그 반향의 나직함에 절망하다 자칫 인기를 좇는 ‘지식 연예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묻고 싶은 건, 지금이 지식인의 성찰적 비판이 무색해진 시대라 하더라도 과연 인류를 위협하는 모든 위기가 이미 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사적 사건들과 일상의 양태들이 어떠한 비판도 필요 없이 자동적인 메카니즘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할 수 있다면, 또 한 가지 더 물을 것은 왜 우리는 자신의 실존을 걸고 고민하지 않으며 절망보다 체념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아진 물질적 풍요? 아니면 철저한 사회적 분화로 인한 ‘가로지르는’ 사유의 결핍? 이런 이유들이 그저 변명으로 느껴지게 하는 데 왕후이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혹자는 그 진정한 이유를 찾고 새롭게 지식인의 정체성을 구축하게 하는 원동력을 그와 그의 작업에서 찾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의 작업을 본뜬 한국적 모더니티의 지향, 한국적 사상과 관념의 계보학적 작업 같은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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