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가게 소년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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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평생>의 독자로서 기대한 높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훨씬 못 미쳐서 아쉽다. 하긴 그만한 작품을 계속 써낼 수는 없는 거니까. 

아침에 이 책 읽기를 마무리하고 일터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지금 메모를 적기까지, 책에 대한 생각이 계속 변해갔다. 이쯤에서 일단락을 짓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자. 

<더리더> <금테안경> 등 동시기를 다룬 여러 작품이 떠오르는데 그들보다 정치적 사고로서는 훨씬 못 나갔다. 이 점은 <한평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시기 광란의 카니발리즘을, 그 죄성을 '고발'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사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드러났다면 그 작품은 실패한 것이고, 드러나지 않았다면 의도란 사후적으로 추정되는 것일 뿐이다. 독서에서 작가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독서의 효과만이 중요하다)가 아니다. 원래 많은 좋은 소설들의 의미는 고발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들의 그 쓰기를 통해, 그리고 그 쓰여진 서사 안에서 고발은 이미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창작의 주된 목적도 아니고 유일한 목적/의도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한평생>에서는 한 山남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눈앞에 그려졌다(이것이 그 작품의 효과였다). 그 마음은 거칠고 단순하고 진실한 것이었고, 일생 갖은 비바람 맞으면서도 그 원형을 간직하였다. 그래서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일종의 山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山소년이다. 예상된 생활고로 인해 산과 호수, 그리고 엄마로부터 어느날 아침 도시로 쫓겨 나온 소년. 그 도시에서 그는 부재했던 아버지를 한꺼번에 둘이나 만나는데, 이 두 아버지의 사회적 모습은 무척 다르지만 둘은 음양으로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한다. 그 둘은 모두 자신의 ''을 가진 전문가 남자이다. 정신분석가는 말할 것도 없고, 담배 가게 주인 역시 전문적이다. 그들은 세계와 인간의 정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시대에 대하여 염증과 공포를 느끼지만 의연히 대처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하여, 또 사랑에 대한 소년의 갈구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소년은 이 두 아버지를 통하여 사랑을 찾아야 하는 인생의 필요를 배우고 액션에 돌입하지만, 인생이 그리 쉽던가, 실패는 예정되어 있다.

(*엄마와 소년이 주고 받는 편지는 그야말로 '정신분석적' 설정이다. 소년이 제대로 된 아버지들을 만나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 내내 이 엄마는 상징 또는 내면의 소리로만 남는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만 그녀는 다시 육체를 되찾고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진 역할--생육하고 기억하기--을 담당한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안 아네츠카의 내면 역시 독자의 시야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짐작컨대 그녀는 야만의 시대에 소수민족 여성에게 주어진 극히 제한된 생존의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학에 기계적 중립을 요구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고, 더구나 이 작가는 남자의 내면을 그려내는 데 관심과 특기가 있으니 여성 인물이 블라인드 처리되었다고 불평할 것은 아니겠다. 돈가츠 집에서는 돈가츠를, 설렁탕 집에서는 설렁탕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프란츠는 두 아버지와 끈끈하게 연결될 뿐만 아니라 더욱 엄중한 것을 배우게 된다. 자기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사랑 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원칙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욕망 뿐만 아니라 양심도 포함한다. 자기 업에 대한 성실과 타인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상식--이것이 양심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은 왔다가 흘러가지만 삶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 삶은 이미 광란의 시대 속에 놓여 있다. 그 시대는 양심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 앞에서 한 아버지는 목숨을 잃고 다른 아버지는 도망쳐 목숨을 건진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지만 프란츠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자기 마음의 흐름에 집중하며 그것에 충실하라는 것. 그것을 사회적 언어로 바꾸면 '저항'이라는 두 글자가 된다. 특히 '용기를 가지고 끈기 있게 나아가면 자신의 자취를 역사에 남길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한 마디는 사랑이라는 두 글자 보다도 더 크게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 프로이트의 정리된 언어를 통해 담배가게 주인의 삶/과 충격적인 죽음을 의미화하게 되었기 때문. 언제나처럼 이 단순한 소년은 깨달았으면 바로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즉각 희생된다.

작품을 읽으며 한동안은 정신분석/프로이트라는 소재가 소설에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세의 망년지교라는 낭만적 소재를 선택했다 해도 왜 굳이 프로이트를 등장시켜야 했을까. 왜 프란츠가 죽음의 길로 나서는데 프로이트의 권위를 이용했을까.

이것이 아침에 했던 생각인데, 지금은 이렇게 본다. 이 소설을 작가는 일종의 사극처럼 기획한 것이다.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을 내세우고, 그 주위에 가상의 인물, 아주 작지만 사랑스러운 인물을 배치한 것이다. 모두가 주목하는 역사적 인물 옆에 우직한 상이용사 담배가게 주인과 그 주인이 거둔, 옛 애인의 시골뜨기 아들같은 무명씨들이 살았는데, 그들은 놀랍게도 그 역사적 인물과 아무런 허위 없이 정신적으로 교감하였고, 그 역사적 인물도 감히 보여주지 못했던 양심과 용기로써 행동했다. 그 결과 그들은 이름 없이 사라졌고, 도망간 역사적 인물은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역설.

책을 덮고 12시간 이상 흐른 지금 나라는 독자의 마음에 최종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의 앳되고 참된 마음이다. <한평생>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한 종류의, 보기 드문 마음을 그리고 있다. 프란츠도 에거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단순하고, 성실하고, 못 배웠고, 박복하다. 에거는 한평생 산 속에 살았기에 아버지도 없고 사랑도 잃었지만 그 마음을 가진채 장수할 수 있었다만, 도시로 내보내진 프란츠(에거와는 달리 그는 노동에 적합한 육체가 아니며 지적인 활동에 큰 흥미를 느낀다)는 거기서 파더 피겨를 만나 경험과 배움을 얻고 자신이 깨달은 대로 정치적 행동을 한다. 보헤미안 여자에게도, 두 아버지에게도, 엄마에게도, 프란츠는 모두 그들 모두가 예상치 못했을 만큼 진심이었다. 의심하지 않고 냉소하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과 온마음으로 교감하는 그 마음. 그런 마음의 솟아오름(나이 들고 약아지면 바로 사라지는 현상이다)으로 인하여 폭압의 시대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젊은이들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귀하고 가엾고 위험한 마음들.

소설을 쓰는 작가의 충동은 무엇일까를 가끔 자문하는데 그 답은 늘 바뀐다. 오늘은 '이 세계의 복잡성을 파고들고 드러내보이고 싶어서'라고 답하고 싶다. 단 그 복잡성에 기여하는 것은 끝없는 잔머리나 비열한 음모, 예측 불가의 관계 파탄이나 천재지변 뿐만 아니라 이런 단순한 마음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베르테르를 비웃었는데 그 비웃음을 거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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