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서남동양학술총서 20
정문길.최원식.백영서.전형준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그러나 중국의 근대를 대응-충격론으로 설명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이다. 곧 서구의 침략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이 지나칠 정도로 부각되면서, 그 과정에서 중국 주위의 여러 민족이 어떻게 식민지로 전락해갔는지, 그런 과정에서 중국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하는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이나 류큐, 타이완, 월남이 식민화되는 데 중국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또 중국의 서북에 있는 위구르족이나 몽골족, 티베트족 들은 어떻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되어갔는가? 민족국가의 성립이 최대의 과제였던 근대기에 그러한 희망을 갖고 있던 주변 민족에게 청 정부는 어떤 정책을 취했는가ㅑ? 다시 말해 19세기와 그 전후 시기에 중국이 동아시아라는 지역 속에서 어떤 성격을 지닌 국가였느낙? 또 오늘날의 중국은 과거와 어느 면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 따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42)

청국의 동부로부터 남부에 걸쳐 있던 조선, 로큐, 월남이라는 조공국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씩 지상의 독립국 명단에서 사라져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란 메이지 유신과 같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내부 개혁을 단행하고, 대외적으로 팽창주의 방식으로 진전된 경우도 있을 터이나, 청조의 조공국들에게는 기나긴 식민화의 길을 의미하였따. 그런 와중에서 청조는 보호국인 조공국의 안위보다, 어떻게 하면 조공국을 이용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하는 데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결국 조공 국가로 이뤄져왔던 동남 연안의 방파제들이 무너지면서, 청조는 이제 본격적으로 강대국과 전면적으로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말의 개혁은 이러한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 나온 이른바 과분의 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가들의 주변 국가관도 중화 질서의 유지라는 구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50)

이보다 좀더 나가면, 티베트의 독립에 귀를 기울이지만, 신장에 대해서는 그런 고나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티베트 독립은 미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다 달라이 라마라는 티베트의 지도자가 전세계에 ‘티베트적 영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미국이 티베트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진짜 이유는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티베트의 독립 운동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견제하려는 외교 전략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웨이징성...와 같은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의 주장과 유사하다. 이들은 중국 정부나 중국인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티베트 인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중국의 티베트 문제는 중국 내 반체제 운동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60)

이와는 달리 신장은 기독교인들이 거부해 마지않는 이슬람의 땅이다. 게다가 그 서쪽에 있는 서투르키스탄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러시아에 정복된 뒤, 소련 붕괴 전까지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고, 동투르키스탄도 단기간이나마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생각해서 무관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중국사 연구 전통이 영국의 그것을 계승한 탓일 수도 있고, 또 동투르키스탄의 독립 운동이 카자흐나 터키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보가 제한된 탓일 수도 있다. (61)

다시 말해 동아시아적 근대는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청 제국의 팽창이 극도에 달했던 18세기 중기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근대기의 민족주의 역시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응한 중국적 형태 이전에 중국의 팽창에 대한 소수 민족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바로 이 점에서 근대 중국은 조공국과 소수민족의 희생 위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국가와 민족 중,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류큐는 일본의 일부이고, 월남은 격심한 전화 속에서 벗어나 이제야 새 길을 모색하고 있다. 또 티베트 민족과 동투르키스탄인들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있으며, 몽골족 역시 내외 몽골로 분단되어 있다. 현재의 동아시아 지역이 안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이미 두 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63)

당시 문단을 살펴보면, 장타이옌이 <문학총략>에서 말했듯이, 구문학 쪽에서는 완원 등의 변문파처럼 개인의 수사적 능력을 중시하는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이를테면 시문이 공동체의 노래이던 시기는 일찌감치 사라졌다는 말이다. 20세기 초 지식인들이 시문이 아니라 소설을 보다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에는 분명 변문파 등의 시문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었을 법하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장르가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보다 더 밀접한 장르에 대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소설 장르의 대중성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설 장르 본래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이들에 의해 읽혀졌을 법하다는 말이다. (291)

왕꾸어웨이가 중국인의 현세적이고 낙관적인 사유에 대해 그토록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에 보다 철저하게 몰입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리쩌허우가 중국인의 이성의 특징이라고 한 ‘실용 이성‘의 작동을 벗어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인들은 고대 그리스처럼 추상적 사변의 길로 나아간 것도 아니고, 인도처럼 해탈의 길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도의 실용 탐구에 집착한다. 따라서 실용 이성이 강조하는 것은 주로 윤리적 책임의 자각이다. 왕꾸어웨이의 사유에 관한 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실용 이성의 작동으로 말미암아, 인식론과 미학이 언제나 윤리학으로 복속되고 만다는 점이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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