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오오키 야스시 지음, 노경희 옮김 / 소명출판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이상의 자료를 통해, 자손이나 문인, 친구 등이 활발하게 선인...의 문집을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집...>, 즉 가정 만력 이후 천계 승정 연간에 이르는 사람들에게서 문집을 판각하였다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섭옹...이나 송렴... 등과 같이 원말 또는 명초에 저자 생전의 시문집이 간행된 경우도 있지만, 가정 만력 연간에 이르러서는 자손이 진사에 급제한 일 등을 계기로 하여 조상의 문집을 판각했던 예도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윤집...>을 보면, 별집...의 간행이 승려나 부녀자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원이야말로 경전 인쇄의 가장 큰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승려의 문집이 간행된 것은 한편으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42)

인쇄출판의 초창기, 당... 오대...부터 북송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촉...이 출판의 중심지였다. 이는 우선 이 지방이 종이 및 목재의 산출지라는 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남송...시대가 되면, 섭몽득...이 <석림연어...> 권8에서 ......라고 한 것처럼, 항주 사천 복건 그리고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에서 출판이 성행하게 되었다. 항주는 섭몽득 당시 남송의 수도...였다. 이곳은 대운하의 남쪽 종점이자 강남 지역의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으니, 여기서 출판업이 꽃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종이 산지로 유명한 소흥...이 바로 옆이라는 이유도 있다. 복건의 건양은 송대 이래 전국적인 출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49)

족보 또한 가각본의 한 종류였다. 족보를 인쇄할 때는 목활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람 이름으로 같은 글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또 조판이 완성된 뒤에 이를 임의로 고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족보가 거의 정덕 가정 연간 이후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면, 족보의 보급 또한 인쇄술의 보급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63)

이제까지 살펴 본 것처럼, 방각본이라 하면 곧 복건의 방각본을 떠올릴 만큼 조악한 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명의 가정 만력 연간에 이르러 방각본의 성격에도 한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앞서 육심...의 <금대기문...>이나 호응린...의 <경적회통...>에서 소주의 책을 정교한 판본이라 칭찬하였는데 이 지역의 방각본 중에 정교하게 제작된 책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68)

각공의 이름을 표시하는 방식의 변화와 함께, 이러한 분업체제의 또 다른 결과로 ‘명조체...‘라는 글자체가 완성된 일을 들 수 있다.... 타케무라 신이치...의 <명조체의 역사...>에 따르면, 명조체가 탄생한 것은 정덕...에서 가정... 연간에 걸친 시기의 일이었다고 한다. 기하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몰개성적인 명조체가 등장한 것은, 조판의 신속화, 좀 더 구체적으로 분업화의 필요를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80)

이상의 기록을 통해, 규촌의 각공들이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북경 협서... 강서... 등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로 이주하고 있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한 마을 출신의 동족이 하나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 규촌 황씨 등은 이른바 동족... 길드의 좋은 예가 된다. 그중에서도 25대부터 37대에 이르기까지, 즉 명말 청초에 해당하는 시기에 떼를 지어 남경 소주 항주로 이주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도시가 신안상인들의 중요한 상업거점에 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공들의 이동과 신안상인의 활동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명말의 출판은 실질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이끌어 온 것이다. (101)

후에 동기창 스스로도 집이 불타버린 사건을 ‘민초...‘라 불리는 것을 꺼리며, ‘사초...‘라고 하였다. 이러한 동기창의 발언은 실제로 일을 저지른 것이 누구건 간에 결국 이 사건의 배경에는 사인들의 선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동기창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의 진원지는 앞 장에서 서술했던 신중간계층으로, 여기서 그들이 ‘인쇄물의 배포‘라고 하는 새로운 전달 수단을 통해 여론조작을 일으킨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159)

당사의 활동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건국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이미 쇠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청대의 학술에 끼친 명말 당사운동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명이대방록>을 지은 황종희...는 동림파의 영수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부친은 위충현에게 참살당한 황존소...였다. ... 일반적으로 청대의 학자들은 명대의 학문을 공소한 의론이라 하며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자료를 근거로 두면서 자신의 독서 성과를 보이는 청조 고증학의 방법론 그 자체는 한 사람의 학자가 경사자집...에 걸쳐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객관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청조 고증학이 태어날 수 있던 물리적 기반은, 인쇄의 보급을 통해 총서를 필두고 수많은 책이 간행되면서 종전에는 입수하기 어려웠던 책을 개인이 쉽게 볼 수 있게 된 명말에 이르러서 준비된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기반으로 보다 정밀한 학문을 이룬 결과, 전대 학문의 결점을 발견할 수 있던 것이 곧 청대 학자들에 의한 명학...의 비판인 것이다. (171)

그렇게 본다면, 명말에 다수 등장했던 산인 자체가, 그야말로 출판문화의 부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출판업이 성행했던 강남 지방 이외에서는, 산인의 존재를 들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진계유의 후배였던 산인 이어...가, 청초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방대한 분량인 자기 저작의 판목을 들고 항주에서 남경으로 옮겨와 출판 활동을 하면서, 자기 책을 무단으로 출판하는 일에 엄격하게 항의했다는 일화에서는 ‘산인...의 면모‘가 생생히 나타나고 있다. 즉 이어에게 있어서 판목(판권)은 매우 중요한 생활양식이었던 것이다. (192)

보다 넓은 시야에서 지식인과 출판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예전의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과거에 합격하여 출사...하는 것 이외로는 명리...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출판‘이라는 새로운 활동의 장이 출현하게 되면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명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신분적으로는 일개 생원에 불과했던 진계유가 유명인이 될 수 있던 것도, 명말이 일어난 출판업의 융성을 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3)

에도시대 초기에는 명말의 중국과 이렇게 문자 그대로 ‘동시대‘ 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의 ‘쇄국...‘과 중국에서의 ‘명청교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겹치게 된다.
......
명왕조의 멸망 이후,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혹은 청조 토벌을 위해 지원군을 요청하러 온 정성공...과 같은 이들, 혹은 청의 세계에 사는 것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망명해 온 주순수... 등과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명왕조에 절의를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당시의 일본인은 ‘명말의 문화‘를 배웠다. ‘이적‘인 청의 문화는 적극적으로 수입되지 않았으며, 설사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이 한참 흘러 에도 후기에 이르러서야 일어날 수있던 일이었다.
‘쇄국‘과 ‘명청교체‘를 통해, 에도시대 사람들에게 중국의 시계는 ‘명말...‘을 가리킨 채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27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금지되었음에 틀림없을 책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 중국의 출판통제는 이미 출판되어 나온 책을 대상으로 하여 이 책은 적절하지 않으니 책과 판목을 불태워 버려라, 혹은 불온한 부분을 삭제해라, 등과 같은 명령의 형태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일본 등과 같이 출판 이전에 사전심사를 실시했던 것이 아니었다. (279)

중국에서는 인쇄술이 보급된 시기에 서점뿐만이 아닌 개인이 출판한 책들도 증대하고 있던 것이, 출판 수량의 증가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중국의 출판은 본질적으로 ‘가각...‘의 형태라 할 것으로, 결국 ‘방각...‘이라고 하는 것도 가각의 특히 전문화된 형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국사회의 근저에서 가장 힘을 갖고 있던 것은, 종족의 조직이다. 그 종족이 출판의 주체가 된 경우는 국가도 건드릴 수 없었기에, 아예 사전에 통제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은 아닐까. (282)

공간에 높은 지점과 낮은 지점이 있는 것처럼, 시간에도 높은 지점과 낮은 지점이 있다면, 그 최고 지점은 1640년부터 1660년의 기간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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