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와 쿠스쿠스 - 요리하는 철학자 팀 알퍼의 유럽 음식 여행
팀 알퍼 지음, 조은정 옮김 / 옐로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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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 음식이 이렇게 형편없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들에게 영국 음식 없는 삶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16) ……
오븐에서 갓 꺼낸, 입천장을 데일 정도로 뜨거운 감자 파이는 영국 키친에서 가장 중요한, 심장과도 같은 존재이다. 만약 섬나라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륙의 음식을 동경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겠지만, 그러나 호사스런 대륙의 음식들은 감자가 기본이 되는 영국 음식의 따뜻함과 집밥이 주는 정직함을 가지지는 못했다. 음식이 예술에 비교되는 프랑스나. 재능에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주방에서 감자는 특별한 손님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 그러나 우리 영국 사람들에게는 감자는 오랜 시절을 함께한 제일 편안한 친구일 뿐이다. 요리를 할 때, 우리는 두 팔을 벌려 감자를 반기고 등을 한번 툭 치며 이렇게 말한다. "들어오시게나, 오랜 친구여, 자 다리를 편안하게 올려놓고 한잔하시게. 그동안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네!" (18)

진정한 애프터눈 티의 본고장은 잉글랜드 남서쪽에 위치한 콘윌과 데본 지역이다.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이 지역에는 로마인과 앵글로섹슨의 침략을 받기 이전에 사용했던 언어를 아직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에서 오래된 습관들은 사라지기 쉽지 않다. 그리고 만약 정말 수백 년 전 영국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둘러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이 지역을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24)

우리가 당근 케이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옛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만약 뿌리채소를 재료로 해서 만든 디저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릴 수만 있다면, 당근 케이크의 맛은 유쾌한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당근 케이크의 맛의 비결은 당근이 가지고 있는 적은 양의 수분이 베이킹 과정에서 케이크에 흡수되어 완벽할 만큼 촉촉한 식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사과나 서양배와 같이 신맛 나는 과일을 사용하면 케이크를 구울 때 수분이 과도하게 많아져 케이크가 질척해질 수 있지만, 당근은 대부분의 과일보다 수분 양이 적어 케이크로 구워질 때 적당한 양만의 수분을 남기므로 케이크를 망치게 될 위험성이 거의 없다. (30)

케첩은 미국 소스다. 테이블에 케첩이 놓여 있다면 일종의 속임수다. 만약 케첩에 손을 댔다가는, 이 게임에서 바로 지게 된다.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케첩을 무시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영국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42)

이런 곳에서, 식사라는 행위는 단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과 같은 수준으로 격상된다. 이곳에서 식사는 몇 시간씩이나 계속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긴 식사 시간 동안 실제로 먹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줄창 담배를 피워대며, 사실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 거들먹거리며 떠들어대느라 여념이 없는 듯 보인다. 남유럽 사람들의 저녁 테이블에서는 이렇게, 마치 정신병원을 방불케하는 다양한 헛소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그러니?] 만약 그 자리에 초대받게 된다면, 무언가에 격노한 현대판 소크라테스처럼 고함을 치고,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이 요란한 향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보아라. (55)

프랑스 사람들은 먹고 요리하고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앞서 말했듯이 레스토랑이라는 개념 또한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레스토랑은 빗대어 말하자면 음식의 대성당과도 같고, 또한 비스트로…와 카페는 작고 소박한 시골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해 종교만큼이나 강한 신념을 가진 프랑스 사람들과는 음식에 대한 주제로는 농담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이미 프랑스 음식 문화를 어지럽히려는 사람들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하고자 또 다른 법을 만들려고 추진 중에 있다. 새로운 법은 어떤 음식점이라도 현장에서 모든 조리 과정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73)

한국의 빵집 주인들은 빵 종류와 파티셰리를 구분 없이 같은 장소 안에 몰아 넣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대부분 한국의 빵집에는 각종 케이크와 패스트리 그리고 한국화된 프랑스 파티셰리들이 사이 좋게 함께 놓여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사실 디저트류를 만드는 ‘파티셰’들은 빵을 만드는 ‘블랑제’를 막노동을 하는 인부들 같은 저급한 직업이라 여기며, 블랑제들을 피하기 이해서라면 가던 길을 돌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블랑제 역시, 파티셰들은 심장병 의사나 치과의사의 매출 향상에나 도움을 주는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속물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빵은 민중의 음식이요, 파티세리는 응석받이들의 특권과도 같다. (78)

프랑스 사람은 빵, 치즈, 그리고 와인만으로 살 수 있다. 사실 내가 아는 프랑스 사람 중에는 실제로 그렇게 먹고 사는 사람도 꽤 많다. 거기에 짭조름한 올리브 몇 개와 지중해산 신선한 플럼 토마토를 조금 올려준다면, 우리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던 에피쿠로스조차도 부러워할 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98)

다음은 파스타 소스에 넣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당근, 콩, 그리고 특별히 양파입니다. 양파는 자신은 소스와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기름을 잔뜩 흡수하는 재료랍니다. 많은 양의 기름은 소스가 좋은 맛을 내는 것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토마토 소스 안의 물 분자와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기름은 파스타 위에 기름을 쏟아 부은 것처럼 둥둥 떠다닙니다. 두꺼운 기름층을 두른 파스타는 정말 식욕을 떨어뜨린답니다. 제발 유념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112)

젤라또를 ‘이탈리안 아이스크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만약 이탈리아 사람들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분노의 침 세례를 피하고 싶다면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런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해외여행 중에 한국 사람들이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사람들 역시 그들의 소중한 젤라또가 아이스크림으로 오해받는 것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129)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런 스페인을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음식이다. 사실 수천 갈래로 쪼개진 나라 안에서, 아마도 진정한 동질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음식뿐일 것이다. 스페인의 음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음식에 관한 한 지역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들 사이의 국경도 건너가고, 언어적인 장애물도 통과해 나간다. 가스파초는 그라나다와 빌바오에서처럼 마드리드에서도 가스파초로 통한다. 수많은 스페인의 음식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탄생되었지만, 각 지역들의 이웃 혹은 적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공유하는 유일한 한가지이다. (150)

물론 ‘과일 맥주’라는 것이 그 이름만큼이나 실제 맛 또한 불량식품 같다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과일맥주는 대량생산 과정에서 과일의 맛과 향을 대신해 설탕이나 과일 시럽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맥주 양조장들과는 달리, 벨기에의 작은 양조장에서는 진한 맛의 다크 체리나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과즙이 가득한 복숭아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맛을 지닌 산열매들을 직접 사용해서 맥주를 만든다. (173)

레스토랑에서 라클렛을 주문하게 되면, 일단 웨이터가 커다란 바퀴처럼 생긴, 소젖으로 만든 치즈를 들고 나타나, 매우 위험해 보이는 버너를 사용해 커다란 덩어리의 치즈를 녹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고는 크토 아 라클렛…이라고 불리는 <반지에[오자] 제왕>에 나오는 오크나 들고 다닐 법한, 고기를 자르는 큰 식칼처럼 생긴 도구를 가져올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칼을 사용해 녹아서 형체가 없어져가는 치즈를 긁어, 심장 전문의조차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하기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을 우리의 접시 위에 얹어줄 것이다. 또한, 그는 누군가가 먹다 남긴 음식처럼 보이는 쭈글쭈글해진 삶은 감자와, 오이나 양파 피클 같은 것들을 함께 가져다 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이 만찬을 즐길 준비가 된 것이다. 100유로를 지불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것이 전부다. 아마도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바짝바짝 속은 타 들어가고, 식사를 마칠 즈음 배는 완전히 더부룩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진짜 라클렛을 경험해보았다고 할 수 없다. (190)

실제로 불가리아의 시장을 돌아다녀본다면, 마치 누군가가 온갖 색깔의 물감이 가득 들어 있는 폭탄을 터뜨린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곳에 쌓여 있는 각양각색인 음식들의 종류는 정말 끝이 없어 보인다. 한쪽에서는 베이루트의 뒷골목에 있는 식당보다 더 아랍스러운 냄새가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며, 또 다른 쪽에서는 이탈리아 시장에서 풍겨오는 듯한 냄새가 우리의 코를 자극할 것이다. 농담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불가리아 사람들조차도 불가리아 음식의 다양성에 대해서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16)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일반적인 숙소를 선택하지만, 러시아의 여행자들은 독특한 민박 체험을 선호한다. 이런 민박은 과거 소련의 그늘 아래 있어서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매우 흔한 일이다. ……
다음 단계는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다. 서로 합의가 되면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다. 비록 이런 민박이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완전한 불법이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우리가 여행하고 있는 지역의 토박이들처럼 그곳의 문화를 직접 경험하며 생활해본다는 것은 너무나 큰 즐거움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지역색이 반영되지 않은 천편일률적인 체인 호텔들의 무미건조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219)

캄폿은 아마 러시아의 수돗물만큼이나 누렇고 뿌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캄폿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상쾌한 음료다. 캄폿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선 과일을 물에 넣고 천천히 끓여주다가 과일의 시큼한 맛을 줄여주기 위해 약간의 설탕을 넣어주면 끝이다. 키예프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우크라이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방을 하나 빌려서 몇 달 동안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 집의 어머니는 항상 5리터쯤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물병 여러 개에 캄폿을 담아 냉장고에 보관했다. 아마 과일을 끓여 만든다는 설명에, 캄폿에서 과일 주스와 같이 풍부한 과일 맛이 날 거라고 기대할지도 모르겠지만, 캄폿은 대개 말린 과일을 사용해서 아주 천천히 끓여주기 때문에 과일의 맛이 매우 부드럽게 느껴지며, 전혀 신맛이 나지 않는다.
캄폿의 재료로는 거의 모든 정류의 과일이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손맛을 자랑하는 한국의 아줌마들이 자신만의 김치 레시피를 가지고 있듯이, 러시아의 바부슈카…들 또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캄폿을 만들기 때문에, 캄폿의 레시피는 실로 엄청나게 다양하다. (229)

러시아 사람들의 새해 첫날 저녁 일과는 무려 5시간에서 길게는 10시간 가량을 이렇게 마요네즈를 듬뿍 넣은 샐러드들을 포크에 수북하게 담아 부지런히 입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키는데, 그 모든 한 모금마다 시적인 사색을 담은 장황한 건배 문구가 따라온다. 비유와 운율, 위트로 가득한 그들의 건배는 끊일 줄 모르고 계속된다. 이는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자신들 속에 푸슈킨의 정신이 조금이나마 깃들어 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238)

회색 콘크리트와 녹색 자연으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여행으로 끌어당기는 본질은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광활한 대자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야간을 참아가며 힘들게 모은 돈을 뚝 떼어,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향하는 비싼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고, 바가지에 가까운 비싼 호텔에 머물며, 심지어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메뉴가 놓인 호사스러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만드는 그것은, 바로 촉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볼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다.
사실 우리가 대담하게 촉감, 맛과 냄새와 같은 감각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인디애나 존스와 같은 진정한 문화 탐험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감각이라는 본능에 온몸을 맡길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음식을 통해서만 찾아볼 수 있는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향해 전 세계의 시장통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그 어린 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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