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쿡 - 누들로드 PD의 세계 최고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이욱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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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코스요리와 비슷하다. 세상맛을 배우는 애피타이저...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아 목표를 성취해야 하는 메인요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 식당에서야 전체-메인-디저트가 순서대로 이어지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이의 인생은 달콤한 디저트부터 머저 즐기다가 메인요리라는 도전의 시간을 영원히 맛보지 못하고 끝나기도 한다. 반면에, 일에 미쳐 버둥거리다가 달콤향긋한 디저트를 아예 맛보지 못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평생 자기 길을 못 찾고 변죽만 올리다가 끝나는 전채요리 인생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코스요리는 어찌 보면 공평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순서도 제각각이다. (9)

"이 감독, 요리를 배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요리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요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당근을 똑같은 크기로 재빨리 채 썰 수 있는 요리사는 많지만, 당근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생각해낼 수 있는 요리사는 드물지요." (27)

요리사가 되는 과정은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튀김요리라도 할라치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기름 솥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렇다고 치례 겁을 먹고 멀찌감치 서서 음식을 던져넣었다가는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기름에 혼비백산하게 된다. 무딘 칼이 위험하고 날 선 칼이 안전하다는 것, 뜨거운 것이 두려울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 주방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그 아이러니를 먼저 배워야 한다. (71)

작가라면 남들과 변별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디자이너라면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야 하지만 요리의 세계는 다르다.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지난번에 맛있게 먹은 음식이 이번에도 똑같은 맛을 내기를 기대한다. 요리에서는 피카소급의 몇몇 대가가 혁신을 일으키면 그걸로 충분할 뿐,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요리는 표절이 관대하다 못해 심지어 조장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누군가 거장의 요리를 똑같은 모양, 똑같은 맛으로 복제해냈다면 그는 손가락질을 받는 게 아니라 칭찬을 듣는다. 알랭 뒤카스나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를, 그것도 풀코스 요리를 똑같이 만들 줄 아는 셰프는 양심 없는 삼류 요리사가 아니라 천재인 것이다. 작가가 남의 문장을 베끼면 표절이지만, 요리사가 남의 요리를 베끼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 재현이다. (91)

42세인 토니는 레바논 사람으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요리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이미 열 살 때 샌드위치를 만들어 축구장 앞에서 팔기 시작했다. 18세이 영국에 놀러왔다가 주저앉아 접시닦이부터 배웠다. 어린 나이였지만 술과 담배를 비롯하여 모든 유흥과 담을 쌓고 하루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주방일을 배웠다. 그는 22세 때 자신의 첫번째 식당...을 열었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십 년 전 비로소 오랜 꿈이었던 레바논 음식점을 열었다.
......
"이 모든 아이디어와 메뉴들이 어디서 나온 거죠?"
"어렵지 않았어요. 가난하던 시절, 내가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 갖고 싶었던 물건들, 살고 싶었던 공간의 꿈을 모아놓았을 뿐이지요." (121)

그럼 뭘까? 내 생각에 프랑스인들은 요리를 단순히 먹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요리를 음악이나 미술작품과 같이 음미하고 비평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요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일찍이 표준화하고 체계화했다. (128)

프랑스인들이 요리를 사유의 대상으로 보고 요리의 체계와 용어를 고안한 것이 프랑스 요리의 지위를 드높이는 데 크게 작용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은 르 코르동 블뢰 같은 직업 요리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요리학교는 프랑스 요리의 지식과 규범을 집대성하여 프랑스 안팎으로 전수했고, 대중은 그것에 문화적 권위를 부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최근에야 알마...같은 국제적 명성의 요리학교가 세워졌지만 르코르동 블뢰는 이미 개교 100년이 넘었다. 오늘날 뉴욕, 바르셀로나, 도쿄, 밀라노의 유명 요리학교들이 프랑스 요리학교의 틀을 그대로 베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요리가 주걱으로 맞아가며 배워야 하는 도제적 ‘기술‘일 때, 프랑스 요리를 ‘학문‘으로 전환시켰다. (131)

또하나, 요리학교의 목적인 ‘기능‘과 ‘테크닉‘에 국한되어 있다면 많은 돈을 들여 굳이 유학갈 필요가 없다. 요리유학을 떠나기 전 켄 홈이 충고했듯이 내가 르 코르동 블뢰에서 배운 것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요리를 ‘생각하는 방법‘이었다. 전혀 다른 국적과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 교실에 모여, 한 입 거리밖에 되지 않는 음식을 앞에 놓고, 토론하고 맛보고 비평하고 논쟁하는 과정, 내가 요리학교에서 배운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시간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는 실제 레스토랑과 달리, 다양한 레시피의 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게 하는 수업방식은 요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기본을 반복하며 전체를 바라보는 훈련이 끝나야 비로소 자신만의 생각으로 창조적인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133)

나는 켄 홈을 보면서 요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요리사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문화적 소양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켄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셰프는 많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다른 셰프들이 갖지 못한 능력, 즉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1000명의 요리사 가운데 999명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칼질을 한다면, 한 명은 그 요리를 생각하고 분석해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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