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쑤, 동북을 거닐다 - 제3회 루쉰문학상 수상작
쑤쑤 지음, 김화숙 옮김 / 포북(for book)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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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의 민족들이 도망치듯 중원으로 떠났던 대규모의 이동을 오늘날 다시 보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한 도망자다. 인류 앞에는 영원한 중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걱정스러워졌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창조한 문명의 유혹에 빠져 뛰어 들어간다면, 누가 우리를 구해 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선비족은 우리에게 동굴을 남겨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걷게 하고, 또 한편으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79)

어떤 사람들은 중원의 농경 민족이 북방의 유목 민족을 두려워하여 장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유목민들도 중원을 두려워했고, 유목민 스스로도 서로를 두려워했다. 나는 산하이관에서 중원에서부터 동북으로 향하는 장성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동북의 소수 민족들이 쌓은 장성도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성은 중국에서 일종의 모방과 경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장성을 쌓는 일은 이미 중원문명의 확장처럼 되어버렸고, 모든 중화 민족이 너나 할 것 없이 쫓아 하는 일이 되었다. 각각의 장성들은 한 민족의 노래가 되었으며, 한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생명의 끈이 되었다. 장성의 기복은 곧 한 민족의 흥망성쇠와 같았고, 그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94)

그 후 100여 년 동안 중국인들은 평안한 날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날들의 이면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역사는 잘 알려 주고 있었다. 그 세월 속에 숨겨진 것은 아주 커다란 비극의 복선이었다. 그 날들은 일종의 훈련 같은 것이었다. 승리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러시아인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강희제는 이 모든 것들을 보지 못했고, 그의 자손들이 모든 재난을 감당해야 했을 뿐이었다. (108)

나는 이 두 엘리트와 토비에 관한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장쭤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자신이 토비였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줄곧 기민함을 숨기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또한 입으로는 항상 무인은 정치를 모른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을 쓰러뜨렸다. 나는 북양 군벌들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사라지고 장쭤린만이 최후까지 남아 웃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생 세 번에 걸쳐 관내로 진출했고, 마침내 마지막 세 번째에 중화민국군정부... 육해공 대원수로 취임하면서 북양 군벌의 마지막 정부를 장악했다. 다시 말하면, 매코맥이 말했던 가장 황제에 근접한 꿈을 이룬 것이다. (148)

사실 그때는 인격이 없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지도자의 인격도, 졸병의 인격도 없다. 하지만 그는 영리한 남방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닌 순수 동북 호걸의 인격을 보여주었다. 시안 술상에서 이미 불길한 징조가 있었지만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며 기꺼이 스스로 덪에 뛰어들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정말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가 형님이라 부르던 남방 사람에 의해 감금되고, 그의 자유가 남방의 습한 계절 속에 묶이고, 자신이 그 사변으로 인해 일생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동북 사람이라는 사실에 어떤 비애를 느꼈을까? (156)

이인전은 `책`이다. 동북 자체도 먼 지역인데, 동북의 농촌은 더욱 멀다. 또한 동북에는 학식이 풍부한 명사나 그림을 잘 그리고 악기를 잘 다루는 여인이 없다. 채찍을 들고 마차를 모는 남자, 팔짱을 끼고 담밑에 쪼그려 앉아서 햇볕을 쬐는 노인, 온돌 바닥에 앉아 신발 밑창을 밖는 여인 등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모두 이인전에서 온 것이다. 남당북송... 시기의 고사나 <삼국연의>, <수호전>, <홍루몽>, <서유기>, 그리고 탐관오리나 청백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두 이인전에 담겨 있다. 그들은 이인전을 통해서 충신과 간신, 선악을 구분하고,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체험하며 인과응보를 믿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인전 속 인물의 운명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흥분하고 불안해한다. (193)

동북은 춥다. 외로운 유목민들과 사냥꾼들도 이처럼 추운 겨울 날씨에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거란족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에 돼지기름을 바르기도 했다. 그들이 오랍초...를 솜처럼 장화에 넣었던 것도 추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추위를 이기는 데는 술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술이 있었기에 차가운 땅 위에서도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더 많은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원에서 온 술이 동북에서는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고 마셨다. 오로첸족은 지금도 그때의 주량을 유지하고 있다. (241)

시골은 좁다. 조약돌, 작은 땅, 나무 한 그루 같은 사소한 것들로 생긴 갈등이라 해도 한 번 생긴 원한 관계는 대대로 이어간다. 그래서 마을에 잔치가 열리면 원수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술자리가 원수들에게 싸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도우미도 싸움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싸움이 심해진다 싶으면 새끼 도우미를 불러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을 돼지우리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잔치가 한 번 열리고 나면 이런 스토리를 소재로 한동안 집안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잔치가 끝나고 보름 정도가 지나면, 또 다른 집 딸이 시집을 간다. 그래서 시골의 잔칫집 식탁은 치워지는 날이 없다. 공산주의의 공용 식당처럼 말이다. (243)

동북 사람은 술을 잘 마시는 것 외에도 술을 잘 권하기도 한다. 술을 권하는 단어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어느 한 마을에서 하루를 머문 적이 있는데 친구가 사 준다기에 함께 저녁을 먹었다. 친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권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술을 권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였고, 술을 권하는 말도 다양했다. 술을 권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술은 거칠게 마셨다. 그들은 누가 어느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듯이 한 바퀴 돌더니 나중에는 서로 술을 권하며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가 술에서 깨어난 적이 없는, 또한 깨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람이 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249)

나는 항상 관동 여인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관동 지역이 관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동 남자들은 대부분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기 인생에 규칙이 없으니 자기 여자에게도 규칙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동 남자들이 여자는 아끼는 방법은 바로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관동 여인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관동의 땅이 너무나 답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인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나긴 겨울과 긴 밤을 보내야 한다. 추위와 어둠은 여인들을 괴롭고 힘들게 만든다. 이럴 때 담배가 있어야 한다. 담배는 고난 속에 위안을 준다. 그래서 거의 모든 관동 여인들이 담배를 피워 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관동 여인에게 가까이 가면 옷소매, 머리카락, 말소리, 웃음에서 맵고 진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255)

다롄은 향토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 다롄에는 지금도 음력 초하루와 대보름이 되면 사거리에 쪼그려 앉아 종이를 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런 행동이 이민자들의 심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종이를 태우는 노인들은 어려서 고향 집을 떠나 부모와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멀리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들도 종이를 태운다. 거동이 불편해서 직접 나올 수 없는 부모를 대신해서 나온 것이거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대신 꼭 종이를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상한 도시 다롄에 이상한 사람들이 생기고, 마찬가지로 이상한 전통이 생겼다. 그래서 종이를 태울 수 없도록 금지하는 특이한 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년 음력 초하루와 대보름 다음날 길거리에 나가 보면 종이 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롄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항상 복잡하다. (282)

1960년대 말, 어느 깊은 밤에 큰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북방 벌판으로 갔다고 했다. 큰아버지 가족은 가난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농장 지주셨는데, 당시 지주는 4대 착취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고문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큰아버지는 북방 벌판으로 떠나셨던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큰아버지 가족은 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불잡혔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큰아버지 가족이 이렇게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라면 북방 벌판은 분명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공간일 거라 생각했다.
상상 속의 북방 벌판은 그랬다. 습하면서 녹음이 우거져 있고, 따스하면서도 신비스러운 곳. (285)

1940년대 말,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평화를 누려볼 틈도 없이 그리운 아내와 아직 얼굴조차 보지 못한 아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북방 벌판으로 향하는 화물차에 몸을 실었다. 벌판에 집결하고 나서야 그중에 다친 몸을 이끌고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표정 하나 없던 그들은 바로 투항한 국민당 군인이었다. 영웅과 원수가 이제는 같은 곳에서 땅을 일구게 되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누구도 이곳이 이토록 차가운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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