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체온 - 중국 민중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쑨거 지음, 김항 옮김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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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회는 개인을 단위로 자유를 확보하는 사회가 아니다. 각 계층의 인간관계에서 개인을 추출해내는 작업에는 거의 구조적 의미가 없다. 근대 이래 유럽의 무력침공이나 스스로의 사회 조정 등 여러 매개를 통해 중국사회는 격렬하게 변화했고, 결국 국민국가라는 틀이 정착됐지만 민중의 세계는 결코 서양식 `근대`를 따르지 않았다. 자기 나름의 근대 혹은 현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먹물들 머릿속의 근현대는 외래의 것이 전통과 단절된 형태로 정착된 것이기에, 그들이 서구의 키워드로 중국 현대사를 설명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먹물들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 등 서양사회의 진흙탕 같은 경험을 매개로 현실을 이론화 형해화...한 뒤 중국의 미래에 이식하려 한다. 이에 대항해 유학...을 중심으로 전통을 지키자는 지적 입장도 대두되지만, 이는 유학을 불변의 것으로 치부하는 바람에 서양 이론을 형해화한 것처럼 전통문화까지 형해화했다.
그러나 민중의 생활은 이런 논의 바깥에서 활발하게 살아 숨 쉬어왔다. (8)

산채문화 측이 독점자본의 세계시스템에 도전한다는 자각이 없음은 물론이다. 지금 이 새로운 움직임에는 단지 `풀뿌리` 문화로서 자기 의식을 확립해 보다 양질의 것을 만들어 해적판과 명확히 구분되려는 노력이 기대된다. 기존의 대자본 틈새에서 브랜드문화와 무관한 형태로 산채 문화는 하나의 서민적 현대정신을 지탱하는지도 모르겠다. 불량 제품이나 해적판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에 노출되면서도 산채판은 해적판보다 훨씬 건전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 독점된 것을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매우 어렵겠지만 이런 정신이 더 성장한다면 아마도 서민의 권리의식이나 책임의식에 도달하지 않을까? (30)

그러나 저 한 세대의 노동자들이 속해 있던 무사의 시대적 분위기는 결코 위선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노동자의 자존심이 사회적으로 구축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사라는 가치관이야말로 개인적 긍지로 정착돼 있었다. 게다가 이 긍지는 실제 사회적 지위와는 거의 관계 없이, 오히려 완전히 정신적이라는 사실이 주요한 특징이었다. 노동자가 계급으로서 국가정치나 일상정치로 참가할 수 있었던 특수한 시대(문혁이 그 정점이었을 것이다)에도 그랬다. (34)

그녀의 이야기가 <24시티>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영화를 봤을 때 무엇에 감동을 받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몇십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에서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거의 한평생이다. 중국 노동자는 역사의 변동에 휘둘리면서도 완강한 생명력을 단련시켜왔다. 그들은 존엄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종이다. (38)

산보든 현장추도든 다수의 시민이 모이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향방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지다. 시위가 자유롭지 않으니 그 대신 산보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위와는 달리 산보는 원래 격렬한 저항 자세가 아니다. 이런 자세는 결코 `반정부` `반체제`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나 체제의 통치 방식을 `바로잡는` 일을 통해 사회개혁을 진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2005년 반일 시위와 비교하면 산보원년 이래 시민운동은 한층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96)

원주민 중에는 1949년 이후 국민당 시대에 개신교나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전도사는 서양에서 온 종교가 세계적으로 유력하며 마이너리티인 원주민은 자기 조상신앙만으로는 현세의 생활을 지키지 못할 것이므로, 이 세계종교에 입신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설득했다. 그렇게 대만 원주민 부락에 교회 십자가가 눈에 띄는 풍경이 몇십년 동안 지속됐다.
그런데 하그의 부락은 예외다. 그는 개신교나 가톨릭을 거절했다. 이 두 교회가 원주민 사이에 분열을 만들고 세계종교가 떠들면서도 결코 관용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두목의 권력을 행사해 일관되게 선조에게서 온 것 이외의 어떤 종교도 거절하고 있다. (134)

인간이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모던한 생활에 싫증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지구상의 인간사회가 지금 병적으로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으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날도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후꾸시마원전 사태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있지만 현실은 결코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인민`의 생활양식이 바로 오늘날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있다. 자본 권력 미디어의 공범관계를 지적하기는 쉽지만 `인민`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정작 중요한 문제다. (145)

지금은 유명해졌지만 장래에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 지원은 말한다. 농민이나 건축노동자 경력이 있는 그는 노동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
주 지원은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소비사회의 법칙과 충돌하는 그의 생활철학이 그 투명한 목소리에 담겨 있어 중국인을 감동시킨다. 그것은 과거 시대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근본적인 물음을 이 소박한 농민이 몸으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

후 씨의 노력은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끈 것 같다. 유기농업의 거점을 만든 초창기에, 지원해온 몇몇 대학원생에게 관리를 맡긴 일이 있다. 후 씨는 씁쓸한 얼굴로 그때 경험을 회상했다. "그 아이들은 각각 컴퓨터를 한대씩 손에 들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밭을 관리했지. 덕분에 일년 내내 두번밖에 채소를 못 받았어. 농업관리를 맡긴 지 일년 동안 거의 수확이 없었어. 이듬해부터 교양이 없는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했더니 유기농업이 훨씬 성공적이었지." (234)

시간을 내어 예전 항구였던 황푸촌...을 안내받았다. 이 마을은 바다에 접해 있어 18세기 중엽부터 청조 정부 명령으로 중국 유일의 무역항이 됐다. ... 당시 인도 페르시아 서유럽 미국 등에서 온 상인들 은 이 황푸촌의 세관을 경유해 광저우로 들어가 여러 무역 활동을 펼쳤다. 광저우로부터 차 비단 도자기 등 중국 상품이 세계로 수출됐고, 시계에서 여러 문화 요소가 유입됐다. 황푸촌의 건물은 화난지구 건축양식이지만 유리창은 마치 서양 교회처럼 색색으로 장식돼 있다. 19세기 광동 지역에는 `외상화...`라는 독특한 미술양식이 있었다. 서양유화나 스케치 기법을 들여와 서양의 시선으로 당시 광둥의 일상생활을 그린 것이다. 모두 외국에 팔기 위해 그려진 것이어서 외상화로 불렸다.
외상화의 테마 중 하나는 황푸촌 항구 풍경이다.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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