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전집 11 : 중국소설사략 루쉰전집 11
루쉰 지음, 조관희.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 그린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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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에는 비록 유학을 숭상하면서 불교와 도교를 함께 허용했다고는 하지만, 신앙의 근본은 일찍부터 무귀에 있었다. 그러므로 서현과 오숙 이후에도 여전히 변괴와 예언의 이야기가 많았으니, (256)

도교와 도사를 지극히 받드는 것은 송 선화 연간에 극도에 달했으며, 원나라 때에도 비록 불교에 귀의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교를 매우 존중하여 그 환술에 대한 미혹이 세간에 두루 퍼져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금씩 쇠퇴하는 듯했지만, 중엽이 되자 다시 활발하게 퍼졌다. ... 이에 요망한 주술이 자연스럽게 성행하였고, 그 영향은 문장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역대로 이어져 온 삼교의 다툼은 모두 해결되지 않은 채 서로를 수용하여, "근원이 같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의리, 사정, 선악, 시비, 진망 등의 여러 가지 대립적인 개념들이 모두 혼합된 데에다 다시 이것을 분석하여 이원으로 통합하였다. 비록 전문적인 명칭은 없었지만 신마라 하면 대개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정의 일반 백성들의 생각으로, 번잡하고 천박하여 거의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미친 힘은 매우 컸는데, 다시 어떤 문인이 나와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 윤색을 하여 장편의 대작이 배태되었던 것이다. (401)

옹정, 건륭 이래 강남의 인사들은 문자의 화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역사에 관한 일은 피하여 말하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어 경전과 제자백가를 고증하고 고학을 다루었으며, 미미한 예술도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증을 하였고, 공리공론을 기피하였기에, 박식의 기풍이 성행하기도 했다. 이미 이러한 기풍이 이루어지자, 학자들의 면목 역시 갖추어지게 되어, 소설은 "길거리와 골목의 이야기나 길에서 듣고 말한 것"으로서, [예로부터] 사가들이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기에,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여진이 지은 <경화연>이 나왔다. (652)

<삼협오의>는 시정의 백성들의 심리를 묘사한 것으로 비교적 <수호전>의 여운이 느껴지는 듯하나, 그것은 그 외모에 그칠 뿐이고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이때는 명이 멸망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설서를 하는 장소 또한 북경이었다. 그에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내란을 평정하고, 유민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금의환향하는 것 역시 향리의 사람들이 몹시 흠모하던 바였다. 그러므로 대개의 협의소설 가운데의 영웅은 민간에서는 모두들 극히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결국에는 고관 밑의 수하가 되어 부림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된다. 이것은 대개 마음에서 우러나와 복종을 하고 신하가 되는 것을 즐거이 받아들이는 시대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727)

허나, 지나치게 고생스러웠다. 중화민족은 예전에 황하 유역에 살았는데, 자연계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가 않아 생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부지런히 생활에 힘써야만 했기에 실제를 중시하고 환상을 경시했다. 그로 인해 신화가 발달하거나 유전될 수 없었다. 노동이 문예를 발생시키는 하나의 근원이 되기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과 휴식이 고루 적당하거나, 혹은 조금 고생스럽다고 느껴야만 여러 가지 시가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약간의 여가가 있으면 소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노동이 지나치게 많고 휴식할 시간이 적으면 피로를 회복할 여유가 없기에 먹고 사느라 겨를이 없어 무슨 문예니 하는 것은 더더욱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785)

제1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첫째, 신화는 문예의 맹아이다. 둘째, 중국의 신화는 매우 적다. 셋째, 남아 있는 신화에는 장편으로 된 것이 없다. 넷째, <한서/예문지>에 실려 있는 소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다섯째, 현존하는 한대인의 소설은 대부분이 가탁한 것이다. (790)

이러한 사상은 중국 고유의 것은 아니고 완전히 인도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으로도 역시 육조 지괴소설이 인도와 어떠한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대강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육조시대 사람의 지괴는 오히려 대체로 오늘날의 뉴스를 기록하는 것과 같아 당시에 의도적으로 소설을 지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793)

하지만 <앵앵전> 원본에 서술된 내용과는 약간 다른 곳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장생과 앵앵이 뒤에 가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심리가 해피엔딩을 좋아했기 대문에, 이런 식으로 귀결된 것으로,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결함을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내놓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왜냐하면 일단 드러내 놓고 말해 버리면, "어떤 식으로 이 결점을 보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거나, 번민하고, 개량해야만 하기에,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번거롭고 고민스러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현재라도 만약 소설 속에서 인생의 결함을 서술한다면, 독자들이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해피엔딩이 아닌 것이라 하더라도, 소설에서는 왕왕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응보가 없는 것은 응보가 있게 해, 서로를 어르고 뺨치게 한다.--이것은 사실 국민성의 문제에 관계된 것이다. (805)

송초에는 천하가 통일되어 나라 안이 평안했으므로, 전국의 명사들을 불러 녹봉을 후히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서적을 편찬하도록 하여, 그 당시에 <문원영화>와 <태평어람>, <태평광기>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목적이 이 사업을 이용하여 명사들을 거두어 양성해 그들의 정치에 대한 반동을 경감시키려 했을 따름이었을 뿐, 실제로 문예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우리에게 고소설의 보고를 남겨 주게 되었다. 창작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송대의 사대부들은 실제로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았다. (811)

하지만 그 당시 사회에는 오히려 평민들의 소설이 별도로 있어서, [사대부들의] 소설을 대신하여 흥성했다. 이러한 작품은 체제만 달랐던 게 아니라, 문장에 있어서도 역시 개혁이 일어나, 백화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소설사에서 일대 변천을 일으켰는데, 당시 일반 사대부들은 비록 모두들 이학을 중시하면서 소설을 경시하였으나,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오락적인 것을 필요로 했기에, 평민 소설이 일어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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