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의 매력 1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옥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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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세상의 많은 악의 근원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어린이에게 알리는 데에 거부감을 느낀다. ...... 정신분석 자체도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다. 정신분석은, 삶의 부정적 본질 때문에 사람들이 파멸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삶의 부정적 본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창시되었다. 프로이트...의 처방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를 압도하는 듯 보이는 것들에 용감하게 대항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에 성공할 수 있다. (19)

또 다른 결말에 사용되는 "그 후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표현은 마치 영원한 삶이 가능한 것처럼 어린이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홀로 살면 이 세상의 삶이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과 진실로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으면 그런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유대를 통해 사람은 궁극적으로 정서적인 안정감과 관계의 영속성에 도달하고, 또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라지게 한다고 가르친다. 옛이야기는 또 진실하고 성숙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더 이상 영원한 삶을 바랄 필요가 없음을 말해 준다. "그 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옛이야기들이 다 그러하다. (24)

옛이야기의 비현실적인 면(편협한 합리론자들이 반대하고 나서는)이 바로 옛이야기가 지닌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바로 그 장치를 통해, 옛이야기는 외부 세계에 대한 유용한 정보보다는 개인의 내면 심리로 관심을 이끈다. (43)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어린이에게 그런 옛이야기들을 들여줄 때 어린이가 부모에 대해 안심을 한다는 사실이다. ... 이 점에서 어린이가 옛이야기를 직접 읽는 것과 어린이가 부모로부터 옛이야기를 듣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옛이야기를 직접 읽으면서 어린이는 자기가 거인을 꾀로 이기고 또 쓰러뜨릴 수 있음을 어떤 낯선 사람, 즉 그 이야기를 쓰거나 기록한 사람만이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어린이는 어른들의 지배로 생기는 그런 위험에 보복하는 공상을 부모가 인정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47)

우화는 이따금 신성한 체하고, 또 다소 흥미를 주기도 하지만, 항상 도덕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우화에는 숨겨져 있는 의미가 없으며,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대로 옛이야기에서는 모든 결정이 다 우리의 몫이다. 결정을 내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남겨 놓는다. 옛이야기의 내용을 삶에 적용시킬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그 속의 환상적인 사건들을 즐길 것이냐도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옛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은 조만간 그 속에 숨은 의미와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체험과 개인적 성장 단계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느끼게 한다. (73)

베짱이가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굶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어린이의 정의감에 위배되는 것인 반면, 늑대가 벌을 받는 것은 만족스럽다. 세 마리 아기 돼지가 각각 인간의 발달 단계를 상징하기 때문에, 앞의 두 마리 돼지가 사라진 것은 그다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어린이는 성숙한 자아에 도달하기 위해 초기의 존재 방식을 버려야 함을 잠재적으로 알고 있다. 어린이에게 <아기 돼지 삼형제>에 대해 말을 시키면, 늑대가 당연히 받을 벌을 받은 것과 맏형 돼지가 슬기롭게 대처하여 성공한 것이 대해서만 기뻐하지, 동생 돼지 둘이 죽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경우는 볼 수 없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라도 이 셋이 모두 다른 단계에 처해 있는 실제로는 같은 존재임을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76)

나는 어린 시절 냉엄한 현실로 인해 너무 일찍 마법을 박탈당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청년기 후반에 마술에 몰두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마치 그 시기를 놓치면 인생에서 그 심각한 결핍 상태를 더 이상 메울 기회가 없음을 그 젊은이들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또는 마법에 매혹된 그 달콤한 경험 없이는 성인의 가혹한 삶에 대처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86)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아이가 "나는 이 이야기가 좋아요."라며 한 옛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자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면 더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야기로 옮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아마도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막연한 느낌 이상의 것이 아니다. 어린이에게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 주어 그 의미를 파악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그 중대한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어린이의 생각의 방향을 성급하게 다른 이야기로 틀어 버리면, 그 이야기가 어린이에게 미칠 영향의 싹을 아예 꺾어 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 싹이 점점 자라나서 어린이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98)

삽화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 왜냐하면 삽화는 어린이의 상상력을 밖으로 끌어내 자기 스스로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시키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각각의 모습은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그린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화가가 자신의 상상력에 비추어 그런 괴물은, 우리의 희미하고 변화무쌍한 이미지에 비해 그 완성도가 높지만, 우리에게서 각자의 개별적 의미를 빼앗아 간다. 그렇게 되면 괴물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겐 아무런 중요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생명력이 없는 것이 되던가, 아니면 다만 우리에게 겁을 줄 뿐 불안감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심층적 의미를 환기시키지 못한다. (101)

인성통합에 필요한 요건에 무관심했던 두 형은 현실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본능의 충동에 의해 행동하더니 결국 돌로 변하고 말았다. 많은 다른 옛이야기에서도 그렇듯이, 그것은 죽음을 뜻한다기보다는 참된 인간성의 결핍, 또는 높은 가치의 외면을 뜻한다. 그리하여 참된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돌이 될 수밖에 없다. ... 동물적인 본성이 잘 대접받고 그 중요성을 인정받으며, 또 자아나 초자아와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어야만, 그것은 인성의 통합에 자신의 힘을 빌려 준다. 이렇게 해서 인성이 잘 통합되고 나면, 우리는 기적처럼 보이는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 (128)

옛이야기에서는 지명이 이렇게 자세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지명이 언급될 때는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과 다소 연관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세 가지 언어>의 모티프는 많은 이본이 널리 분포되어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에 관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편 스위스에서 시작한 어떤 이야기는 세 가지 다른 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더 높은 단위로 통일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스위스는 네 가지 말, 즉 독일 어, 프랑스 어, 이탈리아 어, 그리고 레토로만 어를 쓰는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스위스인 독자에게는 스위스라는 더 높은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161)

<세 개의 깃털>의 주인공은 우둔하다고 생각되지만, 무의식과 친근했기 때문에 성공하였고, 반면에 "영리함"에 의존하는 경쟁자들은 사물의 표면에 고정된 채 남아서 얼간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천성적 바탕에 가까운, "단순한" 동생에 대한 형들의 비웃음 뒤에는 그 영리한 형들을 능가하는 얼간이 동생의 성공이 잇따른다. 이 사실은 무의식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된 의식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가도록 이끈다는 것을 암시한다. (169)

"셋"은 형제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나타낸다. ... 부모를 능가한다는 것은 어떤 형제를 능가하는 것 이상으로 그 자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모를 능가하려는 자기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어린이는 스스로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옛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을 하찮게 생각하는 두 명의 형제들을 능가하는 것으로 위장된다. (174)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는 단순히 같은 일이 변화하면서 반복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세 개의 깃털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 것은 우리 인생에서 우연이 맡는 역할을 나타내는데, 이런 유사한 세 번의 시험을 치른 뒤, 우연에 의지하지않고 새롭고 다른 성취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고리를 뛰어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에 달려 있다. ... 우리의 인격을 풍부하게 발전시키거나, 혹은 무의식적인 생명의 원천을 자아에게 유용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역시 우리의 능력을 재주있고, 우아하게, 목적을 가지고 사용해야만 한다. (180)

어린이들이 "그게 정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는 내 마음에 들지만, 그런 게 요즘에도 있어? 나는 내 침대에서 안전해?라는 의미이다. 어린이들이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오늘날에는 어떤 용도 살고 있지 않단다."이다.
...
옛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실현 가능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희망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어린이가 명백히 인식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어린이에게는 자기가 바라는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192)

많은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얻는 이 왕국은 무엇인가? 그 주요한 특징은 우리가 그 왕국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 본 적이 없고, 그 왕국의 왕이나 여왕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말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왕국의 왕과 왕비란 존재는 지배당하기보다는 지배하는 사람이란 뜻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이야기의 결론에서 왕이나 여왕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독립의 상태를 상징하고, 그 위치에서 주인공은 자기의 요람 왕국에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던 유아기 때의 느낌 즉 의존적 상태에서 느꼈던 안전하고 만족스럽고 행복한 느낌을 갖는다. (206)

그 아이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에게 충실했던 개와 충실치 못했던 고양이에 대해서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났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어린이들은 선량하기 때문에 정의를 사랑하지만, 우리 같은 대부분의 어른들은 사악해서 자연적으로 자비를 더 좋아한다. (232)

그리고 어떻게 부모와 어린이가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옛이야기를 통해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 괴테의 어머니는 노년에 이것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나는 공기, 불, 그리고 흙은 아름다운 공주들이며, 자연의 모든 것은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고 괴테에게 말했다. (246)

때때로 괴테는 이렇게 말하며 끼어들었다. "엄마, 그 양복장이가 거인을 죽인다 해도, 공주는 미천한 양복장이와 결혼하지 않겠죠?" 여기서 나는 이야기를 중지하고 다음날 밤까지 파국을 미루었다. 그래서 나의 상상력은 괴테의 상상력으로 가끔씩 뒤바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괴테가 암시한 데에 따라 결말을 처리하고 말하였다. "너는 어떻게 될지 벌써 알고 있었구나." 나는 괴테의 가슴이 기쁨과 흥분으로 쿵쿵 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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