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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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선생님들 역시 이런 종신형을 받은 듯한 기분일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 반을 바꿔가며 똑같은 강의를 되풀이하고, 숙제 검사라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리고.... 선생님들이 이직을 결심하는 첫번째 이유가 일의 단조로움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학생들은 거쳐 나갈 때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을 몰랐다. ... 선생님들이 미래를 생각하기 않을 때는 제 아이들의 미래를, 즉 자기 자식들의 고등교육을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나는 선생님들의 머릿속이 미래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오직 나의 미래를 가로막으려고 거기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71)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에도 결코 이르지 못할 그런 실존을 횡단할 것이었다. 그것은 확신보다 더한 것이었고, 그게 나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에 재빨리 설득당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각성시켜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실패에 열정을 쏟게 된다. 열정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72)

하지만 선생이 거짓말을 모른 척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좀더 깊숙이 숨겨진 이유인데, 명석한 의식에 비춰보자면 대충 이런 거다. 즉 그 아이가 교사라는 내 직업의 실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발전시키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채, 그저 내 반에 들여놓고 그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것이다. (97)

수없이 거듭된 이러한 실패로부터 학생들에게는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언어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문법이 두렵다고? 그럼 같이 문법을 공부해보자! 문학에 관심이 없다고? 같이 읽어보자고! 왜냐하면 학생 여러분에게는 꽤나 이상하게 들릴 테지만, 여러분은 우리가 가르치는 과목들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려분은 우리의 모든 과목의 재료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여러분 모두는 말들로 이루어졌고, 문법으로 짜여 있고, 담론으로 가득차 있다. 아주 과묵하고 지독하게 어휘력이 부족한 사람조차 세상에 대한 나름의 표현이 머리를 떠나지 않으며, 그 표현은 문학으로 가득차 있다. 여러분은 제발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 (149)

그들의 정신이 온전히 여기 있게 하려면 내 수업에 안착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안착시키는 방법? 그것은 결국 절대적으로 현장에서 습득된다. 내가 유일하게 확신하는 건, 내 학생들의 현존이 나의 현존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급 전체와 무엇보다 학생 개개인에 대한 나의 현존에, 또한 내 과목에 대한 나의 현존에, 그리고 내 수업이 진행되는 오십오 분 동안 육체적이고 지적이고 정신적인 나의 현존에 의존하고 있다. (156)

수업에 완전하게 몰두하는 선생님의 현존은 단번에 감지된다. 아이들은 학기 첫 순간부터 그것을 느끼며,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했다. 선생님이 막 들어선다. 그는 절대적으로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방식,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자기 책상을 차지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이들의 반응을 걱정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바로 자기 일에 빨려들어가 그 자리에 현존하고, 아이들 각자의 얼굴을 구별해내며, 학급은 즉시 그의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159)

왜 이런 텍스트들을 외우지 않을까? 어째서 문학을 제 것으로 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이런 일은 더이상 하지 않기 때문일까? 더는 유행이 아니라서 이런 문장들을 낙엽처럼 날려버리는 걸까? 이런 만남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걸 생각이나 할 수 있나? 만일 이런 텍스트들이 어떤 존재라면, 이 뛰어난 글들이 얼굴, 형태, 목소리, 미소, 향기를 지녔다면 그것들을 흘려보내고 난 뒤 몹시 초초해하며 나머지 삶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왜 다 사라져버릴 기억의 흔적만 간직하고 있는가를 자책하면서...... (185)

언어 속에 잠겨드는 것, 모든 답이 여기 있다. (187)

어머님, 언어에 있어서만큼은 아드님은 영원히 어린애일 것이고, 어머님 자신도 아주 어린 아기이며, 저는 우스꽝스러운 어린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문학의 구어적인 원천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에 실려가는 잔챙이 물고기인 한은 말입니다. 아드님은 언어 안에서 헤엄치는 걸 좋아하게 될 테고, 언어에 실려 목을 축이고 젖을 취하며,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 말입니다. ... 언젠가 기억 속의 그 끝없는 동굴을 발견할 때는 언어 속에 잠겨 헤엄치며 깊숙이 잠수해 텍스트들을 건져올리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문자 이전의 시간, 생각의 존속이 오직 우리의 목소리에만 의존하던 그 시간과 다시 연결될 겁니다. 어머님은 그걸 퇴행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재회라고 말하겠습니다!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일은 우리의 일입니다. (189-190)

살인의 경우, 무장 공격, 공공 대로에서의 난투, 치정살인, 경쟁 조직 간의 원한 청산 등을 제외한 약 80퍼센트의 유혈 범죄가 가정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 인간이 서로 죽이는 일은 무엇보다 자기 집에서, 한 지붕 아래서, 가정의 은밀한 동요 속에서, 가족의 불행 한복판에서 벌어진다.
학교를 범죄 유발의 장소를 치부하는 일 자체가 학교에 대한 몰상식한 범죄다. (298)

"이 세상에서는 충분히 착하려면 좀 넘치게 착해야 한다." (313)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 분!--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318)

모든 점을 잘 따져보면 이 세 분의 선생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모른다고 하는 우리의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 익사 위기에서 구해내려는 그 몸짓의 이미지, 자살하려는 몸짓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 위로 나를 끌어올리려는 그 손목, 내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쥔 살아 있는 손의 생생한 이미지, 이런 것들이 바로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맨 처음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들의 현존 안에서--그들의 과목 안에서--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눈을 떴다. 수학자인 나, 역사가인 나, 철학자인 나로. 그러한 나는 이 스승들을 만날 때까지 진정으로 여기 있다는 느낌을 방해했던 나를 한 시간 동안 잠시 잊고, 나를 괄호 속에 집어넣고, 나로부터 나를 치워버렸다. (324)

또하나, 그분들에게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었던 듯하다. 자신의 과목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예술가였다. 수업은 물론 소통 행위였지만, 그것은 거의 자발적인 창조로 통할 만큼 숙달된 지식의 소통이었다. 어찌나 편안하게 수업을 했던지 우리는 매시간의 수업 자체를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할 수 있었다. 지 선생님은 역사를 부활시켰고, 발 선생님은 수학을 재발견했으며, 소크라테스는 S선생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었다! 수학공식, 평화조약, 철학개념 같은 것들이 마치 바로 그날 만들어진 것처럼 기념비적인 수업을 해주었다. 그분들은 가르치면서 사건을 창조했던 것이다. (324-5)

요컨대 앎이 단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걸 이해했을 학생, 즉 앎이란 인간을 무지에 붙박아놓는 노예상태에 대한 해결책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유일한 위안임을 깨달은 학생이다. (334)

선생들의 가장 커다란 장애는 자기들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하는 그 무능에서 기인할 것이다. 어떤 지식을 알아 내는 데 겪었던 어려움이 어떠했든 간에, 그 지식을 얻어낸 순간부터 그들은 지식과 동질체가 되어버리고, 이후로는 그 지식을 명백한 사실로 파악하고("아니 이런, 이건 너무 분명하잖아!"), 무지의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이 불러일으키는 절대적인 낮섦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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