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정원 - 바깥의 소설 30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거기서 한 여자가 바람 속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일을 하다가 얼굴을 들고 난처해하면서도 애원하는 시선으로 지나가는 나를 오래도록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그 시선은 내가 그의 말을 들어줄 때까지 여러 해 동안,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다 침묵의 저 깊숙한 곳에서 바라고 있는 바를 내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해주오, 라고. (9)

그런데 그때,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자신의 문간에서 있던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뚜렷이,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 정반대 방향으로, 겨울날의 푸른 지평선 위에 찍혀 있는 부드러운 야산의 가느다란 선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89)

그는 이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엄청난 악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것을 단죄하거나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고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흩뿌리는 비와 나뭇가지가 후려치고 있는 창유리를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길을 통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알아보고 또 알아본 것은 엄청난 연민이었다. (122)

"할머니, 우리는 일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두려운 것은 이곳의 침묵이에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이상 신호를 보내오지 않으려는 것만 같아서요. 마치 하느님께서 이제 영원히 입을 다물어버리려는 것만 같은 거예요." (159)

마르타는 잠시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그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사내가 그녀 인생의 반려요 남편이라니 대체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젊을 적에는 천성이 정반대인 사람들을 서로 맺어놓는 그 사랑이란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81)

특히 남들의 시선이 자게에게 쏠리는 것은, 보살핌을 받아야 할 입장이 되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녀의 삶은 그럴 가치가 없어 보였으므로 자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을 귀찮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또 병에 무심한 채 상관하지 않고 지내다보면 병 자체가 제풀에 꺽여버릴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늘 침묵 속에서 생각만 하다보니 어느 것 하나, 심지어 자신의 깊은 슬픔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190)

영원이란 결국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조물주는 마르타에게 무엇을 원했으며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떻게 결정을 내린 것일까? 이런 모든 것들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엄청나고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좋아했던 그 바람이 가끔 그녀를 기억해주고 이 고장을 더듬고 다니며 풀잎들을 흔들다가 그녀의 삶에 대하여 뭐가를 말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고 더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마르타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한숨이 나왔다. 대기와 바람과 풀들의 이 겸허한 불멸에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2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