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처럼 여행하기
로버트 고든 지음, 유지연 옮김 / 펜타그램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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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내 경험상 심층 지식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이다. 즉 끊임없이 기록하고 성찰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다. 더욱이 해외여행이 가진 매력의 상당부분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의 대단히 밀도 높은 경험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즉 엄청난 권태와 두려움뿐 아니라, 인상, 사건, 삶을 한데 녹여 낼 수 있는 능력을 말이다. 이런 작업은 흥미진진하지만 동시에 고단하다. ... 성공적인 여행자가 되려면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28-9)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는 이유라고 말하는 것 중 다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실제 해외에서 하는 경험조차 '키치'할 수도 있다. 키치(kitsch)는 진부하고 뻔하고 흔해 빠졌고 보통 싸구려이면서 대체로 악취미적인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 쓰는 용어다. 사실 이런 키치함은 주로 처음에는 물건을, 그러다가 현재는 경험을 대량 생산한 결과로 생겨났다. 도처에 존재하는 키치성은 현대 소비 자본주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다. 키치는 행복이나 지식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번성한다. 키치에는 지적인 수고가 거의 들어가지 않으며, 키치는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는 풍토보다는 안락한 소비지상주의에서 번창한다. 아마 키치가 가진 가장 위험한 측면이라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와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을 광범위하게 퍼뜨린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63)

지멜에게 모험은 경험 체계이다. "모험은 특유의 성격과 매력 면에서 볼 때 경험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험하는 내용 때문에 모험이 되는 게 아니다." 모험은 그 사람이 가진 문화적 짐, 즉 특정한 문화적 사고방식을 버리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 특히 모험의 뿌리는 진정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성 즉 직접 경험에 대한 예찬은 세계화된 세상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많은 현대 관광객과 모험가들이 진정성을 열렬히 추구하고 있다. 이런 진정성은 문화라는 더께를 걷어 내면 찾아낼 수 있다. 소위 원시 사회에서 경험하는 특성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많은 서구인들이 자기 몸을 야생 그대로의 자연과 이국 문화에서의 위험과 스트레스에 내맡기면 "일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고 믿는다. (123)

이국적 정취란 현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다. 즉 어떤 현대적 복식이나 설비도 나오지 않고, 특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티셔츠와 야구 모자 따위는 더더욱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여행안내 소책자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여성은 위협적이지 않다고들 여기기 때문이다. 보통 "이국적 타자"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 이미지는 교묘하게 손을 봐서 위압적이지 않고 섹시하게 묘사할 때가 많다. 풍경 역시 이국적으로 포장하고 여성화하기 일쑤다. (150) ...... 어린이는 인기 있는 피사체였다. 어린이들은 위협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대체로 호의적이고, 가던 길을 멈춰서 자기에게 말 거는 젊은이들을 대단하게 바라봐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부장주의라는 용어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어린이들은 위험도가 낮은 피사체다. 침묵은 단어보다, 이 경우에는 사진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즉 행복하게 살고 있는 국외 거주자의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오염이나 쓰레기나 죽음, 또 괴로움이나 불쾌한 상황을 담은 사진도 없다. (157)

G.K.체스터턴이 일찍이 말했듯이, 이웃집 대문을 불시에 두드리는 게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말은 자기 집과 친숙한 사람들과 가까이 있을수록 당연히 따라야 하는 행동 규범에 더 철저히 지배받게 된다는 뜻이다. (185) …… 어떤 민족지학 현지 조사자들은 자신이 현지인들과 살아가는 데 잘 적응했고 현지 사회에 받아들여졌다고요란하게 장담한다. 하지만, 사실은 흥미롭고 호감 가고 믿을 만한 외부인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현지 조사에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멜이 이방인에 대해 한 말이 핵심을 꿰뚫고 있다. 현지 사회에서 인정받은 이방인은 바보 같거나 하찮거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고, 낯 뜨거운 실수도 하고, 내부자라면 어울리지 않을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사귈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소중히 여겨라! (217)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어떤지 약탈과 같은 면이 있다. 사람들을 찍는다는 건 그들을 부당하게 침하는 행위다. 찍히는 사람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절대 갖지 못한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뀐다." …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볼 권리가 있다는 엘리트 계급이 느끼는 특권 의식, 즉 오만함은 자본주의의 일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나는 내가 바라본 모든 것의 주인" 여행 분파라 부른다. (207)

흥정은 경제 행위를 극대화한 것이라기보다 의례일지 모른다. 해외에서 자본주의식 고객 만족 윤리는 기대하지 말자. 가끔 보기 좋게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화를 참고 터뜨리지 말라. 돈은 불화를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보자면 내가 아무리 저가 여행자일지라도 나한테 바가지를 씌운 사람보다는 그래도 훨씬 부자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좋다. 또 내가 그렇게 지출하는 돈은 십중팔구 저 사람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쓰이지, 어떤 부자 나라에 본사를 둔 수상쩍은 다국적 기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명심하자. (224)

작은 도구도 좋은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이용할 수 있다. 음악가라면, 특히 플루트나 페니휘슬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악기를 가져가서 다른 음악가들을 찾아내자. 그들과 함께 하는 즉흥 연주가 언어로 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간에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나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걸 얼마나 자주 보았던지, 이 방법은 아무리 강력 추천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음악은 자신이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 같다. (251)

"평민 상인들이 기사도 이념을 흡수해 자기들 식의 전(前)자본주의나 자본주의적 관행을 상징하게 했다는 사실은 ...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들 중 하나다." 이런 모험 '정신'은 변화, 미지의 것, 위험, 기회 수용, 그리고 타자와 타자에 대한 인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능성에 대한 추산과 위험 최소화, 보험의 정교화를 수반한 "조사 체계(research system)"의 완성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일단 미래를 하느님의 뜻이나 운이 아니라, 부기와 부기 발달에 토대를 둔, 위험 부담을 직접적인 수익과 연계시키는 추계의 발전이 낳은 결과로 보게 되면서 번창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아내고 대안들 중에서 최선의 안을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이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 비합리적인 위험 감수는 "자본주의 정신"에 해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모험주의는 좀 더 확실하게 약탈적 자본주의와 관계가 있다. 모험주의는 전통에서 탈피하는 한편 카리스마와 세속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계에 순응하고 있다. (304)

여행에는 새로운 생각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런 새로운 경험에는 따끔거리고 울렁거리는 불안감, 위험, 불편함도 포함된다. 명백한 것 너머를 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현지 조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비록 아주 잠시 동안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집중적인 현지 조사는 "아, 나 거기 가 봤어. 날 봐, 난 영웅이야" 같은 종류의 자만심을 드높이지 않는다.
대신에 자기 자신, 자기 사회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갖게 한다. 그렇게 되면 "간디 씨는 서구 문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어느 저널리스트에게 간디가 했던 다음과 같은 대답이 맞는 말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 틀림없다.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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