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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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이 셌지만, 매사에 느렸다. 그는 느리게 생각했고 느리게 말했고 느리게 걸었다. 하지만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걸음을 자취를 남겼고, 더욱이 에거의 견해에 따르면 그런 자취는 바로 적절한 곳에 남겨졌다. - P26

때때로 온화한 여름밤이 되면, 그는 갓 풀을 베어낸 목초지 어딘가에 담요를 펴고 반듯이 누운 뒤 별이 가득 찬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 앞에 무한하게 펼쳐진 미래를. 그리고 때때로 몸을 쭉 뻗은 채 누워 있을 때면, 등 아래 땅이 천천히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고, 이 순간 산 전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0

토마스 카틀은 1946년 비터만 운트 죄네가 파산할 때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집계된 총 서른일곱 몇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1930년대부터 점점 빠르게 확대된 케이블카 건설 작업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 P57

"부인 일은 정말 유감이네. 하지만 눈사태가 폭파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아. 마지막 폭파는 눈사태가 일어나기 몇 주 전에 있었다고!" 총지배인이 말했다. - P75

당시 에거는 크란추슈토커에게 은밀히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인생에서 잃을 것이 전혀 없기는 했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얻을 가망은 아직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P81

그래도 불평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시간에, 눈 속에서 추위에 떨며 몸이 뻣뻣해진 채 누워 있는 사람도 많으니까. 아마 당신도 별을 바라보고 있겠지. - P94

에거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있을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에거는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마치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을 시도하는 어른들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5

하지만 아무리 오래 걸려도 2시간짜리인 등을 하는 동안 관광객의 오만한 태도는 뜨거워진 머리에서 솟는 땀과 함께 증발해버리고, 오로지 등반을 완주한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 아울러 뼛속 깊이 스며든 피로만 남게 된다는 점을 에거는 잘 알고 있었다. - P117

에거는 예기치 않은 만남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뿔 달린 하네스가 사라진 날과 다시 불쑥 나타난 날 사이에는, 거의 한평생에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놓여 있었다. 에거는 마음의 눈을 통해 펄쩍펄쩍 뛰어오르던 흐릿한 사람 형체가 차츰 멀어지다가 새하얀 눈보라의 정적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빙하 틈까지 갈 수 있었을까? 거기서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 P137

에거는 심장 쪽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고, .... 한쪽 뺨이 탁자 표면에 닿았다. 에거는 그런 자세로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멈추자,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참을성 있게 심장이 다시 뛰기를 기다렸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자,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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