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비와 함께한 80일 - 김성호 교수의 자연관찰 일기
김성호 지음 / 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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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성거리기를 몇 달이 지났을 때, 큰오색 딱따구리의 둥지가 말벌의 둥지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가 사는 모습과 달리 자연에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고 온전히 다시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딱따구리의 둥지만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번식을 끝내고 비어 있는 딱따구리의 둥지는 딱따구리의 둥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파낼 능력이 없는 다른 많은 생명체에게 더없이 귀한 선물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

지구상에 출현한 시기로 볼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춘 조류는 중생대 백악기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대인은 신생대 제4기의 현세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는 인간보다 비교도 되지 않는 시간을 앞서 이 지구상에 이미 존재하며 집을 짓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집을 짓는 방법으로 택하고 있는 것들도 어쩌면 새가 집을 짓는 과정을 보고 배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3)

보고 싶은 대상이 있는데 항상 곁에 있다면 가장 기쁜 일일 것입니다. ... 멀리 있더라도 항상 그곳에 있기에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분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니 가까이에 있든 멀리에 있든 틀림없이 있었던 어떤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없다면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일 것입니다. 지구촌에서는 매일 140종 정도의 생명체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매일 한 종의 생명체가 우리 곁을 영영 떠나는 멸종의 길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 알지 못하거나 혹 무심코 지나쳐서 그렇지 생태계를 이루는 생명체들은 모두 피하거나 끊을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한 종의 멸종은 필연적으로 다른 종의 소멸로 이어지며, 그 순서의 끝이 아닌 어디쯤에 결국 우리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02)

자연의 생명들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일부러 경쟁 구도를 만들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한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오랜 시간을 통해 일어난 자연선택의 안정된 결과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은 서식지를 서로 달리하거나 서식지를 공유해야 할 경우 먹이를 서로 달리하는 것입니다. ... 그러니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종 사이의 경쟁입니다. (219)

숲에는 이어짐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끝나는가 싶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있고, 있다가 없어져도 없어진 것처럼 보일 뿐 무엇으로든 결국 다시 있게 됩니다. 동고비가 둥지를 틀 만한 딱따구리의 옛 둥지를 찾으러 산책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매화가 피어 어서 오시라 했습니다. 매화가 꽃잎을 하나씩 지우니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꽃을 피웠고,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지기 시작하니 산벚나무가 활짝 웃습니다. ... 나무들이 순서를 어기지 않고 피고 또 지는 사이, 여리고 키 작은 들꽃 역시 피고 또 지기를 이어갔습니다. 나의 등 뒤로 꿋꿋이 서서 나와 나의 둘레를 그윽한 향기로 채워주던 아까시나무의 꿏이 향기의 창을 닫으시는가 했더니 이제는 찔레꽃이 자기의 차례라 하고 있고, 그다음으로는 배롱나무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241)

12번째 은단풍 둥지는 동고비가 둥지를 떠난 지 5일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동고비의 둥지가 있었던 것은 지어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짓고 지켜서 있었던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잃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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