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 ★공고 학생들이 쓴 시
류연우 외 77인 지음, 김상희.정윤혜.조혜숙 엮음 / 나라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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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해보이는 글솜씨, 정돈되지 않은 시어들을 넘기다보면 진짜 아이들의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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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 물주기 - 반짝이는 순간을 쓸고 닦고 물을 주는 일
공혜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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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00가지는 무얼까요. 꼭 따라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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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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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리언님의 소개로 알게된 <고민하는 힘>을 읽으며 저도 "나같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쓰여진 책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율스님처럼 득도?한 자유인이 아니거나, 이명박처럼 멍청하지 않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 "자아"에 관해서 강상중 선생님이 따뜻한 시선으로 정리하는 1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여태까지 정리되지 않은 채 있었던 제 가치관의 저변이 튼튼해지는 느낌이랄까.. 제 나름의 결론은, △현대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유인으로 광야에 선 것과 같다. △ 데카르트 이후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고 참된 공유란 불가능하다. △ 그러나 그것은 비극이 아니며, 이제 그 알 수 없는 타자에게조차 자신을 드러내는 진지한 마음만이 해답이다. △ 함부로 타자를 이해하는 척 하는 모든 심리치료적 유행, 뉴에이지, 괴성을 지르는 복음성가 집회와 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니힐리즘은 모두 지양되야 한다. 



이하, <1장 나는 누구인가?>를 내 마음대로 요약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 따위가 무슨 시간낭비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를 규정하는 어쩔 수 없는 어떤 실존적 자아에 대해 늘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고민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 자기만 생각하던 '자기 중심주의' 나르시즘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내적인 물음에 귀 기울이는 '자아'로의 전환이었다. '자기중심주의자'는 자아에 대해서조차 고민하지 않고, 자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타자'의 문제도 고민한다.


'자아'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17세기에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데카르는 사유와 물체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이렇게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열어놓으면서 '타자의 문제', 즉 사람들이 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타자도 나름의 자아를 가지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나와 타자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이 남겨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종교나 문화, 지연, 혈연 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근대과학과 합리주의 이후 이런 것들이 '넌센스'로 간주되었다. 막스 베버가 부른 이 '탈악마화'로 인해 우리는 완벽한 개인주의시대를 맞게 된다. 이 시대에는 자아가 비대해지기 십상이다. 각양각색의 '자아의 무리'가 있을 뿐이다. 사회적 공존을 위한 자기와 타자를 연결하는 회로를 만들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사회가 해체되기도 하고, 그래서 또 자아가 비대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소세키의 소설 내용처럼, "자유와 독립과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 이런 쓸쓸함을 맛보아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아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아도 힘겹고 타자와의 관계도 힘들다. 자아라는 것이 자존심이기도 하고 에고이기도 해서,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기 싫은 기분이 생긴다. 그런데 타자도 자아가 있기 때문에 똑같이 주장하고, 지키고, 인정받기 원한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상황에서 '겉으로는 참고 속으로 견디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다가 어려워서 자기 속에 파묻힌다. 자기를 세우지도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구원받지도 못해 비명을 삼킨다. 이런 '신경쇠약'은 현대를 사는 만인의 병이 아닐까? 나쓰메 소세키의 <메모>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말하길,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고 했다. 즉, 자기의 성을 쌓아 자기를 지키려고 할수록 자아는 파멸할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자아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 이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봤지만 학교와 사회에서 누구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었다. 그러자 부모님까지 대상화해서 바라보게 되었고 기분이 살벌해지기 시작했다. 이 경험으로 나는 타자와 상호 인정을 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


이런 마음의 문제를 '뇌'나 '영적인'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관심 자체를 끄거나, 마음의 벽을 만들어 미루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어중간한 낙관론은 시대가 인정하지 않는다. 어중간한 고민을 멈추지 않으면 자아를 영영 내세우지도 못하고 타자를 수용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와 연결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진지함'이 해답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세키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선생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하는 '나'에게 선생이 묻는다.


"당신은 진지합니까? 나는 과거의 인과 때문에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사실 당신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지요. 그렇지만 당신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


오늘날에는 "진지해"라는 말을 들으면 놀리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 움직이는 현대사회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그 쐐기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내 앞의 타자와 마주하기. 그렇게 '진지하게' 파고들어 가다보면 끝이 있고, 타자와 만날 수 있다는 믿음.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자를 착각해서 '나'의 세계만을 주장하면 안 된다.


원문 : http://seoulrain.net/1303 (본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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