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경의 역사
정기문 지음 / 아카넷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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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기문교수는 군산대학교 역사철학부 교수로 재직중이신 분이다. 서양사관련 논문집을 보면 특히 초기 기독교에 관심이 많으신 듯
하다. 교회가 가르쳐주지 않은 성격의 역사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성경을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내용의 중심은 주로 성경 본문의 변개(變改)를 다루었고,
신약에 한정하였다.
변개란 고쳐서 쓴다는 것으로 그것이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
아니었든 상관없이 본 의미와 달라질수 밖에 없다.
특히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는 다 필사를 하였기 때문에
변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새로운 것은 없다.
책은 의도적 변개를 다루는데, 의도적 변개 또한 당연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새롭진 않았다.

​한가지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보면 <없음>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러한 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당연한 내용이지만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여러 번 음미하면서 읽어봤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민경식 선생의 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를
읽어봐야 겠다.

이 책 또한 그리스도교 경전의 변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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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역사 - 잃어버린 시간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9인
윤종훈 지음 / 이상미디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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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이다. 하지만 편집이 아쉽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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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의 나라 - 7백 년의 동업과 경쟁
서영교 지음 / 글항아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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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도저히 평가가 되지 않는 책이다.
책의 광고에는 '서영교박사가 10년간의 치밀한 연구를 이 한권에 녹여냈다'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치밀하기는 커녕 읽을 가치가 있을까 모르겠다...

이 책의 최대 단점은 책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술서는 당연히 아닌 줄 알았지만, 교양인문서적도 아니다.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대중서적의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했다.
역사책이 다른 학문의 책들과 가장 뚜렷이 구분되는 점은 어떤 이론을 근거로 쓰는 것이 아닌 1차 사료의 인용과 그것에 대한 작가의 평가 판단 그리고 추정이 있다는 것이다.

한 줄의 사료에 대한 평가 판단이 작가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역사서적의 성격이 없다. 1차 사료의 인용도 별로 없고, 그것에 대한 평가 판단 혹은 추정도 없다. 소설이 아닌데 작가는 인물의 당시 심정까지 적어주는 친절함(?)을 베푼다.

작가의 글 솜씨도 문제다.
한 문장의 길이가 대부분 홑문장이다. 홑문장은 읽기가 편해 속독을 높혀주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 많이 보인다.

『모용희도 바보는 아니었다. 과거 중원을 지배하던 모용씨였다. 하지만 강자 북위의 등장으로 그가 물려받은 나라는 침몰하고 있는 배였다. 배에 물이 차고 있는데 바람까지 거세게 불었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융성기에는 시대가 편을 들어주니 간단하다. 하지만 하강기가 되면 시대가 편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162쪽)』
 '모용희도 바보는 아니었다.'라고 했으면, 모용희도 뭔가 했다는 것이 나와야 하는데, 이게 끝이다.
대체 이 문장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 이런류의 문장이 꽤 보이기 때문에 상당히 거슬린다.

내용에도 문제가 보인다.
1.낙랑군에 대한 평가문제
2.고구려에게 있어 한강유역의 의미
3.광개토태왕릉비문 17년조의 대상문제
4.양원왕에 대한 폭행문제
5.645년 고당 전쟁에 있어 안시성의 문제

1.2.3.5.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4번은 다르다.


고구려

전쟁의 나라

(서영교)


552년 9월 고구려 평양에 북제의 황제 고양이 보낸 사자가 도착했다.
그는 박릉 출신의 최유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17세였던 양원왕은 그가 고구려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은 북제 사신 최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최유의 눈에 핏줄이 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낌 없이 왕에게 다. 퍽! 하고 소리가 났다. 왕이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 더욱 기이한 장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왕이 최유의 주먹에 맞아 용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누구하나 불경한 사신을 제재하지 않았다. … (240쪽)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한마디로 무용담이다. 이것은 이 당시 북제가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고구려에게서 외교상의 수모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감정상으로나마 만회하려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 … 결국 이 기록은 고구려와 북제가 서로 얼마간 불편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316쪽)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당시 고구려는 한바탕 왕위계승 분쟁을 치렀고 이어 남으로부터 나‧제의 군사적 공격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가능한 한 서북 방면에서 새로운 군사적 충돌을 초래할 분쟁의 위험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외의 약점을 포착한 북제의 강한 외교적 압박과 그에 따른 고구려 조정과 어린 왕의 당혹감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부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최유의 행동을 포함한 위 기사가 말해 주는 당시의 분위기를 인지할 수 있겠고, 위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에 대한 북제의 외교적 압력이라는 사실 자체의 신빙성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05쪽)




사실상 이 기록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김용만 선생의 말씀처럼 단순한 무용담이거나 노태돈 교수의 말씀처럼 이 기사로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이 사건을 북사 기록 액면 그대로 인용한다는 것은 사료인용에 있어서의 작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류의 것이 이 기록말고도 몇 군데 확인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책은 근본적으로 책의 성격부터 잘못되었고, 작가의 무심한 사료인용과 문장력이 버무러져 내가 읽은 최악의 책이 되었다.
 

2010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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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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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마지막으로 읽을 책으로 故안드레 군더 프랑크 교수의 《리오리엔트》를 골랐다.  

별 기대하지 않고 선택했는데, 의외로 월척을 낚은 기분이다.

현대사회를 보통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고, 폴라니는 근대이전에는 시장 자본주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란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대. 시장체제 안에서 화폐를 매개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떨까...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을까?
아직 공부가 미진해 확답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본 산발적인 기록만 봐도 조선시대 노동시장은 존재했고, 더 오래전인 고구려때에도 시장에 거란 군사 2만명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지나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인 2만명이 한꺼번에 모인 시장은 지금도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존재는 고대부터 최고였다. 주몽이 연타발의 재력이 없었다면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 왕건의 집안의 부와 각 재력가들의 연합이 없었다면 고려를 세울수 있었을까?
관직도 살 수 있었고, 인간도 사고 팔았다. 고대부터 세계적으로 무역이 성행했고 중요지점에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근대에 생긴 것도 존재하는 것도 아닌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이 책을 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서양 오랑캐를 좋아라하는 정신질환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만, 생략하고 이 책에 관해서 쓰겠다.

예전부터 과연 세계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어떤 지역 어떤 지역의 역사가 아닌 세계를 한꺼번에 묶어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했다.
이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책은 없었다.
물론 세계사 연구의 석학인 윌리엄 맥닐 교수의 《세계의 역사1,2》가 있으나,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저자는 글로벌한 관점에서 세계 (경제)사를 보자고 했다. 글로벌한 관점. 내가 바랐던 관점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금은 '이것이 진정한 거시사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거시사를 위한 한 걸을 내딛었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저자께서 이후 진전된 이야기를 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유럽 중심주의. 유럽 예외주의.
중국사, 아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사람이라면 유럽 중심주의라는 말은 서양 오랑캐들의 이데올로기가 칠해진 개소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19세기 이전 세계의 중심은 넓게는 동아시아였고, 좁게는 중국이었다.
단지 200년전에 세력이 역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역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역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1400년-1800년 까지의 세계 경제사를 다룬다.
아프리카, 유럽, 러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오스만제국, 페르시아, 중국, 일본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한다. 15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세계 경제의 중심은 아시아였고, 그 중에서 중국이 최대강국이었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다.
유럽의 얼치기 사가들은 중국이 그 많은 은화를 받고도 성장을 하지 못했고, 단지 집에 모셔두기만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아시아는 15세기~18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성장하였다.
여러 가지 근거가 많이 등장하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고전학파의 화폐수량설이라는 것이 있다.
'MV=PY'라는 공식이다. M은 화폐량이고 V는 화폐의 회전율, P는 물가, Y는 생산량이다.
이것을 P로 정리하면, P=MV/Y가 된다.
화폐양이 많아지면 물가는 상승하게 된다.
유럽이 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만들고 대량의 은이 들어왔다.
17세기 유럽의 (아메리카에서 가지고 온)은 생산량은 세계 은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나머지 20%는 일본이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유럽으로 들어온 은의 40%는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갑작스런 은의 유입으로 인해 M이 폭발적으로 늘어 17세기 유럽에는 심각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 오스만제국, 명나라의 물가는 유럽에 비해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P=MV/Y에서 M이 증가한 만큼 Y(생산량)이 증가하면 P(물가)는 상승하지 않는다.
즉, 당시 인도, 오스만제국, 명나라등은 유럽에서 들어온 은을 충분히 소화해 낼 정도의 경제규모가 컸다.

18세기 중반까지 세계경제의 중심은 아시아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이 치고 올라온다.
왜 유럽일까. 라는 생각을 안해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얼치기 학자들은 당연히 그 원인을 유럽의 내재적 힘으로 평가한다.
이에 대해 프랑크 교수는 엘빈의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을 인용한다.
이 이야기가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런 측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엘빈도 유명한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론을 개진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생산·무역·제도·기술 모든 면에서 너무나 유리한 상황과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원인을 설명한다. 엘빈의 테제에 담긴 본질은 중국은 그때까지 풍부한 인간노동과 부족한 토지 그리고 다른 자원의 토대 위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농업,운송,제조업 기술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는 것이다. …(생략)… 엘빈은 제도의 실패로 인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리혀 반대로 제도 등에 입각한 생산, 자원이용, 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자원이 희소해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원의 부족은 점점 심각해졌다. 목재가 부족해서 집을 못 짓고 배를 못 만들고 기계도 제작하지 못하는 지역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연료도 … 옷감도 … 경작을 위한 가축도 모자랐다. … 금속도 공급이 달렸다. 구리의 부족이 특히 심각했으며 … 철과 은도 턱없이 모자랐다. 무엇보다도 비옥한 농경지가 부족했다. 새로 개간되는 경작지의 토질은 급격히 떨어졌다. 이런 자원부족의 주요 원인은 물론 기술이 상대적으로 정체된 상황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데 있었다. … 그것들은 모두 18세기 말이 될 때가지 뚜렷하게 수확체감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엘빈은 바로 이와 똑같은 발전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고 논한다.

 '발명을 통한 돈벌이를 갈수록 어렵게 만들었다. 농업의 잉여생산력이 떨어지고 1인당 소득과 수요가 감소하고 노동의 가격은 점점 싸지는 반면 자원과 자본은 갈수록 비싸지는 상황에서 … 농민과 상인이 택할 수 있는 합리적 전략은 노동을 절약하는 기계 쪽이 아니라 자원과 고정자본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 일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기계를 고안하는 것보다 저렴한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발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안전한 대책이었다. 고차원적인 균형의 함정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467-468쪽)』

간단하게 말해서 당시 아시아의 경제는 끝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부한 노동력때문에 저임금으로도 생산력은 충분했다. 풍부한 노동력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 필요성을 저하시켰다고 한다. 즉, 인구성장이 오히려 기술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콘드라티예프의 파동을 세계 경제에 대입하여 1450-1750년까지 확장국면(A국면), 1750부터 수축국면(B국면)으로 나누었는데 1750년 기점으로 아시아의 경제는 수축국면으로 접어들어 오스만제국, 무굴제국,  청제국은 한꺼번에 쇠락했다고 한다.
반면에 유럽(특히 영국)은 노동력이 풍부하지 못해 고임금이었고, 세계 경제의 수축국면때문에 아메리카에서 들오어던 은의 유입량도 줄어들었고, 특히 영국은 면직물 분야에서 아시아에 시장에서 경쟁을 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신기술이 절박했다는 분석이다.

이 책은 완전하지 못하다.
아마 서양에서는 프랑크 교수만큼의 시각을 가지고 나올 인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더욱 나를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서양의 유럽중심주의의 허구에 대해서 벗겨내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아시아학자들이 뒤를 이어 이 업적을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2009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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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의 탄생 - 중국이 만들어 낸 변방의 역사
니콜라 디코스모 지음, 이재정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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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체로 보면 유럽중심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라면, 그 시각을 아시아로 옮겨가면 중국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시아는 원나라 등장이전에는 다원주의 문명 체제였다. 

책에서 말하는 북방유목민들이 만든 북방문명 고구려를 비롯한 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동방문명, 남방문명과 서방문명이 존재했고 중국문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물론 원 출현이전 계속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중국이 위대해서라거나 중국이란 국가가 특별히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이 블랙홀도 아니고 중국주위에 있는 민족이 다 그쪽으로 빨려들어갔겠는가…. 

이 책은 초기 유라시아 유목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고학과 문헌을 두루 검토하고 그에 따라 결론을 내린 전문서적으로 읽기가 수월친 않다. 

멍청한 프랑스의 두 분께서 추상화하고 유목민의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확대해석,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이상한 책의 일부 내용 때문에 노마드=자유 라는 궤변이 성립되었고, 그들의 추종자들도 멍청한 생각들을 하는데 실제 역사상의 유목민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실제 유목민과 상상의 유목민을 헷갈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책의 원제는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이다.   

책을 다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사실 이 책은 북방민족에 대응한 중국의 정책을 중심내용으로 다루었지 저자가 서문에 밝히듯이 '중국 북방의 역사를 문화사의 수준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잠깐 차례를 보면, 1부는 유리시아 유목민의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았고 2부는 흉노이전 유목민에 대한 중국의 정책 3부는 흉노의 출현과 그에 따른 한나라의 정책변화 4부는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북방민족서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목민이라고 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푸른 언덕에서 말들이 뛰어다니고 어떠한 정해진 길도 필요치 않고 철에 따라 이동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초기 유목민들의 유적을 보면 반농 반유목, 즉 목축과 농경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수레도 사용하였다. (수레를 사용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이다.) 통합되지 않는 이상은 수 많은 소규모 공동체들이 있었고 분쟁이 있고 (분쟁이 있었으니 당연히)계급도 있었다. 당연히 자기들만의 경계도 존재했다. 정주국가처럼 어떤 경계를 지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흉노족은 각자의 몫으로 토지도 소유했다.(352쪽). 즉, 지가 가고 싶은 대로 막 돌아다니는 게 유목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유목민이 정주국가를 공격한 이유가 단순히 만성적인 먹거리 부족문제가 아니라는(231쪽)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문제는 과연 이 책에서 말한 북방민족의 역사를 문화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하였냐라는 것이다. 1부에서 다룬 고고학적 성과에 기초한 분석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부부터 4부까지 대체 무슨 근거로 이 책에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문화사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2부의 내용은 단 한줄로 정리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들의 정책들은 도덕적 관념이라는 탈을 썼으나 사실은 팽창주의에 입각한 실용주의 정책이었다.'라는 것이다. 북방민족에 대한 이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고 그들에 대해 각 나라들이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3부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흉노의 등장 그리고 초기 유화정책에서 적대정책으로 바꾼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지 북방민족에 대해 특이할 만한 서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4부에 들어 사마천 이전까지 막연하게 취급했던 북방민족들을 사마천이 실질적인 중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 통합시켰다(384쪽)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물론 책 자체로 보면 훌륭한다.  

고고학 자료와 문헌 자료를 두루 살피면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던 북방문명이라든가 북방민족의 문화사라든가 하는 느낌의 서술은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서술의 중심축은 항상 중국측에 있었지 북방민족에 있지 않았다. 자료가 중국것의 자료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측 자료를 가지고도 북방민족의 측면에서 서술은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가 북방민족에 대해 대한 태도는 여전히 중국의 변방이었다.
저자가 의도했던 것을 과연 이 책에서 얼마나 반영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30%정도라고 밖에는 충족시키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중국과 초기 유목민족과의 관계에서 어떤 생각으로 정책을 펼쳤는지가 중심내용이라고 하면 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의도와 사실상 책을 펼쳐들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오는 내용과 일치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책이었다 라고 평할 수 밖에는 없었던 책이었다.
 

2009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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