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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인간은 모두 방구석에 처박힌 ‘나’와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까지 속이며 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1부는 도대체가 이해 불가였다. 철학적인 부분이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통에 뭘 읽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읽기만 했다. 이대로 읽는 건 의미가 없다 싶어 역자 해설을 읽고, 2부를 읽는데 갑자기 재미있는 게 아닌가! 그 어렵던 말들이 이해가 되면서 ‘나’에게서 나를 보게 되었다. 우울하고, 외모에 자신 없고, 용기 없고, 악한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사람들에게서, 어느 장교에게서도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나’는 흔히 보아 왔던, 누구나 한 번쯤은 그랬던 나와 다르지 않다.
나는 아름답고 숭고한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33쪽
스스로 악하다면서 사랑을 운운한다. 인간이 원하는 건 결국 ‘사랑’이기 때문일까. 악한 자에게도 사랑은 그저 사랑 그 자체로 숭고하기 때문인가.
세계 고전 문학을 제대로 읽는 건 처음인데, 역량에 맞지 않게 훨씬 어려운 작품을 만난 것 같아 눈앞이 캄캄했다. 과연 끝까지 읽는 게 가능할까, 걱정이 대단했다. 많은 독자가 어렵다 해서 겁을 한 아름 집어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1부를 거의 다 읽고, 2부를 읽고, 다시 1부로 돌아와 마무리하는데 읽기를 잘했다 싶었다. 언젠가는 읽어야 했다면, 그게 지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인간은 체계들이나 추상적인 결론들을 편애하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자신의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귀를 막아 버린다. -38쪽
나는 내 얼굴을 싫어했다. 나는 내 얼굴이 소름끼치게 생겼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얼굴에 비굴한 표정 같은 것이 있다고까지 의심했다. -71쪽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독서로 보냈다. 나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부의 감각들로 잠재우기를 원했다. 외부의 감각들 중에서 내게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독서였다. 독서는 물론 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나를 흥분시켰고, 기쁘게 했으며, 괴롭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나를 대단히 지루하게 만들었다. -77~78쪽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넘길 때마다 ‘내 이야기인가?’ 싶었다. ‘왜 자꾸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불안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며 깊이 통감하고야 말았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육체의 건강, 마음의 무너짐이 찾아올 때 책으로 도망치는 버릇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책을 보면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상대는 그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관계의 깊어짐을 선 그어 막으려 했었다. 소외를 거부하면서도 원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모순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만큼 모순된 동물이 존재할까.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9쪽
가슴에 콱 박혀 씻기지 않을 첫 문장이지 싶다. 사람은 언제나 약해서 언제든 소외되기 쉽다. 가끔은 방구석에 처박힌 자처럼 어둡고 축축한 생각에 젖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항하고 반발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일정 부분 수용하고 받아들여 변화도 모색해야 함을 저자는 일깨워 주려 이 글을 썼던 게 아닐까. 비록 저자가 처해 있던 사회가 더 척박하고 처참했을지라도.
감히 추천하기가 조심스럽다. 아직도 어렵고 낯선 이 작품을 기꺼이 읽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지금 계절보다는 뽀얀 함박눈 내리는 계절에 읽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더 깊이 녹아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추운 계절에 다시 한번 꺼내 읽고 싶어질 것 같다.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함께 읽는 시리즈 도서(함.시.도)로 증정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진심을 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