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 그 역사와 신학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지음, 이기영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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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 예로 274쪽 새로 시작하는 첫 문단의 부정은 사실 모두 긍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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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집중력 혁명 - 일과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1% 차이
에드워드 할로웰 지음, 박선령 옮김 / 토네이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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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부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프티콜랭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와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다만 집중력 향상을 위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본래 성인 ADHD를 직장생활과 연계해서 쓴 책입니다. **저자가 하버드대 교수라는 소개는 출판사 해명이 필요합니다. 교수아닙니다. 허위광고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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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우리의 친구 -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자를 기리는 44인의 회고록
크리스토퍼 라이트 엮음, 김명희 외 옮김 / IVP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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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신부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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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 -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교회에 대한 확신
존 R. 스토트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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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국성공회 사제인 존 스토트 신부님 교회론 책이다.  존 스토트 신부님은 역시 영국성공회 사제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함께 세계 복음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분이다. 존 스토트 신부님은 영국 런던에 있는 성공회 제령교회(All Souls Church) 관할사제로 30년간 복무했다. 성공회 안에는 크게 예전주의(고교회파), 복음주의(저교회파), 자유주의(광교회파)의 전통이 공존한다. 예전주의 전통에서는 예전복구를 통한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옥스포드운동(이른바 Anglo-Catholics)이 유명하고, 복음주의 전통에서는 감리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 신부의 회개운동이 돋보이고,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존 쉘비 스퐁 주교, 돈 큐핏 신부(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음) 등과 같은 급진적으로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많이 있다.  대한성공회 안에도 예전주의, 사회참여, 성령운동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공존하고 있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나는 왜 여전히 영국 성공회 교인인가?"라는 글을 먼저 읽어보면 이 세 분파간에 있는 갈등을 스토트 신부님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존 스토트 신부님은 성공회 복음주의자로서 세계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입지전적 인물로 수십년 동안 활동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수많은 책들이 앞다투어 번역되고 있으며,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는 분이다. 그런데뜬금없게도 이 분이 성공회 사제이다. 한국에서 성공회의 교세가 워낙 약하기에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는 분명히 영국성공회 사제로 사목을 하고 있는 분이다.

이 책은 성공회 복음주의자의 교회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굳이 "성공회" 복음주의자의 교회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공회 사제이긴 때문만은 당연히 아니다.

1.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일치의 상징이자, 영국성공회의 수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전임 제102대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런시가 제3회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 축전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로 이 책은 시작한다. 

   
 

현재 영국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복음주의의 부흥이 영속적인 영향력을 가지려면,  교회론에 더 분명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제3회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 대회,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런시의 축전 中-

 
   

복음주의는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서를, 보편교회보다는 지역교회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 전해오고 발전하는 전통과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성을 유지하는 부분에서 취약하다. 런시 대주교의 말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은 대주교의 우려에 대한 성공회 복음주의자의 답변이다. 

2. (1) 성공회 신학의 핵심은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하늘과 땅이 입맞추는 사건이며, 하느님이 인간과 만나는 사건이다. 하느님의 거룩과 세속, 정신과 물질, 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사건이다. 성공회 신학의 핵심이 바로 이 성육신이다. 성육신의 교회론적 의미는 교회는 항상 사회 속에서 사회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 스토트 신부님이 전개하는 교회론의 핵심도 성육신이다. (2) 또 성공회 신학은 영국 종교개혁 시기부터 극단을 지양하고 중용을 선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양극단을 지양하면서 양자의 장점을 포괄하는 방식의 "제3의 길"이다. 그래서 성공회를 "reformed catholic church"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중용의 길"을 라틴어로 Via media라고 하는데, 이는 영국 종교개혁 신학자 존 주얼(John Jewel; 본 책에도 언급됨)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이 용어가 한국에서는 성공회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존 스토트 신부님의 이 책을 잘 보면, 먼저 양극단을 제시하고 그 양극을 지양하는 방식의 해법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논거를 전개하는 부분이 많이 등장온다.

3. 지속적으로 전현직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들을 굉장히 많이 인용하고 있다. (현직 제103대 로완 윌리암스[Rown Williams], 102nd Robert Alexander Kennedy Runcie  1980, 100th Arthur Michael Ramsey 1961, 99th Geoffrey Francis Fisher 1945, 98th William Temple 1942 등의 말들) 캔터베리 대주교라 하면 그 상징적 위치 때문에 그의 행위와 언설들은 성공회 안에서 상당한 권위(적어도 여러 모양으로 회자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존 스토트 신부님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들을 인용하고 자신의 복음주의 입장 안에서  해석하면서, 성공회 복음주의의 입장이 성공회 안에서 충분히 인정되고 있고 가치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라 불리는 세계 성공회 주교회의, 성공회 39개 신조, 성공회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등의 내용을 광범위하게 인용/참조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렇듯 과하다 싶을 정도로 스토트 신부님 자신의 성공회 배경과 성공회의 역사와 신학과 사목을 염두에 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한 장이 멀다하고 "성공회"라는 단어가 튀어 나온다. 아마 성공회 출판부에서 나온 책도 이만큼 성공회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일차적으로 영국성공회라는 특수한 상황을 인식하면서 성공회 복음주의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다분히 성공회적이기 때문에, 이 책의 역자는 원서의 이 특징을 보다 깊이 고려했으면 하는 마음이 많이 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대표적인 오역이다.                                                   

1. 존 스토트 목사 : 대한성공회의 공식용어에 따라, 존 스토트 사제 혹은 존 스토트 신부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대한성공회의 성서 공인번역본은 공동번역 성서이다. 그러므로 대한성공회 신자는 하느님 호칭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범개신교단을 위한 책이므로, 하느님이라고 번역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성공회 성직자에 대해서는 대한성공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할 당위는 분명히 있다. 이 책에는 "교구목사"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이도 "관할사제"로 수정하는 것이 옳다. 도대체 교구목사라는 표현을 쓰는 교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교구라는 표현은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등에서 채택하는 용어들인데, 여기에 또 목사라는 단어를 붙이니 어색하기 그지 없다. 

2. 미국감독교회(ECUSA: the Episcopal Church of the U.S.A.) : ECUSA는 성공회의 미국식 이름이다. 성공회의 영국식 이름은 anglican church이다. 그런데 anglican이라는 단어에 인종과 민족적 색채가 강한 이유로,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과 필리핀처럼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anglican 대신에 episcopal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공회를 지칭할 때, "anglican/episcopal"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 일본, 홍콩 등의 한자문화권 아시아 국가에서 성공회(聖公會; holy catholic church)는 anglican/episcopal church의 아시아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ECUSA는 세계성공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미국성공회로 번역하는 것이 명백히 타당하다. 

3. 살리스베리(Salisbury) : 솔즈베리가 옳다. 많이들 하는 실수이다. 솔즈베리는 성공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다.  

4. "총고해, 송영, 겸손히 나아가는 기도" 등과 예전용어들은 아주 오래된 표현 혹은 성공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 혹은 잘못된 표현이다. (원문을 확인하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겠지만, 현재는 원문을 확인할 수 없다.) 

5. 올 소울즈 교회 : 성공회 제령 교회. all souls의 번역어는 "위령"이고, 특별히 천주교나 정교회와 구분하기 위해 "성공회"라고 명기해 주는 것이 혼란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한글이름이 있는데 왜 영어음을 그대로 쓰는지 모르겠다. St. Helen Church를 세인트 헬렌 교회라고 하는 것보다 성 헬레나 교회라고 하는 것이 더 친절하고 정확한 번역이다. 굳이 번역을 하지 않고 "올 소울즈 교회"라고 쓰는 이유는 개신교 신자들이 All Souls Day (성공회: 모든 별세자의 날, 제령일 천주교: 위령일)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무지'와 '반감'을 전혀 건드리지 않으려는 번역자의 의도 때문이다.  교회력에 따르면,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 제성일), 11월 2일은 모든 별세자의 날(All Sould Day)이다. 모든 별세자의 날은 개신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신적이거나 반성서적인 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동료 인간의 순수한 사랑과 동정의 마음을 신앙 안에서 표현하는 날이다. 대한성공회 공동기도서에서 정한 모든 별세자의 날 본기도는 다음과 같다.

   
 

영원하신 주 하느님,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나이다. 모든 별세한 이를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에게 영원한 빛과 평화를 주시어 주님의 은총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상통하며 마침내 영광 속에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본문: 구약-지혜서 3:1~9, 성시-시편 23편, 서신-로마서 5:5~11, 복음-요한5:19~25)

 
   

존 스토트 신부님이 속한 성공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력을 통해서 신앙과 인생을 성찰하는 교단이다. 모든 별세자의 날은 참으로 의미있는 날이다. 특별히 나는 이 날에 압제와 폭력 속에서 죽어간 많은 민중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존 스토트 신부님은 위령 교회의 뜻을 나름의 방식으로 긍정하고 있다(199쪽). 존 스토트 신부님의 책에서 성공회 요소를 쏙 빼서 다른 개신교인들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는 책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다른 교회 전통을 익히고 교회 전통의 다양성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 한국기독교의 성숙도를 증진시키는 올바른 길이다. (마찬가지로, 존 스토트 신부님의 책 못지 않게, 헨리 나웬, 토마스 머튼 등의 책들이 기독교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지만, 이들 책들에서도 천주교 전통이 완전히 탈색되어 개신교화된 느낌이다. 성사적, 관조적, 예전적, 전통적 강조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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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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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의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통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와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청년 니체가 바그너의 격려로 저술한 [비극의 탄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이원론적 형이상학, 칸트의 ‘물자체와 현상’, 예술가의 형이상학Metaphysik des Künstlers이라 하는 바그너의 예술의 형이상학적 위안과 종교로서의 예술, 그리고 그리스의 비극적 정신을 말살한 인식우위의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포함하고 있다. 초기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삶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미학적 형이상학의 어색한 조화를 시도했다면, 중기 니체는 형이상학에 대한 총체적 부정을 단행하면서 인식의 복권(소크라테스의 복권)을 통한 과학과 학문, 정관(靜觀)과 자유정신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미 이 책에는, ‘모든 가치의 전도’, ‘서광’(아침놀), ‘황혼’(저녁놀), ‘삶의 정오’, ‘역사적으로 철학하기’, ‘선악의 저편’, 생성, 그리스도교 비판, 도덕의 계보학 등과 같은 후기 니체의 사상이 암시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중기를 자신의 초기 사상에서 벗어나 독자적 철학의 핵심을 정초한 시기이자 철학의 절정을 향해가는 여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니체는 전보다 더욱 깊은 내면의 고독으로 침잠한다. 바그너와도 결별했으며, 연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고전문헌학계에서의 평판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친구들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제한적인 통찰의 다양성을 타고난 자에게 주어지는 형벌인 고독의 냉혹과 불안”을 느끼던 독일의 프로메테우스에게는 “나쁜 상황들(질병, 고독, 타향, 무관심, 무위) 속에서도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지껄이거나 웃고 싶으면 함께 지껄이고 웃다가 싫증나면 내버릴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와 환영으로-즉 친구가 없는 데 대한 보상으로 자유정신들이 동반자로 필요했다.”

 

  '자유정신의 사상'은,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서 상당히 격양되고 과장된 어조로 말하는 것처럼, 그 책이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이다. 이 자유정신은 전통과 권위에 대한 해석학적 논쟁 가운데 의미 있게 위치한다. 니체에 의하면, 영국 그리스도교인이 영국 국적을 가진 것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근거, 통찰, 선택 등이 결여된 습관 또는 관습의 결과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이며, “근거 없이 정신적 원칙들에 습관화되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226번 단편) 이에 반해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사유하는 자가 ‘자유정신’freie Geister이다.” 국적과 신앙은 분명히 동일한 강도의 관습은 아니다. 근대의 국가개념이 뿌리내린 19세기 말의 시대상황에서 국적은 명백히 숙명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물론 지금의 다원화된 사회와는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다양한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근거결여, 관습, 습관, 속박의 예로 국적과 신앙 양자를 함께 거론한 것은 그의 사상의 급진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과 권위에 대한 입장은 해석학의 주요 주제이다. 데카르트는 주저 [방법서설]에서 방법적 회의의 하나의 방편으로서 전통에 대한 거부를 시도했다. 이에 대해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편견들 일반에 대한 편견 그리고 동시에 전통의 힘의 박탈’이야말로 ‘계몽주의의 근본적 편견’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계몽주의의 근본적 편견은 전통과 권위를 오로지 이성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모든 오류의 근원’이라는 데카르트적인 근본가정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가다머와 같이 하이데거의 전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리꾀르는 언어 속의 허의의식이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는 억압적인 문화 구조에 관심을 두는 대신 원칙적으로 언어가 우리에게 말한다는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가 전통을 비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전통 안으로 통합되고 그 전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였다.1) 그러나 하버마스는 [가다마의 「진리와 방법」에 대한 평가]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가다머를 공격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언어성의 헤게모니가 전통에 대한 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주체는 전통 안에 함몰되어 수동적으로 되며,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의문시할 수 있는 방책을 가져야 하고, ‘생활 관습의 교조주의’를 부수어 버리려는 성찰이 반드시 요청된다. 더 나아가 언어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봉사할 수 있으므로 한 문화의 경제적, 사회적 특권이 빚어내는 왜곡에 대해 비판받아야 하며, 언어는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그 속임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위의 논의를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전통과 권위에 대한 데카르트-하버마스의 ‘의심의 해석학’과 하이데거-가다머-리꾀르의 ‘회상과 복원의 해석학’의 대립에서 니체의 위치는 명백히 데카르트와 하버마스 편이다. 전통의 언어를 우선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니체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집요하게 타당한 근거와 자율적 선택을 강조했다. 그가 성서를 읽으면서 가졌을 태도는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니체의 철학이 또 하나의 주된 전통이 된다면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모두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외친다면, 다음 세대의 철학도들은 과연 어느 길로 들어설 것인가?

 

  니체는 신앙과 숭배에 대한 증오와 자유정신의 추구 속에서, 근본적으로 도덕이며 ‘대중적 플라톤주의’인 그리스도교 그리고 ‘배후세계론자hindweltler’이며 ‘죽음의 설교자’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자유정신의 실현자 차라투스트라의 지독한 저주를 퍼부을 터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 규정, 도덕의 기원에 대한 숭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hung aller Werthe’를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자유정신이 의도하는 궁극적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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