쩨쩨한 로맨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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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지만, 데이트 영화로 적당하다. 이제 막 '깊은' 관계에 진입한 커플은 더욱 흥미로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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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 Natal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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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본 내가 한심하다. (별을 1개나 준 것은 별 0개로는 리뷰가 작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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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의 정세토크 - 60년 편견을 걷어내고 상식의 한반도로
정세현 지음, 황준호 정리 / 서해문집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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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권의 대북정책 3년을 돌아보는 데 더 없이 좋은 책이다.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 현재의 남북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유용한 설명을 제공해준다. 명쾌한 비유, 예리한 분석, 설득력 있는 추론, 실현 가능한 대안 제시까지 정책비평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정책 입안자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다. 다만, 본래 글이 시사적인 칼럼이었던 만큼, 미래의 독자들에게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석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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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이방인
제임스 처치 지음, 박인용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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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지도상에 곧게 그어진 것처럼 그 도로는 곧게 건설되어야 했다. 기술자들로서는 풍경 속의 돛단배처럼 띄엄띄엄 자리 잡은 몇몇 작은 산등성이를 비껴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게, 어떻게 하더라도 곧게, 문자 그대로 곧게 만들기 위해서는 열 개 이상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그래서 건설 인력들은 위험하면서도 불필요한 작업을 하면서 한 해를 더 보내야 했지만, 아무도 도전하지 못할 '손'에 의해 '진리'처럼 지도상에 수도로부터 국경에까지 그어진 그 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아,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대지가 반항하듯 뒤틀어지는 것을 기술자들이 완전히 바로잡을 수 없었다. 도로는 군데군데 구부러졌다. 그 때문에 흠잡을 데 없는 충성심을 지닌 까다로운 성미의 건설 책임자가 문책을 당했다. 그러고는 풀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에 농사를 지어야 했다. 이윽고 그는 다시 수도로 돌아와 여러 해 동안 새로운 고속도로의 계획을 세웠다. 모두 화살처럼 똑바른 것이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건설되지 않았다. 그때쯤에 이르러 지도 제작자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게 되었다. 모든 지도에는 자처럼 곧은 '통일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고속도로라는 말에서 국민들이 떠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로를 여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받은 명령은 어디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한대를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색깔이나 다른 설명 없이 단지 '자동차 한대'였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영국 시인이 말했다시피 내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그게 전부였다.
 
솔직히 말해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시간에 자동차가 한대 나타난다면 그것은 남쪽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움직일 것이다. 자동차가 왜 그 방향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은 흥미로운 문제였지만, 나는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다.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의문을 품지 않았다고 해서 내게 해로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였다.
 
James Church, 박인용 옮김, <평양의 이방인 A corpse in the Koryo>, 11~13쪽.
   

북한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 <평양의 이방인>의 도입부이다. 체제를 무심하게 관조하며, 제한된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하려는 오(주인공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간단히 오 검사원으로 지칭된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성과 직위로만 구분된다.)의 심리묘사가 인상적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야기의 끝까지 유지된다.
  
이 소설의 장점은, 인물 설정이 세심하고 캐릭터가 참신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가는 검사원 오를 혁명가의 '고귀한 혈통'으로 설정하면서도 그를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체제에 부적합한 (그러나 혁명적 근본이라는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인되고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소설에서 그는 가구 만들기나 나무조각 다듬기 같은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여, '반사회주의적' 성향의 인물로 분류/취급된다. 이런 세부 설정을 통해서 작가는 인물을 입체감 있고 풍부하게 만들고, 그 심리와 성격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는 오의 혁명가 할아버지를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무슨 사상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은 상대하지 마."라거나, "네 주위를 돌아봐. 우리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냐? 이걸 위해 우리가 일본놈들과 싸웠고, 이걸 위해 네 아버지를 겨울날 아침 죽으러 내보냈다고 생각하느냐? 젠장, 네 주위를 돌아보라니까!"할 만큼 자신이 일군 체제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다. 지인들은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향을 짐작하지만 이를 근거로 그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와 존경을 포기하지 않는다. 때문에 곤경에 처한 혁명가의 손자를  외면하지 않고 돕는다.  

반면, 할아버지를 발판 삼아 체제의 대변자로 안착한 오의 형은, 그런 동생이 자신의 짐이 될까 꺼린다(형제간의 갈등 또한 이 소설의 한 축이다). 정교한 인물설정과 배치를 통해 이야기 또한 개연성을 갖게 된다.
 
소설 속의 오나 그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복잡한 내면을 가진 입체적 '인간들'이다. 우리 상상속의 전형적인 빨갱이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담론 속의 사회주의자들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말도 안되는 체제에 분노하지만, 생존을 위해 애써 무시하고 냉소할 수밖에 없는 비겁하고 무력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소설은 북한을 균질한 인간들로 구성된 단일한 집단이 아닌 다양한 인간 군상이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층위의 공간으로 가정한다. 이 소설이 주는 신선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간단히, <평양의 이방인>은 매력적인 추리소설이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덧말 :
 
1. 오 검사원의 차와 보온병에 대한 집착 : 누군가는 핵 원심분리기에 대한 비유로 읽지만, 지나친 비약이다.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좋지만, 이정도면 오리엔탈리즘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한의 모든 문제는 핵개발과 관련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편견. 그저 최소한의 일상적 재미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비유라 생각한다.
 
2. 오 검사원의 두 번째 미션, <hidden moon>에서는 오는 평양 최초의 은행강도 사건을 다룬다고 한다. 여기서도 오와 소수를 제외한 모두는 그의 임무가 실패하기를 바란다니, 흥미진진하겠다. 어서 빨리 그의 활약상(아니 생존기)을 접하고 싶은데, 과연 번역이 언제나 될지 모르겠다. 설마 안되는 건 아니겠지. 원서로 읽으면 일년은 걸릴텐데. 아무튼 소설의 도입부가 해외에서 사무실로 돌아온 오 검사원이라던데, 해외출장에서 보온병과 차를 충분히 구입했기를 기대한다. 책 표지도 참 멋지네.
                    
3. Peter Hayes, <오 검사원과 사라진 보온병>('06.12.18.) <노틸러스>에 실린 피터 헤이즈의 리뷰를 내 멋대로 옮겨보았다. 짧은 영어와 형편없는 국어 실력 때문에 번역이 거지 같더라도 이해 바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설마 원문과 대조해 보고 일일이 따져보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  http://www.nautilus.org/fora/security/06105Hayes.html
 
북한의 권력행사는 주관적이고, 집중적이며, 절대적이다. 반면에 미국의 권력은 객관적이고, 분할되었으며, 상대적이다.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거대한 블랙홀과 그 주위를 맴도는 작은 블랙홀과 같은, 상호간의 척력(斥力)이 존재하지만 양자는 인력(引力)과 거리상의 근접성 때문에 서로에게 벗어날 수가 없다. 빛과 정보가 상대방의 구멍으로 빨려들기도 하지만, 빠져 나오지는 않는다. 그 둘 사이를 소통하는 빛과 정보 따위는 없다.
 
이러한 대조적인 특징은 양국간 역사, 문화,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는 북한과 미국이 양자간 합의틀을 협상할 때 두드러지는데, 양국이 서로의 의도를 좀더 깊이 탐색하기 위해 1990년대를 보낸 것이 대표적이다. 잠시나마, 두 블랙홀이 좀더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그들의 파괴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힘의 영향은 약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서울에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제1기 부시행정부의 등장과 김정일의 10월 9일 결정으로 ‘02년 이후 모두 뒤바뀌었다. 지금 이 두 블랙홀은 충돌하여 끔찍한 폭력을 촉발시킬 지점까지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 정책담당자들은 북측 담당자를 마치 외계인 대하 듯한다. 그들은 북한 사람을 접촉하기는 하지만,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 중 어떤이들은 그들을 단순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이들은 북한 사람의 전체주의적 특징을 체제―스탈린주의 전형―탓으로 돌리면서도, 이런 체제가 왜 붕괴하지 않고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는 어리둥절한다. 대부분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분노하며,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짜증나는 인간들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해의 노력조차 거부한다. 결국, 신념에 기초한 분석과 무지가 대북정책을 주도하게 된다. 그 결과 전쟁과 핵전쟁의 위험만이 증대될 뿐이다.
 
이 거대한 무지의 심연과 몰이해의 공백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이채롭다. 전직 서방 정보원(필명:James Church)이 북한을 배경으로 그린 추리 소설 <평양의 이방인>(원제:A Corpse in the Koryo)이 바로 그것이다.(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의 여러 장소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미루어 작가는 북한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의 고려호텔과 주체사상탑의 전망에 대한 묘사는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으며, 호텔내 당구장이나 바에 대한 묘사 또한 작가의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소설에서 오 검사원은 정보체계, 당 통제기구, 수직적으로 구획된 정보통제가 좌충우돌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다. 그는 그저 따뜻한 차 한 잔과 자신 소유의 보온병을 바랄 뿐이지만, 현실은 불법밀수의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를 제거하려는 적대적인 무리들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전장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총을 쏘거나, 자신 대신 죽기 전까지는 주변의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오 검사원은 또 다른 은신처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무심하거나 냉정하게 행동한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을 상호의심의 그물로 결박하는 북한식 감시와 보고의 판옵티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존재와 사회적 역할 때문에 지속적인 암살 위험에 시달리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은밀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것이 북한에서의 생존 비법일 것이다. 분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교묘한 술책이나 칼솜씨로 위험이나 공격을 무력화시킬 준비를 하는 것 말이다. 항구적인 살해 위험에 대비한 경계태세의 일상화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데, 오 검사원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하다. 게다가 그는 인간적인 삶을 핍박하는 ―이런 종류의 체제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나게 소모적이고 경멸적인 억압 때문에 심한 모욕도 종종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그 분노를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하지―이는 오와 같은 일반적인 북한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않고, 다음 단계를 안전하게 밟아 가는데 집중한다.
 
혁명영웅의 손자인 오 검사원은 고결한 북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일상업무에서 이런 점을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다. 적이 그를 공격하거나 궁지로 몰면, 그는 자신의 (오 검사원 대신 죽은) 상사와 자신의 조직(인민보안성)과 보안상과 협력하여 ―몇년간 평양에서 활동하며 익힌 갖가지 수법으로― 반격한다.
 
이 책은 프라하에서 끝을 맺는다. 오 검사원의 운명은 북한 내 남한 정보요원과 서방 정보요원의 공작이 상호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북한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10여년전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권이 세계 시장에 투항한 이후에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최고의 공개 자료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과 그의 국가안보 팀은 이 소설을 침대 머리맡에 준비해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덧붙여, 이 소설에는 북한 관련 소식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사실로 알려진 소문과 구체적인 정보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작가가 북한에 있을 때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했는지가 이야기의 신빙성을 가늠한다고) 또 작가가 “차에 크림을 넣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작가가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령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은 항상 ‘크림’이 아니라 ‘우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작가는 분명 미국인이다. 북한도 이 점을 알고 있을 것이며,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무기력 하게 노출되는 것에 대해 곤란해 할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태롭게 만드는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지식(혹은 이해)은 그들을 예측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강대국들로 하여금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 추측하게 만드는 자신들의 일관된 전략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의심을 받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조만간 이 책의 출판사 내지는 작가가 출간을 위해 평양에 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보온병 부족현상은 실제로는 실종된 원심분리기를 뜻하는 것일까? 이 나라의 알루미늄 튜브 전부가 원심분리기에 사용되었다는 의미로. 항상 차가 고픈 오 검사원은 다음 이야기에서 자신만의 보온병을 갖게 될 수 있을까? 소문에 따르면 다음 권이 이미 편집자에게 넘겨졌고, 더 많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는데. 아마도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인지적 불협화음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오 검사원이 외부세계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배웠듯이 말이다. 혹시 그는 이미 미국에 입국하지 않았을까, 그의 지도자를 위해 이 곤란한 작가를 제거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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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는 선의 화신을 유혹하여 세상의 균형을 되찾는 악마의 성공담이자, 극단의 자경단원이 자신의 한계와 정체에 절망하는 싸이코 드라마이고, 자기허상에 빠진 방범대원과 진실을 이해한 미치광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조커, 이 현대의 메피스토는 선과 악이란 일종의 역할극이며, 그 배역은 우연히 결부되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결정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선/악의 이분법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기초한 망상에 불과하다. 애초부터 절대선이나 절대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는 언제나 섞여 있고, 아주 잠시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세상이 혼돈의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조커는 묻는다. “도대체 왜 그리 심각한건데?” 세상의 논리는 욕망의 본능을 따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미소가 우스꽝스럽지만 섬짓한 것은 진실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투페이스는 운명의 동전을 던진다. 더 이상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선과 악이란, 삶과 죽음이란 아무렇게나 뒤집어지는 동전과 다름없다. 모든 것은 던져진 동전의 판결을 따르면 된다. 결과가 불만이라면, 다시 동전을 던지면 그만이다. 여기에 사회윤리나 정의, 권력 등이 개입할 틈은 없다. 오직 ‘운’만이 작용할 뿐이다. 세상은 불공정하지만, 운의 윤리는 언제나 공평하다. 게다가 간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황상태에 빠지는 건 우울증의 천사, 배트맨뿐이다. 조커는 말한다. “나를 불러낸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거야.” 불편하고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악당은 더욱 과격하고 악랄해진다. 대중은 이제 그를 비난하고, 제거하려 한다. 선과 정의의 대리인이라 확신했던 사람마저 선/악의 이종교배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조커의 지적처럼, “너로 인해 모든 것이 변했어, 주위를 둘러 보라고. 그는 이 조증의 악마가 벌이는 무차별적이고 전방위적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난 너랑 노는 게 너무 좋아, 넌 날 죽일 수 없어.” 조커가 낄-낄댄다.

배트맨에게 범죄자 취급을 받은 한 자경원단(가짜 배트맨)이 소리친다. “네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과연 무엇이 다를까. 선을 향한 의지, 아니면 방법. 극중 폭스(모건프리먼) 사장의 답변은 음미할 만하다. “자네의 고용주이며, 세계 최고의 갑부인데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날뛰는 무법자.” 양자의 차이는 자본과 권력의 규모일 뿐이다. 하여 그의 정의는 독선이다. 이미 그는 알고 있고, 정직하게 대답한다. “복장의 차이지”, 그 뿐이다. 

대중을 깨우치는 조커의 상황극은 한 가지 실험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 두 척의 배가 있다. 한 척에는 무고한 시민이, 또 다른 한 척에는 악당이 탑승하고 있다. 양쪽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스위치는 서로의 배에 있다. 조커는 제안한다, 30분 이내에 상대방을 폭사시키는 쪽은 살려주겠다고.(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예이다. 알고 있듯이, 게임의 결론은 대부분 공멸이다.) 

우리의 어둠의 기사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사실 그도 궁금하다. 자기가 확신하던 선의 실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관객인 우리도 선량한 탑승객이 되어 고민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려면 저들이 죽어야 한다. 누군가 제안한다. 표결에 부치자고. 좋은 생각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일 뿐더러, 죄의식 또한 1/n 될테니 부담이 한결 덜하다. 게다가 저들은 악당 아닌가. 역시 결과는 압도적이다. 이제 스위치만 누르면 악몽은 끝이다. 이건 내 결정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결정이다. 악은 평범하고 민주적이다.(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평범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 모르겠다고? 왜 그래, 눈치 없이 지금 겪고 있잖아.)

저들은 우리를 죽일 것이다. 저들에게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는 범죄자에 불과하니까. 험악한 인상의 흑인 죄수가 나선다. “죽기도 싫고, 죽이기도 싫은데. 결정을 못내린다면, 당신이 10분전에 내리지 못한 결정을 내가 마무리 하지.” 역시 범죄자의 결정은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제 선량한 시민들은 모두 죽게, 되는 게 아니다. 그가 스위치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예상 밖이다. 그는 혹은 그들은 희생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는 불편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상업 영화 <다크나이트>는 한발 물러선다. 선량한 시민들 또한 심리적 압박(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대학살의 버튼을 누르는 악역을 누가 자처하겠는가.) 때문에 결국 스위치를 누르지 못하고, 모두 살게 되는 결말로. 조커는 의아해하고, 배트맨은 안도한다. 관객 또한 안도한다. 대학살의 공범이 될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승자는 배트맨인가, 선인가. 당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아름답다, 자신할 수 있는가. 조커가 히죽거리며 쳐다 볼 것이고, 우리는 그의 눈을 피할 것이다. 우리는 내막을 알고 있다. 그들은 타인을 제물로 자신의 생존을 선택했다. 구차한 이유가 뒤따르겠지만, 모두 헛소리이다. 우리 안의 심연에 고개를 숙였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과거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배트맨은 과연 이 불편한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조커는 살아 남았고, 하비덴트는 투페이스로 거듭났으며, 배트맨은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승자는 누구인가. 

(http://www.cyworld.com/sekamanx 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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