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절망‘이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맞다. 현재 돌아가는 정치 말이다. 극복해야 할 과제가 상식 너머가 아닌 기초로 돌아간 것 같다.《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라는 제목이 거창하게 느껴져서 괜한 말로 시작했다.최근 사람에 대한 기대치는 침팬지보다 낮아졌고 (침팬지 미안해!) 나 자신에 대한 오만과 편견 역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쉽게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자책한다. 학생 시절 어떤 토론 모임의 주제가 ˝성선설과 성악설˝이었는데 성악설로 확실히 기울었다. 합리화했을 뿐 돌아보면 나 자신부터 악했으니까. 세상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면서 그나마 사람 행세할 뿐이었다.나만 아니면 돼. 약육강식. 각자도생.금수 같은 나, 세상이 아닌 진리에 맡긴다.붕괴된 채 불교의 사상을 공부하는 요즘이다.공장에서 일한 적 있다. 기계에 쇠붙이를 집어넣고 기계가 용접을 마치면 쇠붙이를 꺼내 용접이 잘 되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기계가 더욱 똑똑해져서 나 없이 완벽하게 용접하는 미래, 시간 문제 같았다. (오히려 사내 정치 때문에 힘들었다.)자동화가 이루어지면 노동 인구는 농촌 인구가 도시를 찾아 떠날 때처럼 메타버스를 향해 떠날까? 화성의 미확인구역을 개발하기 위해 선두로 떠날까? 모를 일이다. 적어도 모두가 단순한 노동을 손에서 놓고 각자가 가진 잠재력을 뿜뿜하는 유토피아는 없을 것 같다. 되게 비관적인 것 같지만 나,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이상주의자로 남지 않기 위해 끝까지 도전하려고 한다. 설령 실패로 끝나더라도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내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믿으며.
나는 모자란 놈이다. 사회성이 떨어지고 무모한 면이 있어서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몇 번이나 감정적으로 선택했다. 불과 몇 백 년 전에 태어났다면 도태되어 하이에나 같은 얍삽이가 되거나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충동이 며칠, 몇 주 동안 지속되었을 때 마땅한 죄값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찌질하게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만난 분이 에밀 뒤르켐이었다. 이 책은 위로를 위한 책이었다. 감정은 뺀 채, 아니 어쩌면 가득한 채 500페이지에 걸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 행위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세상에 품고 있던 ‘원망’이 위로받았다. 죽음이 무서워서 울었던 순간들이 이 분을 통해서 따뜻하게 물들었다. 그래서 이 분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썼다. 나는 여전히 오만하다. 오만하고 편협하기 때문에 문제와 마주했을 때 외면하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 결과가 만들어낸 압박이었다. 나의 투박한 사고방식이 당신을 통해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신은 앞으로 내 친구다. 당신은 죽었으니까 도망 못 간다. 선택권이 없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