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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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를 살며 자연히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여행의 꿈이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었나 보다. 오랜만에 읽는 여행 에세이, 게다가 유럽의 이탈리아라니!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행 사진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진은 없고 글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야기에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끔씩 멋진 풍경을 담은 일러스트가 나온다.) 간혹 모르는 도시명이 나와도 찾아보지 않고 작가님이 묘사하는 그대로 따라가며 상상하며 읽으니 함께 여행하는 기분도 들었다.
쉰여덟의 나이로 여행을 떠나셨다 했지만, 글을 읽다보니 좌충우돌 씩씩하게 여행하는 여대생의 일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작가님의 열정 가득 솔직한 글을 읽는게 재밌고 나와 닮은 면도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작가님처럼 한달까지는 아니지만 친구와 처음으로 스페인 21일 자유여행을 갔던 일이 생각이 났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감탄하고, 길을 찾아 헤매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와 서로 다른 점으로 힘들었던 일조차도 지나고보니 그리운 추억이었다. 언젠가 다시 가겠노라고 다짐했던 유럽 여행은 막연한 꿈이 되어버렸지만 이 책을 통해 여행을 꿈꿀 에너지를 받은 것 같다.

처음 책장을 넘겼을 때, 첫 페이지에 작가님의 사인과 함께 '페르마타의 시간을 선물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페르마타는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기도 하고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아름답고도 여유로운 일상의 풍경들을 글로 접하고 나니 바쁘고 정신없는 나의 일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언제나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정작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들은 그냥 흘러보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내 주변에도 아름답고 여유로운 일상의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만의 페르마타의 시간을 가지고 소중하게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작가님처럼 나의 이야기를 잘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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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p.
욕심의 무게는 다름 아닌 삶의 무게다. 그동안 내게 지워진 삶의 무게를 힘겨워하며 살았으면서,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자고 떠난 여행에서조차 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76p.
"네 눈엔 아쉬울지 몰라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충분히 즐기고 있어. 여기서 보낸 시간 모두 다 만족스러우니까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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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 끝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한 대화의 시간을 좀 더 일찍, 로마에서 가졌더라면 좋았을 걸.

86p.
동화 속 아이가 모두 착하고 순수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다우면 된다. 알베로벨로와 사씨가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충분한 것처럼.

97p.
최후의 순간을 맞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문득 지금 저 화산이 폭발한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 삶도 '지금, 여기'에서 멈추겠지. 새삼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고, 성가시던 비도 생명을 축복하는 것 같았고, 몰려다니는 거대한 구름도 살아 있다는 증표로 보였다. 어제도 어제의 '지금, 여기'를 즐겼으면 좋았을 걸.

107p.
아직 한산한 작은 광장에는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었고 커피 향기는 그윽했다. 꿈꾸던 풍경 속에 앉아 있으려니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범죄조직을 일컫는 '마피아'란 말조차 낭만적으로 들렸다.

123p.
누군가 말하길 어떤 일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진과 나의 일상도 밤마다 뜨는 달빛에 물들며 우리의 신화가 돼가고 있었다.

132p.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 않은 길'을 품은 채 살아간다. 기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길은 실패한 길이 아니다. 부서지고 무너진 채로도 무대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타오르미나 극장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43p.
페르마타라는 단어에 여행의 본질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평소엔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것들을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실은 평소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들이다.

175p.
나는 그 아침, 아무리 짙을지라도 안개는 그 속으로 발길을 내딛는 사람에게 길을 내어준다는 것을 경험했다. 겁내거나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벽처럼 견고하지만 용기 내어 다가가는 사람에게는 바늘귀만 한 틈이라도 내어주는 안개는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인생과 닮았다.

185p.
그렇게 우리는 특별한 일상과 추억을 만들며 다시없을 시간을 보냈다. 쉰여덟 살이지만 우리 마음은 열여덟 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이 불빛과 달과 건물과 사람들을 담은 운하처럼 흘러갔다.


"해당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무료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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