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인연 - 외로움이 깊어 인연이 되었던 어느 젊은 날
이은주 지음 / 헤르츠나인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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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울면서 읽었어요. 너무 아름답고 또 슬프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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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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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가진 행복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



스완의 사랑


몽매한 사랑에 빠져버린 똑똑한 남자, 스완. 

언젠가 개츠비를 가리켜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에 빠진 바보' 라고 말했던 h가 떠올랐다. 

스완의 상황 역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랑'은 저런 것인 것 같다. 

가치가 없어보이는 데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오직 그것에 집중하는 일. 사랑이 아니고서야 벌일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개츠비와 비교했을 때에 스완은 훨씬 인간적이다. 구체적이고.

초인의 이미지가 스며있는 '상징'으로서의 개츠비와 달리 스완은 인간적인 질투에 휩싸여 쉽게 화를 내고 자아분열에 빠지기도 한다. 


  




그는 이유조차 알려 하지 않았고,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참 멋지군, 내가 신경증 환자가 되다니." 그러고는 다음 날에도 오데트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 위해 모든걸 다시 시작해야 하고, 그녀를 보기 위해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청난 피로가 느껴졌다. 휴식도 변화도 성과도 없는 이런 행동의 필연성이 너무도 잔인하게 느껴져, 어느 날인가는 배에 종기가 난 것을 보고 어쩌면 그 종기가 그의 목숨을 앗아 갈지도 모르며, 자기는 이제 아무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이 병이 임박한 죽음의 순간까지 그를 지배하고 노리개로 삼을 거라고 생각하자 진정한 기쁨이 느껴졌다. 

 



대상을 향해 나의 희망, 권태와 불안 모두를 투사하여 

지금껏 단조로웠던 삶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듯한 태도.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때로는 독자인 나의 신경마저 긁어버리기도 하며 인간 감정의 나약함에 대해 한탄하게도 한다.


하지만 나는 삶에는 때로 저런 류의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평범하고 유한한 한 존재로서는 더욱이.   


열병이라 하기에도 너무나 집요하고 긴 그 사랑이 잠시 쉬어가는 시기,

스완은 자신의 무의식이 발현된 꿈을 통해 오데트와 상징적으로 이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깨움도 잠시, 

그는 다시금 그녀를 향한 온갖 색채의 열망에 다시금 빠져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두 성인 남녀의 지난한 사랑 이야기는 곧 그들의 딸 질베르트와 작품의 어린 화자의 관계로 이어져 

독자로 하여금 또 한 번의 달뜬 열병이 다가오리라는 예감을 하게 만든다. 


 





스완에게서 소악절은 여전히 오데트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연결되었다. 

그는 이 사랑이 밖의 어떤 것과도 부합하지 않으며, 그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도 자각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또한 그가 그녀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에 이처럼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오데트의 자질에 비추어볼 때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스완의 마음을 오로지 실리적인 지성만이 지배할 때면, 그는 이런 상상의 기쁨 때문에 지적이고 사회적인 이익을 희생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스완이 귀를 기울이자마자 소악절은 그 자체에 필요한 공간을 그의 마음속에 만들어 줄 줄 알았고, 그 때문에 스완 영혼의 균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의 영혼에 어떤 여백이 쾌락을 위해 마련되었고, 그 쾌락 역시 밖의 어떤 것에도 상응하지 않았지만, 사랑의 쾌락처럼 순전히 개인적인 것도 아니어서 그에게는 구체적인 사물을 넘어서는 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한편, 앞선 글이 우리의 시각과 후각에 큰 비중을 둔 채 전개 되었다면 

이 2권의 비중은 청각 쪽에 보다 쏠려있다. 


곡의 악절과 그것을 연주하는 선율에 관한 세밀한 표현들이 글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스완이 감상하는 '음악'과 그의 '사랑'을 엮어내는 묘사는 탁월하다.  

그로써 우리는, 스완이 들은 것과 같은 음악을 실제로 들을 수는 없지만, 그런 그를 휘어잡은 '감정'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작품 속에서 프루스트가 거듭 언급하는 뱅퇴유라는 대단한 작곡가의 실존 모델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연구가들마다 제각각 이야기가 다르지만, 대표적으로 몇몇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들의 곡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내 머릿속에 그리고 상상 속에 떠다니는 선율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이올린 소리에는-만일 악기를 보면서 그 음을 꾸미는 이미지와 소리를 연결하지만 않는다면-콘트랄토로 노래를 부르는 어떤 목소리와 매우 비슷한 억양이 있어, 마치 한 여자 가수가 연주에 낀 듯한 착각을 준다.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중국 상자처럼 귀중한 바이올린 케이스뿐이지만, 그래도 이따금 사람 마음을 홀리는 세이렌 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것 같다. 

때로는 흔들리는 마술 지혜 상자 밑바닥에서, 마치 성수반에 빠진 악마처럼 포로가 된 정령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때로는 한 초자연적인 순수한 존재가 허공에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펼치며 지나가는 것 같다. 

 



 


고장의 이름-이름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그 도시들에 대한 내 이미지를 영원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만, 그 이미지의 출현을 내 마음속에서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름들은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노르망디나 토스카나 지방 같은 도시들을 실제와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 내 상상력이 주는 기쁨은 커졌으나 미래 여행에서 받을 내 실망 역시 더 크게 했다. 

이름들은 내가 몇몇 지상의 장소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들을 자극하면서 그 장소들을 보다 특별한 것,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큰 2부의 마지막은 이후의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다뤄질 

언어 자체에의 탐구와 묘사가 맛보기처럼 펼쳐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시각과 청각, 후각 등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작가는 

이제 자신의 입 안을 굴러다니는 여러 고유명사의 형태를 통해 그에 관한 자기만의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발화와 동시에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게 떠올라버리는 일상의 사물이 아닌 이름들, 

이를테면 사람의 이름이나 도시의 지명 같은 것에서 작가는 

은밀하면서도 아름답고 섬세한 그 언어만의 형태를 읽어내는 것이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된 파르마라는 이름은 내게 조밀하고 매끄러우며 보랏빛을 띤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내가 머무를지도 모르는 파르마의 한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게는 조밀하고 매끄럽고 따뜻한 보랏빛 저택에서 지내리라고 생각하는 기쁨이 생겨났다. 




글의 말미, 어린 화자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알았던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에 대한 추억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눈부신 광채가 흐르던, 떄로는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거대하게 펼쳐진 세계와 같았던 그의 유년기는 이제 과거로 흘러갔다.


다시금 도시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뒤흔드는 한 소녀로 인해 자기 앞에 새로운 길 하나가 펼쳐졌음을 직감한다.


그는 달콤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노스탤지어를 껴안으며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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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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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브레 정원의 마로니에 그늘에서 보낸 화창한 일요일 오후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생각할 때면, 그대들은 내 개인적인 삶의 보잘것없는 사건들을 정성스럽게 비워 버리고 대신에 흐르는 물로 적셔진 고장의 낯선 모험과 열망으로 바꾸어 놓았던 그때의 삶을 여전히 환기하고 또 실제로 그 삶을 담고 있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단추 격인 '콩브레'는 화자를 따라 그의 기억과 풍경 속을 자유롭게 산책하듯이 읽어야 하는 글이다. 


보통의 실용적인 독서 방식에 따라 또렷한 주제를 찾거나, 그때그때 인상깊은 구절을 맴도는 식으로 읽다 보면 

부지불식 간에 글의 리듬을 놓쳐 길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글의 초반 마술적인 환등기의 이야기나 성당 종탑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이 불러 일으키는 중세를 향한 매혹은

나 이전의 존재, 과거에 두고온 시간을 그리는 노스탤지어 그 자체다.


잠들기 직전 어두운 방의 묘사에서부터 시작해 그런 몇몇 과거의 조각들을 더듬다가 

이윽고 그 유명한 홍차에 적신 마들렌 맛이 호명하는 콩브레 시절로 뻗어가는 '나'의 회상은 

한 시절을 함께했던 인물들은 물론, 그들이 머물던 실내와 그곳에서 바라보던 바깥 풍경, 소리와 냄새, 

마을 전체를 둘러싼 시간과 날씨의 변화를 넘나들며 이어진다.





 

할머니께서는 건축에 대해 잘 알지 못하셨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날 비웃을지 모르지만, 저 탑이 규정된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있다 해도, 저 오래된 기이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구나. 만일 종탑이 피아노를 친다면 결코 메마른 소리는 내지 않을 거다." 

그러고는 종탑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 위해 모은 두 손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경사진 돌들의 그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을 두 눈으로 좇으셨는데, 첨탑의 기세와 완전히 하나가 된 할머니의 시선은 첨탑과 더불어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글의 중반 무렵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콩브레 근교 자연의 세세한 묘사를 읽고 있다보면

내가 앉아있는 곳이 어디건 간에 싱그럽게 가득 차오르는 푸른빛을 맛볼 수 있다.


특히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트로 언급되는 두 길을 다루는 대목에서 몰입은 정점에 이르는데, 

아마도 이게 작가 본인이 독서를 통해 경험했다던 유년 시절의 '꿈과 같은 황홀'일 거라 짐작한다.  

 

작가는 거듭 말한다. 


그렇게 정해진 페이지 안에서 소설가가 글로써 펼쳐보이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천천히 늘어지듯 흘러가는 탓에 감정의 알맹이를 놓쳐버리기 십상인 현실 속에서, 

우리를 폭발적으로 뒤흔드는 자극제와 같다고 말이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시에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객관적인 요소로 환원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그 후에도 배운 적이 없었으며, 또는 눈 빛깔에 대한 개념을 추출하기에도 충분한 '관찰력'이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할 때면 그 눈의 광채에 대한 추억은, 그녀 머리가 금발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선명한 하늘빛 광채로 떠올랐다. 따라서 만약 그녀 눈동자가 그토록 검지 않았다면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는- 특히 내가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며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페이지에 걸쳐 총천연색으로 묘사되는 콩브레 시절은, 유년기에 새긴 강렬한 기억 같은 것이 얼마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막연한 후회와 질투마저 느끼게 할 법 한 수준이다. 


더불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빚어지고 다듬어지는 이미지, 언어라는 게 

인간 삶의 정신적인 부분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끔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 더 특이할 점이라면 작중 인물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스노비즘. 


그리고 부르주아적 삶에 관한 자연스럽고 담담한 묘사들. 


화자가 벌이는 거의 모든 회상도 어디까지나 그 세계관 안에서 이뤄지는 느낌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겪어본 것, 할 수 있는 말만 하는 작가구나 싶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만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창조에 대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현실이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서 그런 건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이는 꽃들은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라일락, 산사꽃, 수레국화, 개양귀비, 사과나무가 있는 메제글리즈 쪽과, 올챙이가 헤엄치는 냇가와 수련과 금빛 미나리아재비가 있는 게르망트 쪽은 내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의 모습이었다. 

 


  

1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종탑에 관한 에피소드에 기대어 프루스트는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작가로서의 심정을 묘사하기도 한다. 


자연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감각의 근원, 인상 그 자체를

스스로가 납득할 수있는 언어로 해석해내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 시달리던 화자는, 

자신을 매료시켜온 위대한 작가들과 비교해 문학적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본인의 처지를 한탄한다.

하지만 반복적인 시도, 인상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 끝에 그는 생애 최초의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짧은 글을 적게 된다. 


프루스트는 어린 화자의 이런 끈질김, 그리고 그 화자의 언어에 의해 또렷하게 묘사되는 '순간'을 공개함으로써

작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한 의견 또한 슬쩍 내비춘다. 


삼백 페이지 남짓의 '콩브레'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새 다시 '현재'의 방 안으로 돌아온 화자가 

어둠을 걷고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는 지점에서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런 화자와 더불어 마을의 저 적지 않은 공간을 누비고 다니던 독자는 

이 다소 급작스런 전환에 놀라며, 흡사 길고 선명한 꿈을 꾸다 나온 것 같은 기분에 빠져버린다.


내가 보기에 사실상 이 긴 소설의 첫번째 장이 가지는 가치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뒤를 따라 내게는 먼 이국의 프랑스 땅과 거리, 숲을 정신없이 헤치고 다니다 어느 순간 휘릭, 

다시 그의 침대 그리고 나의 침대로 돌아오게 되는 지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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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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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매혹적인 하룻밤이 있어. 저녁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잠이 들지.

그들은 마치 어둠이 추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밤 속으로 빠져들어.

그것은 추억이네.


 


속세에서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던 얼굴을 잃고, 뜨겁게 사랑하던 여인마저 잃은 예술가 몸므.


[로마의 테라스]는 탐해서는 안되는 대상을 사랑한 죄로 빛을 잃을 운명, 무채색의 운명으로 밀어 넣어진 

17세기 어느 예술가의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언뜻 개별의 조각들로 봐도 어색하지 않은 챕터 사십여개를 모아놓은 이 작품은 

아주 느슨한 구조의 소설, 에세이, 혹은 (허구의) 전기처럼 읽힌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느슨한 사이사이를 거닐며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신화적이기도 한 몽상에 빠져든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작가 키냐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몸므라는 캐릭터는 2차원적인 평면의 공간에 '달라붙어' 존재하는 에칭과 같은 존재다.

그는 장차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도 걸지 않으며, 이미 지나온 과거에 대한 미련조차 떨쳐버린 사람 같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열망과 바람을 오직 판화 작업 하나에 몰아넣어버린 듯 보이는 그의 이런 태도는
대부분의 경우 현재형으로 서술되는 글의 형식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사람은 늙어갈수록, 자신이 통과하는 풍경의 광채에서 몸을 빼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네. 

바람과 세월에 닳고, 피로와 기쁨에 탄력을 잃은 살갗, 갖가지 체모, 눈물, 땀방울, 손톱과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마치 낙엽이나 죽은 나뭇가지처럼 땅에 떨어져, 두툼한 살갗 외부로 점점 더 빈번히 빠져나가는 영혼을 흩어지게 하지.

마지막 떠남은 사실상 흩어짐에 불과해. 

늙어갈수록 나는 내가 도처에 있음을 느끼네. 이제 내 육체 속에는 내가 남아 있지 않아.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두렵네. 내 살갗이 지나치게 얇아졌고, 구멍이 더 많이 생겼다고 느끼지. 

난 혼자 중얼거리네. '언젠가 풍경이 나를 통과하겠지.'





몸므는 자신의 늙어가는 육체를 위와 같이 묘사한다. 

풍경(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서서히 그 자연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육신에 관한 매우 시적인 서술이다.   


언젠가는 풍경이 나를 통과할 것이라는 말. 

'죽음'에로의 다분히 관조적이고 또 낭만적이기까지 한 접근이다.  


이와 같은 죽음 혹은 나이듦에 관한 묘사는 

몸므가 평생에 걸쳐 몰두한 동판화의 메조틴트 작법에도 적용이 된다.


판면 전체를 미리 우둘투둘하게 만들어 놓은 뒤, 

그것을 다시 펴고 으깨어가며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는 메조틴트는 

결국 '풍경(우둘투둘한 판면)'이 '형상(새로이 만들어지는 선)'에 앞서 존재한다는 선언의 재현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미지적 상징은 몸므 자신의 얼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얼굴은 젊은 시절 연적의 공격에 의한 화상으로 흉하게 이그러져 있다. 

이후 몸므의 생은 흡사 그 우둘투둘한 살갗 위로 

여러 겹의 감정과 시간 같은 것을 하나씩 새겨나가는 일과 같았다. 







  25


  분노에 대해 마리가 한 말이다. 

"불행한 사람들은 부모들의 분노, 뒤이은 쾌락도 그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분노의 산물이다."


  분노에 사로 잡히면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듣는다.


  스타기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이 광란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암벽에서 몸을 날린 잠수부가 도중에 낙하를 멈추고 물에 떨어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생 시랑 사제의 말이다.

 "분노는 유채색의 기피를 의미한다. 로마인 모뮈스는 유채색을 거부한 화가였다. 

어둠과 분노는 동일한 단어이다. 신과 복수가 하느님의 유일한 행위를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는 '복수는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콜레khole란 단어가 분노ira가 아니라 검은색noirceur의 의미였다.

고대인이 보기에 우울melancolie에 깃들어 있는 분노란 바로 밤에 깃들어 있는 어둠noir이었다.

어둠은 이 세계를 출생과 죽음 사이로 분리시킨 강렬한 대비를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다고 눈을 가려보아도, 눈을 가린 띠를 두 번 돌려 뒤통수에 묶어보아도 소용이 없다.

'출생과 죽음 사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말씀하시듯 '성sexualite과 지옥 사이'라고 단호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몸므의 말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내리는 비가 색채들을 무화시킨다."

 

  분노는 관능과 마찬가지로 열광적이며 현기증을 일으킨다.


  물수리와 갈매기들은, '물결이 부딪쳐 마침내 둑을 무너뜨리고, 급기야는 거리로까지 흘러넘치는 대양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편 작가는 시각(색채)과 청각(언어)을 동시에 자극하는 글쓰기의 매력 또한 충분히 보여준다.


특히 위에 인용한 챕터 25는 감탄에 감탄이 더해지는 페이지였다.  

분노와 추락, 생과 어둠 같은 단어들 사이를 유려하게 오가며 길어내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신화 속 어느 용감하지만 가련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처럼 몸므는 

어긋난 사랑, 하나 뿐인 아들과의 불행한 조우 등을 거치며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남긴다. 


작가 키냐르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좇는 과묵한 기록자와 같은 태도로 

그런 몸므의 캐릭터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어떤 나이가 되면, 인간은 삶이 아닌 시간과 대면하네. 

삶이 영위되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지. 삶을 산 채로 집어삼키는 시간만 보이는 걸세.

그러면 가슴이 저리지. 우리는 나무토막들에 매달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을 느끼며 피 흘리는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떨어지지는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네.




글의 서두에 적었던 것과 같이 [로마의 테라스]는 탐해서는 안되었던, 

바꿔 말하면 애초에 다다를 수 없던 대상을 추구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키냐르의 전작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 다룬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의 언어'라는 테마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도 같다. 


쉬이 가 닿을 수 없는 근원을 향한 추구로서의 작업을 '시'로 설정했던 전작과 달리 

[로마의 테라스]에서는 '판화'라는 작업이 다루어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와 같은 소재의 차이로 말미암아 두 작품은 여러 부분에 걸쳐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1652년 그륀하겐이 전하는 몸므의 말이다. 

"판화가를 번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번역자는 풍요롭고 멋진 한 언어의 아름다움을, 사실은 그만 못 하지만 더 강렬한 다른 언어로 바꿔놓는다.

그 강렬함은 그것과 대면하는 자를 즉시 침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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