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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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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인적으로 모르는 채로 책을 읽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괄호로 닫고 글자색을 달리 표기하겠습니다.

 

* * *

 

"화성은 중력이 약하다. 그래서 목을 부러뜨리려면 발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시킨다."

 

바로 여기 이 강렬한 오프닝에 책 전체를 끌고가는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화성으로 진출할 만큼 발달했지만, 진보한 환경에서도 이토록 야만적인 교수형의 전통을 유지하는 지구의 후예들. 주인공 대로우는 철저한 계급 사회의 밑바닥인 레드의 일원으로, 자원이 고갈되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지구인들을 위해,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원을 화성의 지하에서 캐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사랑하는 부인과 알콩달콩 살던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날 가장 끔찍한 삶의 굴곡이 찾아옵니다.

 

작품 초반 대로우는 [아버지와 부인, 자기 자신까지 교수대에 매달리는 끔찍한 세 번의] 교수형을 경험하며 결코 지울 수 없는 증오와 슬픔을 가슴에 새깁니다.

 

"너희와 나는 '골드'다…

우리는 인간의 살무더기들 위에 높이 솟아

우리보다 하등한 '컬러'들을 인도한다."

 

[특이 체질 덕분에 죽은 것으로 위장한 후 다시 살아난 대로우는] 사실 화성은 이미 개척이 완료되었고, 그저 하등 계급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고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상위 계층이 조직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을 억압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들 지배층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 체제를 전복시키는 도화선이 되기 위해 외모뿐 아니라 뼈와 피부 전체까지 교체하는 대수술을 거쳐 최상위 계급인 '골드'로 다시 태어납니다.]

 

대로우가 알게 된 실제 우주는 이미 발전 혹은 개척이 완료되고 모든 것이 '골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인간은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골드 외에 그들의 시중인 그레이, 골드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옵시디언, 쾌락을 담당하는 핑크와 과학 기술을 담당하는 그린, 그리고 대로우와 같이 자원을 채취하며 세계, 아니 지상의 진짜 모습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억압되고 스러져 가는 하이/로우레드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상류층의 어린 골드들과 함께, 모두가 가문별로 나뉘어 가장 강한 자를 선발하는 적자생존의 무규칙 가상 전쟁에 뛰어들며 작품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장난스럽게 시작되지만 이내 검과 활이 더해지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규모는 작지만 엄청난 속도로 실제와 같이 펼쳐지는 전쟁 속에서, 부유하게만 자라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지하 출신의 대로우는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전술과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며 전장을 지배하는 존재가 됩니다.

줄거리만으로도 절로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엔더의 게임이 제일 처음이겠고, 소년소녀들의 생존기라면 어딘가 메이즈 러너 시리즈와도 어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 넓게 보면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배틀 로얄도 그렇고, 또 작품의 핵심적인 구조에는 디파티드(혹은 무간도)와 트루먼 쇼의 클리셰까지 담겨 있습니다. 파리 대왕은 뭐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유명한 소설들의 장점을 여럿 채용한 익숙한 구조가, 여러 가문과 인물들이 빠른 속도로 명멸하는 이 소설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걔가 어떤 애길래요? 알렉산더가 될 운명을 타고 났어요?

카이사르? 징기스? 위긴? 이건 말도 안 돼요."

 

엔더 위긴은 먼 미래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우리 세계사의 위대한 지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네요. ^^; 엔더 위긴 시리즈에 영향을 받아서만은 아닐 테지만, 저자는 레드라이징 한 권으로 대로우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퍽 매력적으로 발전한 우주와 공감 가는 여러 가문 간의 알력, 매력적인 인물들을 다수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넓혀갈 여지를 많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진진했던 1권 뒤편에는 참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었던 터라, 후속작은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안됐지만, 넌 이기도록 허락 받지 않았는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

 

[대로우는 애초에 불평등한 조건 하에서 시작된 가상의 전쟁에서 경쟁자와 감독관을 모두 꺾고 대총독의 가문으로 선택받습니다.] 수많은 방해 공작과 배신을 딛고 이름을 알린 대로우를 시발점으로 봉기하는 레드의 반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올해 시리즈 2권인 Golden Son이 출간됐고, 내년 초 3권인 Morning Star가 계획되어 있는데, 시놉시스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2권까지는 대로우의 성장기가 계속될 것도 같습니다..

 

나를 속이고 억압하고, 가족을 교수대에 매단 사회 체제에 대한 증오. 이런 원초적인 감정에 공감하는 데는 작품이 SF, 판타지든, 역사 소설이든, 순정 소설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의 바로 그런 장기를 건드리는 이 작품의 도입부를 읽고 난 후에는, 절로 대로우의 절망과 분노에 공감하고, 지배층의 혈육을 쓰러뜨리는 그의 승리에 환호하고, 어느새 그가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그 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그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화성은 중력이 약하다. 그래서 목을 부러뜨리려면 발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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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오프 밀리언셀러 클럽 139
데이비드 발다치 엮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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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모두 데니스 루헤인과 마이클 코넬리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니,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가슴이 뛰었던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작가들의 단편을, 그것도 둘씩(혹은 셋씩) 짝지어 함께 쓴 작품들을 이렇게 한 권에 모을 수 있다는 것이. 엮은이 데이비드 발디치의 서문을 보고, 국제 스릴러 작가 협회의 탄생 과정을 알게 되고, 이 협회가 작가들의 자발적인 기고로 완성되는 이런 도서의 판매 수익을 통해 운영비를 조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후에야, 장르 문학 애호가들의 꿈이 실체화된 것만 같은 이런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1. 

(당연히) 가장 먼저 펴든 건 루헤인과 코넬리의 "야간 비행"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맨 앞에 실리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테죠. 타오르는 눈길로 한 번을 읽고, 푸근한 마음으로 한 차례 더 읽으니,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눈에 더 잘 들어왔습니다. 


해리 보슈와 패트릭 켄지가 자동차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는 순간, 펜이 코넬리에게서 루헤인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믿습니다. 보송보송하던 문장이 갑자기 끈적거리기 시작하고, 차분하던 이야기가 갑자기 다급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며, 왠지 그랬던 것만 같다고 중얼거리며 혼자 히죽댔습니다.


바로 이 순간! 


코넬리의 소설은 얼음 같습니다. 냉철하게 계산되어 하나하나 쌓아 올린 플롯이 날카로운 고드름이 되어 가슴을 꿰뚫습니다. 루헤인의 소설은 불 같습니다. 제멋대로 날뛰는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이야기는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듯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감에 따라 그렇게 흩어졌던 사건들이 어느새 한 점으로 모여들어 가슴을 파내고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런 두 작가의 개성이 한데 잘 녹아든 작품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전반부에서 숨가쁘게 달린 후반부까지, 특유의 두근거림과 함께 여유로운 위트가 섞여 늘 그렇듯 술술 읽히는 소설이었습니다. 출산을 앞둔 앤지를 등장시켜 보슈와 켄지가 만나는 운명을 이끌어 낸 코넬리도, 해리의 트라우마를 살려 단편의 도입부와 어우러지는 깜찍한 마지막 대사를 써낸 루헤인도, 상대방이 창조한 영웅에게 따스한 애정을 표하는 모습은 절로 미소가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부바와 미키 할러까지 등장했다면 눈물을 흘렸겠지만, 그건 다음 작품을 기대해야겠죠. 


2. 

이 책을 읽는 동안 첫 단편에 가장 큰 애정을 쏟긴 했지만, 다른 단편들도 당연히 작가들의 이름값을 하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넉넉한 볼륨으로 제대로 된 스릴러의 사건과 반전을 보여준 "라임과 프레이", 뉴올리언스 특유의 초현실적인 사건과 매력적인 인물들이 마음에 쏙 들었던 "지옥의 밤", 짧은 글이었지만 스산한 느낌이 내내 가시지 않던 "가스등". 이런 작품들이 가장 기억에 남지만, 나머지 모두 진한 향취를 남기는 인물들과 저자의 스타일을 만나볼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지금 왠지 늘 읽던 작가들의 작품만 찾아 읽고 계시다면, 방대한 작품들을 쌓아 놓은 다른 작가들에게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고 계시다면, 이 책이 괜찮은 출발점이 될 겁니다. 읽고 난 후에는 아마 이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어서 눈과 손이 근질근질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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