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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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우리나라 문학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번역의 한계성'을 말하곤 한다. 우리만의 아름다운 표현, 세밀하고 정교한 문장. 한글을 모국어로 알고 자랐다면 듣는 순간 그 묘사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의 말을, 영어를 비롯한 타국의 나라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외국의 여러 작품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과신하는 면을 보인다. 외국 문학 작품이 한국에 들어와서 겪을 곤란 쯤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나는 일본어를 못하고, 그래서 원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에쿠니씨의 글이 단순히 나붓나붓한 감상 나열만은 아님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그녀의 취향과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는 번역가 덕분일 수도 있고, 편집자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에 앞서 작가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가방>을 쓴 가와카미 히로미 작가가 뒤편에 수록된 해설에서 에쿠니씨의 글에 대해 이와 비슷한 말을 해 주었기 때문에 '아!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싶어 정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와 어울리는 수많은 표현. 섬세함이라든지, 애틋하고 아련한 느낌, 설렘, 여성스러운 등등의 그런 느낌보다는 어쩌면 이 사람은 의외로 꽤 잔혹한 타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내가 느끼는 에쿠니 가오리는 잔잔한 물결 밑에 숨어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위험요소 같은 존재였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두려운 그런 이미지였다. 근거 없이 짐작으로만 느껴오던 그 분위기들을 이번 <수박 향기>에서 하나의 실체로 만날 수 있었다. 이번 단편집은 여름을 맞아 나온 덕분인지, 동화책 같은 표지와 제목으로 싸여있음에도 의외로 어둡고, 결코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11편의 이야기로 조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제껏 읽은 그녀의 책 중 단연 그 무게감이 최고였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책을 '몇 권 읽어보면 대개 다 비슷해'라고 평할지라도, 내게 있어서 에쿠니씨의 소설은 언제나 참신하고 흥미로웠다. 19살 수험생 시절 공부가 하기 싫어 선생님 눈치를 보며 펼쳐 들었던 <냉정과 열정 사이>부터 이번 <수박 향기>까지 '언제나, 늘' 말이다. 분명, 참 한결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은 저마다 완전히 다르고,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게 해 주면서도 결코 어렵다거나 난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었음 모든 책을 후루룩 읽었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고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의 소설을 매번 출간되기가 무섭게 예약구매로 주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장을 하나 쓰더라도 '그 안에 들어가는 단어나 표현 하나까지 전체 문장에 꼭 들어맞는 느낌을 찾을 줄 안다고'했던 히로미씨의 말처럼, 나는 그녀를 '소설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쓰니 문득, 아직 읽지 못한 그녀의 첫 시집이 떠올랐다. 여전히 덥기만 한 이번 주말엔 아마도 달디단 수박 향기를 맡으며 그 시집을 들고 평온한 휴식시간을 가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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