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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버스를 타러 가다가 그녀의 어린시절 단정하지만 기품이 넘치는 사진을 보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정적인듯 하지만 뭔가 애써 삼키고 있는 듯한 눈빛이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너무 강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사, 구한말에 애정이 깊었는데 그 시작은 명성황후 때문이었고 나중은 그 시대의 모든 인물들 하나하나가 다 이유였다. 그리고 조금은 늦게 덕혜옹주라는 새로운 인물을 알게 되었다. 첫 만남은 우연히 스치듯 본 다큐 프로그램에서의 모습이었다. 조발성치매증으로 뒤늦게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닌채 귀국해 어린시절 추억이 묻은 고궁에 갑갑하게 드리운 창살을 붙잡고 마구 격정적인 분노를 터뜨리던 그녀. 늦게나마 돌아왔지만 어린시절의 아픔은 단 한자락도 치유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리고 다시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나는 위 사진과 함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그 존재조차 잘 알지 못하는 그녀를 (심지어 여느 국사 교과서나 참고서에서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이렇게 우연히 만나, 단박에 알아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사진이 왜 대로변에서 자꾸 발견되는지, 그것이 그녀에 대한 책이 출간됨으로 인해서라는 것 또한 뒤이어 알게 되었고, 나는 주저없이 예약구매로 그녀와 다시 재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읽기도 전부터 먹먹했고, 뭐라 괜히 죄스러운 마음과 씁쓸함 그리고 서글픔 등등이 공존했다. 그래서 우습게도 책을 받고나서는 한참동안 선뜻 펼쳐들지를 못한채 전전긍긍 하기만 했다. 그녀와 구한말에 관한 몇 개 없는 다큐를 모두 찾아보고 난 뒤에야 간신히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는 동안 그 누구보다 심각했음은 굳이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마치 당연한 의무인양, 이전에 유일하게 그녀에 대해 다룬 책이었던 일본 여성사 연구가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를 구입했다. 현재 이 책은 저작권 시비가 붙은 원저다. 개인적인 가치 판단은 야스코씨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내릴 일이지만, 그녀가 겪어온 역사적 사실 만큼이나 씁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일본인이라니...

이 책에 대해서는 참 말들이 많다. 나 또한 내용전개 중 의아한 부분이 있어 다산북스 트위터(@dasan_books)에 문의를 했었고, "시차오류가 사실이지만 수정을 위해서는 책 전체가 다시 쓰여야 할 수준의 작업을 거쳐야 하기에 시행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꼽히는 책인데 이런 부분은 좀 성의부족이 아닌가 싶었지만,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는 문제가 아니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나처럼 이 책에 큰 기대를 품고 접했던 몇몇의 독자는 필요 이상의 애국심 마케팅이라는 등 준비도 안 된채 의욕만 앞서 집필된 소설이라는 등 비난을 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부족했던 것은 나 또한 공감하는 바지만, 그럼에도 상관 없었다는 것이 내 최종적인 결론이다. 이제 시작이니까, 그냥 이렇게 책 한권으로나마 잊혀졌던 인물과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준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우리가 간과하고 너무 쉽게 흘렸던 것들을 찾아나가는 노력이 중요한 거니까. 뭐든 시작이 반이리라고 믿으면서...
나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의식 수준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국민 하나하나의 의식 차원에서도 모두 형편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던져지는 물음과 노력들이 이전보다는 더 나은 수준으로의 개선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굳게 믿기에 많이 슬퍼하지는 않는다. 하늘에서나마 뒤늦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한 그녀도 분명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