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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평점 :
아직도 그 시절의 기억은 생생하다. 얼핏 보기에는 정말 간단하지만, 그것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으며, 아마 그것이 발견된 후부터 이어져온 시간이 다시 몇 번을 흘러 지난다 해도 반증의 오점은 단 한건도 발견되지 않을 이론, 피타고라스의 정리. 13살의 내가 그것을 만났던 그 날 말이다.
이 책은 맨 처음 책을 펼쳐들며 접했던 추천사와 홍보글귀가 전해주던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롤플레잉 스타일의 온라인 게임 원작 같기도 하고, 학창시절에 자주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느낌도 어렴풋하게 풍겼다. 마루출판사에서 나온 화풍객의 <청사자단> 시리즈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 것도 이 책을 즐기는데 있어서 큰 매력요인이 되어주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 과거로 떠날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그들의 말과 여러 문화들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에 대해, 그들은 아직 존재조차 모르고 있거나 그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그 이론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가를 인식하기보다 입버릇처럼 당연하게 내뱉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2010년에 살고 있으며, “이건 왜 그런가요?”라고 묻는다면 “원래 그런 거란다”라는 대답 만돌아오는 의무교육과정에서 수의 체계를 배운 독자가 무리수의 존재를 눈앞에 두고 전율과 공포를 느끼며 한걸음씩 진리를 향해 내딛는 기원전 6세기의 학도를 만나는 일. 이건 정말 간단명료하게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알쏭달쏭하고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게 소설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 장면 장면을 연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천 년의 침묵>은 기회가 된다면 연극 혹은 뮤지컬의 무대 공연으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중해 문화가 꽃피운 아름다운 그리스의 의복과 생활양식 그리고 2천여 년을 거슬러 돌아온 현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이 내 눈앞에서 말을 하고,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는 일들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ㅣ 수학자, 역사인물
B.C 582년 (그리스) - B.C 496년
피타고라스의 정리 발견
피타고라스 학파 창설
비블로스 비교 입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문하생
비록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용어들(의복 명칭 등)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지 않았다는 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평가단의 의견처럼 이제 우리도
‘이런 소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던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음모론은 매우 흥미롭게 즐겨 찾는 대상이지만, 세상에 불신과 음울을 낳기 때문에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항상 새로운 물음과 반증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더 나은 방향 혹은 새로운 전환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 정도 수준의 음모론은 아주 바람직한 촉매제라고 생각한다. 현자의 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자칫 방심했다간 금방 정체되고 고여 썩어버릴 수 있는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입에만 쓴 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루 빨리 안목 있는 극본가가 이 작품을 보고 영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다면 이 책이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장르로 형상화되는 첫째 날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해두고 그 시간을 만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