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사랑에게 말했다 - 브라운아이즈 윤건의 커피에세이
윤건 외 지음 / PageOne(페이지원)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커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다. 다만 요즘 ‘커피 좀 마신다.’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런 품격 있는 원두커피가 아니라, 부모님이 피곤한 일상에서 한 번 더 힘내기 위해 마시는 그 달디단 다방커피였다는 사실. 엄마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몰래 홀짝여 본 그 한 모금에 녹아있는 프림의 미묘한 중독성과 달콤쌉쌀한 맛.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맛을 꽤 동경해왔다.
 
그러던 중 나의 도둑커피 인생에 예상치 못한 태클이 들어왔다. 프림이 얼마나 몸에 해로운지에 대해 온 매체에서 떠들어대면서 엄마가 커피를 블랙 스타일로 바꾸게 된 것. “어차피 같은 커피인데 뭐..”하고 평소와 같이 한 모금 도전했던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머리나빠진다.’라는 이유로 어른들은 자신의 자녀에게 커피를 멀리 할 것을 훈계한다. 우리 집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러던 내가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자유롭게 마시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된 이후였다. 당시 관내에서 지원율 1위였던 고교와 바로 나란히 건물을 쓰던 여중학교에 다닌 덕분에, 해당 고교에서 설치해 둔 자판기를 점심시간이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커피. 그 때는 매일 6교시가 넘어야 학교가 끝나고, 아침마다 불편한 교복치마를 입어야 하는 설움도 그 커피 한잔에 모두 녹여낼 수 있었다.




 

2006년 또 한번의 차가운 짝사랑을 접고 싸이 다이어리에 남겨둔 글.


이때부터 고3 시절 잠을 이기기 위해 하루에 커피를 5잔씩 마셔 위가 크게 상했고, 그로 인해 반년 간 커피를 외면해야 했던 시기만 제외하면 커피를 향한 나의 사랑은 늘 한결같았다.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던 21살 겨울의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 시기. 그 때를 계기로 나도 10여 년 전의 엄마처럼 블랙커피의 참 맛을 깨닫게 된 것 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나는 아직도 본가 집에 내려오면 식후에 다방커피를 한 잔 하고, 시험기간에 잠을 깨기 위해서는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찾으며, 가끔 체력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모카를 찾는 등 언제나 커피와 함께 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내게는 커피가 사랑이고 사랑이 곧 커피였다.

애끓는 짝사랑을 하면서도 상대에게 그런 내 마음을 알리기 위해 별다른 노력 한 번 기울여 본 적 없던 나. 뒤늦은 미련이나 후회 속에서도 결코 뒷걸음질 쳐본 일 없는 내가, 하루에 다섯 잔씩 마셔댄 결과 위가 너덜너덜해져 신물이 올라오는걸 느끼면서도 끊을 수 없던 것이 커피다. 커피는 남들이 ‘된장녀’ 같은 모욕적인 말로 비아냥거리는 대상이건, 아무리 권위 있는 연구소에서 인체에 해롭다는 결과를 내놓았던 내게는 인생을 통틀어 그 무엇보다 뜨거운 사랑으로 한결같이 손을 뻗었던 중독의 대상이었다. 



 

사진 중 아래 두컷은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선착순 구매에 성공해 득템한 컵받침. 윤건씨의 친필싸인이 담겨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만났다. 제목부터 마치 내 마음을 쏙쏙 훑어내 지은 듯한 <커피가 사랑에게 말했다> 세 명의 저자 중 한명인 브라운 아이즈의 윤건씨가 부암동에서 운영 중에 있고 많은 커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카페 ‘마르코의 다락방’. 그곳에서 직접 판매중인 독특하고 다양한 커피와 음료들을 소개하며, 그것에 얽힌 사연들과 그 음료를 닮은 사랑이야기를 전하는 에세이집.

이 책은 눈물을 콸콸 쏟으며 “아 유레카.. 이것은 나의 운명이야”라고 외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들의 실제 이야기가 담긴 만큼 언제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게 손 밑에 박혀 찌르르한 고통을 안겨주는 티눈의 흔적처럼, 미묘한 잔상으로 남아 꽤 오랫동안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내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양 서운함과 아픔을 공유하기도 했고, 바로 옆에 서서 “이제 그만해라”라고 다그쳐주고 싶기도 했던 이야기들. 역시 돈이 많고 적건, 얼굴이 잘생기거나 못났건 세상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다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우리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르코의 다락방을 찾아 따뜻한 밀크티를 한 잔 마시며 또 다른 책을 읽었다. 비록 윤건씨의 싸인을 받고 싶어 가방 한켠에 챙겨간 이 책에 소기의 목적은 채우지 못했지만, 책 속에 삽입된 사진-카페의 풍경을 담은-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만족하고 돌아왔다.
 
매번 상처받고 아픔에 울며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혹은 ‘사랑 따윈 난 몰라’라며 여행이나 커피 등 날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무언가에 집착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자 한다. 당신이 어떤 유형에 속하든지 이전보다도 유독 차디찬 이 겨울이 특히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설사 책을 다 읽고 나서 더 외로워졌다고 투정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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