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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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서 어깨 위로 무심하게 내리는 눈을 툭툭 털어내며 맨 바닥이 보이지 않던 골목길을 걷는 어린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가난한 단칸방 시절,여섯이나 되는 식구가 함께 했던 기억이 첫번째 골목을 연다.
책을 읽어갈수록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겹치면서 우리동네 골목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퉁불퉁 휘어져 돌아간 골목은 항상 고단한 한숨 소리가 들렸고 어수선했다.지금은 평평한 아스팔트 도로로 변해 그 시절 가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함께 어울렸던 추억이 많아서 그 시절이 그립지만,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가난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골목에는]읽으면서 내 기억을 읽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세세한 글들이 나의 그 시절과 닮아 있어 놀랐다.
"소리가 많기로야 겨울철을 따를 수 없다.겨울밤 소리의 으뜸으로 치는 메밀묵 장수의 '사려엇~'소리는 분명 듣고 자기를 불러달다고 내는 소리일 텐데,창문을 열어 내다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소리만 혼자 살아 비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고 있는 것이다.여기요,하고 부르면 그제야 어느 모퉁이에서 네모판을 목에 두른 메밀묵 장수가 불쑥 몸을 드러낸다." (P.39)
지금보다 4계절을 뚜렷하게 느꼈던 그 시절에,폭염과 혹한은 가난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존재를 드러낸다.지대가 낮은 동네의 장마철 물난리 소동까지 겪고 나면 일년을 살아내는 게 참 큰 일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를 모른다]저자는 자신이 살던 동네가 허물어 지고 재개발 되는 상황을 겪었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일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p.46)
남을 대할 때 자신의 기준으로 섣부른 판단을 해버리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말고,차라리 '당신을 모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딸을 키우는 엄마의 일상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삶으로 이어진다.
지나온 과정의 절망 속에서 부대끼며 싸워온 저자는 좋은 일도 아주 좋지는 않았고,나쁜 일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세월이 지나면 그저 그런 일들이라고 말해 주어서 어쩐지 그 말에 나도 마음이 놓였다.
모든 일의 결과가 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듯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엃혀져 있다.인생은 확실한 낮도 밤도 아닌 그냥 하루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것은 정지되고 멈춰 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 p.90 )
생각해 보면, 어떤 기대에 도달한 순간이나 완성된 성과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생의 움직임이라는 그 과정에서 미처 알아채기 전에 행복은 이미 지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
하나씩 풀어 놓는 이야기 속에서 슬퍼지다가도 따뜻함이 느껴져 다시 용기가 생긴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했던 아빠의 증명서 이야기,누구보다 존엄하게 세상과 작별한 엄마의 이야기는 눈물이 많이 났고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혼자 살아내는 것 같지만,각자의 가슴 안에 파묻힌 뿌리처럼 가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의 서사에서 시작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시선이 맞물려 작가의 차분하면서 진심어린 태도가 느껴졌다.
평범한 일처럼 일어나는 일에 때로는 무심하지 않는 용기,타인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한 것 같다.
어른이 되어도 아직 성숙되지 않았지만,성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해보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고 우리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가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들춰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책 속에서 만났을 때 부끄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지만,읽고 나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한 껏 울고 나면 얼굴도 어려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지나간 시절을 통과해 지금 여기서 이야기가 계속 어어져갈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첫 눈이 펑펑 오는 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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